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블로그에 글을 좀 올리고 있습니다.
블로그 반말체 양해바라며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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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시기 사마광과 구양수가 나눈 일련의 논쟁은 당시 사회상의 일면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논쟁의 발단은 과거시험 합격자의 지역별 할당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사마광의 주장에 대해 구양수가 반발하면서이다.
일단 문과시험, 그 중에서도 진사 제도만 떼어 놓고 이야기해보자. 나머지는 너무 잡다하고 방대하며 진사제도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패스.
송대 과거제도는 크게 3 단계로 나누어져있다.
첫째가 향시. 일단
[주]에서 시험을 보는 거다. 이 주가 크기가 얼마만하냐면, 음.... 현재 우리나라의 작은
[도]정도라고 보면 된다. 충남이나 충북 정도를 떠올려보면 대략 맞다. 물론 큰 건 강원도 만하고 작은 건 제주도 만한 것도 있다.
이렇게 주에서 보는 시험을
[해시(解試)] 라고 한다. 묶여있던 걸 "풀고" 수도로 간다고 해서 해시이다. 해시를 통과하면 수도에 가서 시험을 보는데 이걸
[회시(會試)]라고 한다. 도회지 할 때의 그 "회"자이다. 회시를 통과하면 어전에서 시험을 보는데 이걸
[전시(殿試)]라고 한다. 궁궐에서 보니까 전시.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사시1차/2차/3차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1차가 어렵긴 하지만 통과가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고 2차는 대단히 빡빡하지만 이거 붙으면 일단 합격은 보장되는 거다. 3차는 그냥 합격자 간에 등수만 정하는 명예시험이다. 1천명 면접봐서 1명 떨어뜨리는 사시 3차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일단 송나라 내내 1차 시험에 지역별 쿼터제도가 운영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교육열이 대단하고 인프라가 발달된 지역이라 하더라도 많은 해시 합격자를 배출해 수도로 보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런 지역의 지옥 같은 경쟁을 뚫고(심하면 200대 1 정도 됐다) 회시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 후보생들은 대개 회시도 통과하긴 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조치를 받은 좀 낙후된 지역의 해시를 뚫고 온 후보자들이다. 이들은 해시야 수월하게 통과하긴 했지만 회시 수준에 올라가면 더 경쟁이 심한 주의 지옥문을 뚫고 온 굇수들과 같이 시험을 보게 되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이는 마치 꿀보직에서 꿀기수에 당첨되어 꿀 빨던 평범한 육군 병장이 어느날 갑자기 최정예 특전사 굇수들이랑 같이 유격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지역별 균형을 맞춰준다는 취지가 상당히 무색하게도 최종 합격자의 지역편중은 갈수록 심해졌다.
John Chaffee의 통계에 따르면 성도부근/양자강하류/복건성일대/강서성일대의 네개의 굇수같은 지역에서 배출한 과거시험 합격자가 송나라 전체 과거시험 합격자의 (남북송 합쳐서) 93%를 차지했다고 한다.
....-_-;;
정말 무서운 수치 아닌가? 제국 전체 영토의 1/3이나 될까 한 지역 출신들이 합격자 총수의 무려 93%를 차지하다니. 우리로 치면 사시 합격자의 93%가 수도권 출신이라고 생각해보자. 기가 막힌 일 아닌가.
그래서, 사마광이 빡친 데에는 이유가 다 있다. 그는 북방의 낙후된 지역 출신으로, 경제력과 인프라의 차이로 인해 고향 출신 후배들이 고통받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과감히 제안한다.
[그냥 회시도 지역 쿼터 하면 안 됨?]
이 말을 듣고 (과거시험 성적이 매우 우수했던 남쪽 출신인) 구양수가 빡친 데도 다 이유가 있다.
[해시에서 차별 받는 걸로도 충분히 X빡치거등?]
여기서 우리는 얼핏 보기에 사마광이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과거시험과 관료채용이란 제도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양수에게 있어 과거합격과 관료채용은 일종의 능력에 대한 보상 겸 능력자를 골라 채용한다는 채용자측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자기 지역의 이익이 크게 위협받자 그냥 그것 때문에 빡친 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구양수가 그렇게 야박하게 자기 이득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향 관념도.... 말년에 고향에 안돌아가고 다른 지방에 눌러 살다가 죽은 것만 봐도 고향에 딱히 엄청난 애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입사시험 사정관 입장에서 "그냥 제일 일 잘할 것 같은 애들 시험봐서 성적대로 뽑는게 맞는 거 아냐?"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본 제도에 대한 사마광의 이해는 구양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야 이러다간 북방 출신들은 조정에서 씨가 마를거야.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쩔라고 그래]
반란...!
구양수는 능력자를 채용해서 유능한 정부를 만들 생각은 안하고 뭐 무슨 반란을 이야기하냐고 씩씩거리는데, 사실 사마광 말이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다. 중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의회]가 없었다. 아니 그럼 민주주의국가도 아닌데 의회가 없는게 당연하지 그게 뭔소리요 하겠지만, 조금 달리 말하자면 지역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기들을 대신해서 수도에 진출해서 자기들을 위해 변론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대표해줄 공식 기구가 없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같은 구분 없이 정부 권력을 집행하는 유일한 계층이 과거시험 합격자들이었던 만큼 그들은 마치 오늘날 지역구 국회의원들처럼 중앙 조정에서 각자의 지방의 이익을 대변해야할
[의무와 기대] 같은 게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거다.
