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요약
"충무공 이순신은 간과(창과 방패)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 영조가
박문수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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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도, 현재의 목포 앞바다 고하도입니다. 섬의 크기도 적당하고 겨울의 서북풍을 막기에도 딱이었다 합니다. 이 곳에서 조선 수군이 재건되죠.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일본군을 쫓아낸 걸로는 부족했죠.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이 조선의 바다에서 적들을 몰아내야 했습니다. 봄이 되면 그 전쟁이 다시 시작될 거였습니다.
결론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경리(양호)의 분부로 선박의 수를 나누어 정하였다. 평안도 철산에서 만들어야 할 배의 숫자는 20척인데 이미 완성된 배가 8척이니 더 만들어야 할 배가 12척이고, 황해도 장산곶에서 만들어야 할 배의 숫자는 50척인데 이미 완성된 배가 40척이니 더 만들어야 할 배는 10척이며, 충청도 안민곶에서 만들 배의 숫자는 10척인데 방금 일을 시작했다. 전라도 변산에서 만들 배의 숫자는 20척인데 전일 속공선 13척을 그대로 더 수리했으므로 더 만들 것이 7척이다. 이상은 모두 조선(조운선)에 관계된 것이고, 병선(兵船)에 대해서는 양호(충청전라)의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다시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었다. 주사(수군)가 이미 40척을 만들었는데 이 숫자를 합하여 경리에게 보고하였다." - 1598년
2월 22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요? -_-a 다른 데선 조운선 만드는 것도 힘에 벅차 하는데 수군은 한 층 더 올려 만들어야 되는 판옥선을 40척이나 만들었댑니다. (...) 겨울 동안에 말이죠.
명량해전과 맞먹을. 어쩌면 명량을 뛰어넘을지도 모를 공입니다. 단 몇 개월 사이에 초토화된 전라도에서 외부의 지원 없이, 그것도 적들이 근처에 있는 상황에서 수군의 재건에 성공한 것이죠.
물론 무에서 이걸 만든 건 아닙니다. 당시 그 지역에 남아있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것이죠. 11월 25일, 전라도 순찰사 황신이 왔고, 여기서 전라도의 바다에 접한 19개 고을을 모두 수군에 전속시킨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임진년 이래 이순신이 그렇게 그렇게 주장했던 게 이 때서야 먹힌 것이죠.
군량을 최대한 모아야 했습니다. 미처 거두지 못한 곡식들, 적이 버리고 도망간 군량들을 최대한 긁어모았고, 양반들이 사재를 털어서 군량을 지원해 주었고, 의병으로 참전해서 도왔죠. 한산도에 있을 때 그랬듯 염전을 이용해 물자를 모은 모양이구요. 흩어졌던 장수들이 계속 돌아왔고, (이순신 자신이 처벌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처벌하라는 조정의 명령도 받아야 했습니다. 이거야 정당한 명령이겠지만, 선조는 심심하면 칠천량의 패장들을 처벌하라고 난리였죠. -_-; 신하들은 '원균 나오면 원균부터 처벌하자'고 막았구요. 심지어는 이순신이 배설을 숨겨둔다 생각했는지 배설을 찾으러 선전관이 오기도 했습니다.
명령하고 명령하고 명령하고 명령하고 욕하고 처벌하고 처벌하고 다시 명령하고... 정말 끝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쁜 게 더 나았겠죠. 슬픔은 바쁠 때 잠시 제쳐둘 뿐,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오늘밤은 한 해를 마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 정유년 12월 30일
그렇게 1598년 무술년,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가 밝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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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12월 말, 조명연합군은 회심의 일격을 날립니다. '울산성 전투'였죠. 자료마다 다르지만 명군이 4만 전후, 조선군이 1만 정도로 4~5만의 대군이 가토 기요마사 하나를 잡으려고 울산으로 간 겁니다. 여기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순천 쪽을 공격하려는 듯한 페이크도 치면서 말이죠.
일본군의 판단은 그리 틀리지 않았습니다. 겨울의 추위와 명군의 역습, 이걸 생각하면 후퇴해서 왜성을 쌓는 게 일본군에게 중요했죠. 명은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선을 포기할 생각 역시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상태에서 조명연합군의 역습 역시 당연한 거였죠. 목표인 울산 도산성은 전투 직전에 완공됩니다.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왜성의 형태로 말이죠.
