#1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가능한 천천히 담배를 물고, 여유로운 척 라이터를 만지작 거리다가 불을 붙였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는거야. 뭘요? 아니지 아니야. 네 잘해요. 같은거? 아니 내가 잘하던가? 못하진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짧디짧은 담배가 타들어가면서 이제껏 스쳐지나왔거나 꾹꾹 눌러담았던 침대나 온돌의 흔적들이 쏜살같이 되살아나고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린라이트인가? 아닌데, 남자친구 생긴걸 축하한다고 케익 사준게 불과 몇달 전인데. 잘해..? 내가 잘하는건 롤이랑.. 또.. 뭐가 있지.. 그.. 음.. 장난스레 건낸 말일까하고 무심히 그 아이의 표정을 보았더니 그다지 심각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아보였다.
#2
이제 막 변성기가 오려는 시점에서부터 우리의 시간이 흘러갔으니, 지금이 되서야 생각해보면 신기할만큼 아주 오랜 인연인듯 싶다. 그 아이를 생각할때면, 아주 어쩌면 내가 그 때 반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몇몇 있다. 재수를 한다며 집구석에 쳐박혀 몇날며칠을 나오지 않는 그 아이를 데리고 근교의 근사한 벚꽃길에 데려갔던 날. 꽃이 피고 날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봄날이 아니니까 화사한 옷은 안 입을거야. 라며 입고 나온 검정색 원피스에 오래지 않은 구김들. 그리고 그 사이로 밀려나온 허연 목덜미가 매끄럽지도 않은데 유다지도 야하게 느껴졌던 날이라던가. 그 날 우리는 가려운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근처 커피집에서 지나다니는 커플들의 흉을 시덥잖게 봐댔었다. 비염이 심한 그 아이의 코가 훌쩍댔던 기억도 얼핏 난다. 그리고 또, 나는 영영 연애 같은건 못하는 연애병신인가봐하며 이기지도 못할 술을 쳐마시며 엉엉 울던 그 아이의 눈물도 콧물도 톳물도 어르고 달래어 결국 그 아이를 웃게 했던 날이라던가. 내가 무슨 우스갯소리로 그 아이를 웃게 만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영 모를 일이다.
#3
야 왜 대답이 없냐. 잘하냐구 너. 잘해? 잘 치냐?
아니 누나 민망하게 진짜, 술 좀 그만 먹어요. 잘하긴 뭘 잘해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왜 그러는데요.
오른손주먹의 엄지쪽면으로 왼손바닥을 탁탁 쳐대는 그 아이의 행색에 나는 순식간에 감흥을 잃어버렸고, 옆 테이블의 또래남녀가 우리를 흘깃 보고 저들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헤실거렸다.
나 28년동안이나 솔로였어. 바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고 연애하기 힘든 시간들도 많았지. 그래도 어떻게 상황이 좀 풀리니까 바로 남자친구가 생기더라. 역시나 싶었어. 내가 여자로서 별론건 아닐까, 내 주변 남자들이 다 고잔건 아닐까 그런 생각 종종 했었거든. 근데 남자친구가 떡하니 생기니까 친구들도 더 잔소리도 못하고, 집에서도 연애해라 시집 어떻게 갈래 별에 별 소리를 다 하다가 잠잠해지고, 무엇보다 내가 뭔가 인정받는 기분이 들더라. 잘난 새끼는 아니였지만, 친구년들이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자랑하는 멀쩡한 차가 있는것도 아녔고, 대단한 집안도 아녔고, 대단한 선물을 해주지도 않았지만, 나도 별로 대단하진 않으니까 좋았어. 괜찮았어. 그리고 날 사랑한다니까 참 좋더라. 그리 좋았는데, 내가 못한대. 씨. 못해서 싫대. 처음인데 어떻게 잘하냐고. 꼭 잘해야돼?
#4
처음 나눴던 섹스의 감촉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욕구가 폭발하다못해 천원을 돌파하던 청소년 시절에야 이성과의 육체적 교감이 나를 홍콩이나 천당 같은 곳으로 표현되는 그 곳에 데리고 가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성인이 되고 대단한 기승전결없이 어영부영 겪게 된 첫 경험은 꼭 내가 생각했던 그런것만은 아니였으니까. 그 날의 처음 이후에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섹스라는건 몸을 이어주는 게 아니고 마음을 이어주기 위해 있는걸지도 몰라. 같은 것이였다. 그리고 참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산다는게, 욕구라는게, 충족이라는게.
#5
잘해야되냐고!
웅얼웅얼거리며 이야기를 꺼낸 그 아이는 어찌나 억울했는지 악다구니를 쓰더니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를 끝마쳤다.
나는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라고 일단 잘... 아니, 못하는건 아니지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얼마나 못하는지도 모.. 아니, 그런게 중요한게 아닌 듯 했다.
아니 뭐 그런 새끼가 다 있냐? 그래서 뭐랬어요?
맞지 나쁜새끼지? 내가 쪽팔려서 말 안할려고 그랬는데 걔한테 처음이라서 못한다고 미안하다고 그랬어. 근데 그 말을 하고나서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 내가 왜 미안해야돼? 이게 처음인게? 처음이라서 못하는게? 처음인데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서? 씨 도대체 왜?
진정해요 누나 아주 그 놈이 또라이 같은 놈이구만. 누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나였으면 진짜 신줏단지 모시듯이 했다. 아니 그리고 말이야..
열변을 토하려는 찰나 그 아이의 전화벨이 울렸고, 욕을 순식간에 네다섯개가 내뱉고서 그 아이가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다. 나는 아까 피다 만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무슨 말로 그 아이를 달래줘야할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십분여가 지났을까. 그 아이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6
야 남자친구가 미안하대. 술 먹재. 이쪽으로 온대. 얼굴 볼래?
아뇨. 집에 갈게요 피곤해서.
아니 왜 가 갑자기. 그래서 너 잘하냐고.
아 내가 그걸 어찌 압니까 전여친들이랑 헤어질때마다 내가 잘했니 못했니 나 플레티넘쯤은 되니 혹시 브실골이였니 물어볼수도 없는거고
내 전여친들이 다마챌이였는지 어찌 알아. 그거 뭐 대단한거라고 그냥 서로 좋았으면 됐지. 갑니다. 담에 봐요 누나.
순식간에 데꿀멍했던 나는 눈치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주섬주섬 나의 아무 것들을 챙겨서 술값을 더치하고 집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집에 돌아오는 골목길에 담배를 한대 피웠다. 그러니까 못해서 싫다는 말은 어쩌면 애초에 그 새.. 아니 그 분은 안했을지도 모르는 말인거고, 그 아이가 아무렇게나 욕하다보니 나온 말일수도 있는거라는 가능성이 뇌리를 파팟하고 스친건 버스에 오른지 몇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그냥 별 것도 아닌거 가지고 싸운 뒤에 오랜만에 만난 날 보고 술만 퍼먹다가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너 잘하니라니 내가 뭘 잘해야 되는거에요 누나? 에잇.. 저는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그건 제껴두고 제가 잘하는 롤이나 하러 갈랍니다. 모쏠 탈출 연애 잘하쇼. 그리고 누나. 그거, 대단한거 같지만 해보면 별거 아닙니다. 처음이 어렵지. 아.. 아니지 아니야.. 나도 처음만 어려울 줄 알았는데...... 아니지 아니야. 직접 겪어보세요. 그러고나서 술 한잔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