사마광이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꺼낸 데에도 이유가 있다. 북송은 군웅할거가 마무리된 직후의 시대이고, 따라서 각급 지방들은 독립정부를 구성했던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비록 군사적으로 밀려서 항복한 거긴 하지만, 나름 선의를 가지고 송나라 조정에 협력해서 통치기구를 돌렸던 이유는 송나라 조정이 매우 과감하게 과거 채용 인원 수를 폭증시켜서, 그래서 각급 지방민들 입장에선 새로 들어선 통일제국이 각 지방의 목소리를 잘 수용해준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 합격자가 지방 이익의 대변인이 되는게 한 편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이상 그 통로가 제도적 헛점으로 막히게 된다면 반란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은 아닐 수도 있는 것.
사마광의 제안은 거절당했지만 물론 반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구양수가 (속으로) 여유있게 생각했던 것처럼, 중앙의 힘은 이미 지방에서 뭘 넘보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해졌으니까.
자, 이제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지역안배]론에 구양수와 사마광의 논쟁 같은 걸 끼얹어보자.
[긴급 성명] 문재인: 사상 최악의 지역차별 정권에 경고합니다.
https://ppt21.com../pb/pb.php?id=freedom&no=56235&page=4
당대표 경선을 뛰는 중인 문재인 의원이 행정부 내의 주요 수장들의 출신 지역을 놓고 지역차별정권임을 지적했다.
행정부 주요 기관장들의 지역 안배는 내가 알기로 90년대 말 까지만 해도 대단한 관심사였다. 조각이 있을 때 마다 출신 지역이 어떻게 되는지가 신문별로 자세히 분석되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2010년 즈음을 넘어서서는 언제부턴가 출신 지역 편중 문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약간 덤덤해진 것 같다. 정말 덤덤해졌는지, 덤덤해졌다면 어느정도 덤덤해졌는지를 빼곡하게 제시하려면 신문 DB 쌓아놓고 그래프를 하나 만들어야겠지만 그건 너무 귀찮아서 패스 -_-; 그냥 직감상 그렇다고 하고 넘어가보자.
자 그렇다면 그 이유는? 푸엥카레 뺨치는 추측을 한 번 날려본다.
1.
[의회]의 실질 권력이 이전에 비해 증가한 반면,
[행정부]의 실질 권력이 이전에 비해 조금씩이나마 감소했다는 것.
[의회]의 실질권력이 증가함에 따라 의원들의 출신지역 대변자로서의 기능이 부각되면 될수록 행정부 내에서 자기 지방의 이득을 대변해야할 필요성과 당위성이 점차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오레곤주 주민들이
[왜 오바마 행정부엔 오레곤 스테이트대학 출신이 없는거야!]라며 화내진 않을 것 같다. 오레곤주를 대표하는 건 주 출신 상원의원들이지 행정부 관료는 아닐테니까.
전통적으로 의회나 사법부를 따로 구성해본 기억이 없는 한국인이 1948년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을 때 행정부의 권한이 다른 나머지를 모두 압도했던 건 그닥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이 막대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의회와 사법부가 (비록 속도가 느리긴 하다만) 조금씩 더 힘을 얻어가는 건, 어찌됐든, 흥미로운 변화다.
-->사마광 시무룩, 구양수 빵긋
2. 물론 더 과감한 추측도 제기할 수 있다. 행정부고 사법부고 입법부고 그냥 국가조직 자체의 권력이 조금씩 약해지고 대신 또다른 사회적 영역에서 그 권력을 조금씩 이양받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재계의 힘이 국가의 힘에 비해 더 커지고 있다거나 해서 국가 조직 내에서 지역을 대표해봤자 그게 이제와선 그닥 큰 의미가 없게 된 걸 수도 있다.
-->사마광&구양수 시무룩
3. 또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수도권의 힘이 과거에 비해 더 강해지면서 지역을 대표하고 어쩌고 하는 발상 자체가 별로 유의미한 논의가 되지 못하게 된 걸 수도 있다. 수도권을 제외한 타 지방의 지역구 의원 수가 인구유출로 인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이 추측은 제법 설득력을 지닌다. 한마디로, 지역안배 어쩌구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냥 수도권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지역 vs 수도권이 지역 vs 지역 문제보다 더 심각한 화두가 되었다는 것.
-->사마광 시무룩, 구양수 빵긋(?)
그래서 위의 세 가지 추측 중 어떤 쪽이 정답이냐고. 글쎄, 모른다. 어쩌면 세 가지 중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모두가 정답일 수도 있다. 의회는 강해지는데 행정부와 사법부는 약해지고 그 와중에 국가조직 바깥의 영역에서 실질적 힘이 강해지는데 또 그 와중에 수도권 출신 의원의 수가 지방 출신 의원들을 압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뭐가 어찌 됐든 수도권 제외 기타 지방 입장에선 딱히 좋을 게 없는 이야기들이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다만 향후 한국 사회의 귀추를 지켜볼 때 위의 사항들을 관전 포인트 삼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결론: 사마광 시무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