근처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급히 도산성에 들어갔고, 조명연합군은 거세게 밀어붙여 외성을 점령하지만, 왜성은 방어에 올인한 구조라 내성이 또 있었죠. -_-; 가토 기요마사군은 엄청난 피해와 식량난에 시달리면서도 항전했고, 결국 자기네 성에 웅크려 있던 일본군들이 뭉쳐서 조명연합군을 공격, 조명연합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 이 때 할복까지 결심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이후 구마모토성을 짓게 됩니다. 방어력은 물론 최강급이고 우물을 잔뜩 파고 고구마 줄기로 다다미를 만들 정도로 식량, 식수 확보에 열을 올린 성이죠. 일본의 3대 성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일본군으로서도 충격이었습니다. 명이 강력하게 나선 것이 충격이었고, 일본군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히데요시가 무서워서 전쟁을 포기할 수도 없었죠. 이 때 울산과 순천 포기를 건의했지만 히데요시는 거부합니다.
"수군과 육군 10여만 군사를 쓰지 않고는 일을 끝낼 수가 없을 것 같다" - 양호, 1598년
2월 2일
명군으로서는 정말 아까운 한 판이었습니다. 그 독한 가등청정을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왜성의 방어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한 놈만 패면 일본군도 뭉쳐서 싸운다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모아서 밀고 나가야 했죠. 이렇게 해서 사로병진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일본군은 왜성에서 버티기로 나오고 조명연합군은 기모으기에 들어가면서 무술년 내내 대치상황이 계속됩니다. 전투는 조선 관군과 의병, 일본군간에 소규모로만 진행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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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2월 17일, 조선 수군은 고하도를 떠납니다. 목표는 고금도였죠. 그 이유를 이렇게 보고합니다.
- 소서행장은 예교에 주둔하고 있으며 2월 13일에는 평수가(우키다 히데이에)가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같은 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군은 멀리 나주 경내의 보화도에 있으므로 낙안(순천)과 흥양(고흥) 등의 바다에 출입하는 왜적이 마음 놓고 마구 돌아다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잔잔하니 이는 바로 흉적들이 소란을 일으킬 때이므로 2월 16일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보화도에서 바다로 나아가 17일에 강진 경내의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 고금도 역시 호남 좌우도의 내외양(內外洋)을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산봉우리가 중첩되어 있고 후망이 잇대어져 있어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도 역시 많고 한잡인도 거의 1천 5백여 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흥양과 광양은 계사년부터 둔전을 하였던 곳으로 군민을 초집하여 경작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선조실록 1598년 3월 11일
봄이 되고 바람이 잔잔해지면서 수군이 활동하기 좋을 때가 왔습니다. 이제 적을 향해 진격할 때였죠. 첫 목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순천이었습니다. 이 때는 우키다 히데이에의 병력까지 충원돼 있었죠. 거기다 소규모 병력을 계속 서쪽으로 보내고 있었죠. 고하도에서는 이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적을 압박하기 위해 더 밀고 들어간 것이죠.
고금도는 조선 수군과 그를 따르는 피난민들이 살기에 좋았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둔전을 시도하고, 임진년에 그랬듯 해상통행첩도 만들어서 물자를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수군의 병력은 팔천명에 달했고, 군량을 제대로 모아야 했죠. 뭐 그래도 전라우수사 안위에 경상우수사 (방답첨사였던 입부) 이순신이었으니 마음은 정말 편했을 것 같습니다.
+) 명에 보고할 때는 이천명이라 보고했는데, 일부러 조선 수군의 수를 줄이고 물자가 부족한 것처럼 하라는 결정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수를 축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진린이 오고 순천 왜교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때까지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순신이 장계를 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말이죠. 난중일기도 무술년편은 거의 없고, 장계도 없고 -_-; 뭔가 많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래저래 전투가 지속됐다는 건 분명하죠. 3월 11일에는 다른 곳도 아닌 고금도에 적들이 약탈하러 왔다가 전멸당한 거라든가 (...) 말이죠. 이 때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가 흥양현감 최희량의 서목입니다. 이순신과 전라병사 이광악에게 보내는 보고서죠. 여기엔 3월 18일에 조선 수군에 쫓겨 상륙한 적선 5척의 병력을 20일까지 매복으로 공격해 수급 31급을 베고 1명을 생포한 것, 4월 14일에 적선 12척이 상륙한 걸 공격해 3급을 벤 것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다 전라병사 이광악이 5월 25일부터 6월 8일까지 적들이 흥양 백성 300여명을 잡아갔는데 최희량은 보고 안 했다고 벌 주라는 상소도 있죠 (...) 또한 이런 상황을 보면 조선 수군은 육지에서도 계속 싸운 걸 알 수 있죠. 위의 이광악의 상소에 낙안군수 방덕룡도 포함돼 있는데 노량해전에서 전사합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일본군을 밀어붙입니다. 바다에서 싸우고 육지에서 싸우고, 이대로 순천까지 밀고나갈 수 있을 것 같았죠. 하지만 상황은 좀 다르게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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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수군의 파견은 임진왜란 떄부터 이미 말이 나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파병은 하지 않았죠. 조선 수군이 워낙에 킹왕짱이었으니까요. 거기다 명나라 수군은 -_-a 열악했죠. 뭐든 안 쓰면 약해집니다. 정화의 대원정을 한 명나라지만, 해금정책을 펴면서 수군은 극히 약해졌고, 왜구를 막는 것도 육지에서 막는 전략을 썼죠.
하지만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망하면서 명은 수군 파병을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산동반도부터 강남까지 중국의 해안방어를 강화하죠. 요동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육군이야 조선을 다 뚫고 오기에도 시간 걸릴 테니까요. 하지만 왜구들이 중국의 해안가를 노린다면? 끔찍하죠. 뭐 그 왜구랑 이 일본군은 좀 달랐지만요.
계금이 이끄는 병력 삼천은 정유년 말에 강화도에 도착했고, 늦어도 여름에는 이순신과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순신은 탕패당한 뒤, 떠돌아 다니며 피란하는 사람들을 수습하여 군병을 만들고 황폐한 곳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가까스로 물력을 자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많은 장관들이 내려가 그와 함께 진을 치고 있는데, 모든 일에 우리의 물력은 헤아리지 않고 끊임없이 독책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군병과 기계까지 점고하여 모든 사무를 자유로이 처리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위관의 명령을 받고 있으니, 그간의 징색의 폐단과 난감한 역사(役事)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육지로 군량을 운반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우리 나라 주사(수군)의 군량으로 우선 공급하고 있으니, 조금 남아 있던 군량마저도 머지않아 고갈될 것입니다. 신들은 이 점이 몹시 우려됩니다." - 6월 24일
조선 수군이 겨우 마련한 물자를 아낌없이 뺏고, 온갖 일에 간섭하고 명령하고, 겨우겨우 마련한 군량들을 열심히 쳐먹고 있었던 겁니다. -_-;
조선으로서도 명 수군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조선 수군 단독으로는 수가 적었고, 더 수군에 몰아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조라면 더 몰아주기도 싫었을 거구요. 어쨌든 수는 많으면 좋고, 적에게 명 수군이 왔다는 압박도 되겠습니다만... 이런 꼴이 나 버렸죠. 계금은 적과 싸우기가 좀 많이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나마 나중에 진린이 오면서 이 부분은 좀 나아지죠.
그래도 명군과 계속 접촉하면서 이순신에겐 좋은 부분이 생겼습니다. 명군이 수군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상을 주라고 압박한 것이죠. 명군을 이끌던 경리 양호는 직접적으로 압박을 줍니다.
"상격(賞格)을 빨리 더 올려 사람들의 마음을 진작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 나라에서 줄 만한 물건이 없다면 내가 그것을 처리하고 싶다" - 4월 14일
명량 때는 직접 선물을 줬으니 이건 그 이후의 일을 가지고 말한 걸 겁니다. 명 수군이 조선 수군과 일을 같이 하면서 이순신의 능력을 더욱 잘 알게 된 것이든가, 기록에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을 뿐 그 정도의 공을 더 세운 것이든가, 둘 중에 하나거나 둘 다겠죠.
선조의 반응은 '작은 승리로 명군에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한 거지 상은 주더라도 뭘 가자까지 하냐' 이런 식이었습니다. -_-; 네 명량 때도 은 20냥만 준 선조인데요. 하지만 양호의 압박은 계속됐나 봅니다. 4월 말에 정 3품 절충장군에서 종 2품 가선대부로 가자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네, 1차 출동의 승리로 받은 품계였죠. 그리고 이 날 같이 가선대부로 올려진 사람이 김응함입니다. 네 명량해전 때 중군장이면서 도망갔다가 두 번째로 온 그 김응함이요. -_-;
+) 조선이 화폐경제가 아니었으니 명을 기준으로 하자면, 은 1냥은 쌀 4~5섬 정도였습니다. 풍흉에 따라 당연히 달랐겠지만요.
이에 대한 축하인지 계금을 필두로 4월 26일 명나라 장수들이 선물을 보낸 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거 참 병 주고 약 주고인지 (...); 아무튼 이순신이 명나라 장수들에게 이 정도로 스타였다는 걸 알 수 있죠.
김경진님이 주장한 떡밥, 이 때 이순신이 명나라의 정 1품 수군도독이 된 걸 이 때로 잡습니다만... 이제 진린이 오니 그 때 얘기하도록 하죠.
6월 26일, 진린은 남해로 떠납니다. 선조는 동작강 언덕까지 가서 진린을 보냈죠.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배신들 중에 혹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이 날의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 날 진린은 조선의 관리들을 두들겨 팼고, 찰방 이상규의 목을 끈으로 묶어 끌고 다녀 피투성이가 되게 했다고 합니다. 영의정인 류성룡이 이를 말려도 무시했구요. 왕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저 말을 한 겁니다. 조선 수군을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강조한 것이죠.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또 패하겠구나!" - 류성룡
헌데 정작 밑으로 내려가니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죠.
"도독이 진에 있은 지 오래 되어 공의 호령하고 지휘하는 범절을 익숙히 보고 또 자기는 배가 비록 많다 해도 적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매양 전쟁이 있을 적마다 우리 판옥선을 타고 공의 지휘를 받기를 원하며 모든 호령과 지휘를 죄다 양보하는 것이었고 또 반드시 공을 '이야(李爺)
안돼」라고 부르며,
'공은 작은 나라에서 살 사람이 아니다.'
고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 벼슬하라고 권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 행록
진린이 오자마자 예포를 쏘며 환영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었고, 적의 수급을 조선 수군이 독점해서 삐치자 -_-; 수급을 몰아 줬다 합니다. 한편으로는 명군의 약탈이 극에 달하자 건물들을 허물면서 수군을 해산할 움직임을 보이니 진린이 왜 그러냐면서 달래자 명군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 해 그런 권한까지도 얻었죠. 거기다가 가마를 타고 갈 때도 절대 앞서가지 않고 나란히 갔다고 합니다.
위에서의 상황이랑은 정반대의 일이 펼쳐진 것이죠. 거기다 진린이 썼을 시가 남아 있습니다.
"당당하고 용감하신 그대 없었으면 / 이 나라 운명 위험하였으리 / 제갈량처럼 일곱 번 사로잡고 / 진평처럼 여섯 번 계책을 내놓자 / 위풍은 만 리에 떨쳤고/ 공적은 세상에 두루 알려졌소 / 나는 더 이상 쓸모 없으니 돌아가겠소 / 지휘권 돌려드릴테니 사양 마시오"
이건 이순신의 화답시죠
"다행히도 천자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 장군을 보내시어 구원하게 하시었소 / 만 리 먼 길 정벌 나온 바로 그 날이 / 이 나라 삼한이 다시 살아난 때라오 / 부군께서는 본래부터 용감하시지만 / 이 나는 본래부터 아는 것이 없고 / 다만 나라 위해 죽으려는 각오뿐이니 / 다시 무슨 긴 말이 필요하리까."
그 다음 진린의 시입니다.
"만약 이 나라에 장군이 없었던들 / 그 누가 이 나라 운명 붙들었겠소 / 지난날엔 오랑캐 몰아세웠고 / 오늘날에는 요망한 기운 거두시었네 / 그대 큰 절개 모든 사람들 우러러보고 / 그대 높은 이름 만국이 두루 안다오 / 황제께서 간절히 그대 보자 하시거늘 / 뛰어가지 않고 왜 끝내 사양하시오"
그 답이죠.
"그대 만약 중원으로 가시고 나면 / 중원 밖의 이 나라 위태로워질 거요 / 남쪽의 왜적들 또다시 설칠 테고 / 북쪽의 오랑캐도 그 틈을 노릴 때 / 절개 지켜 끝내 나라 은혜 보답할 뿐 / 성공 여부야 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 평생의 마음 이미 정해졌으니 / 이 밖에 무슨 말 또 하오리까."
자... 이건 보통 대화가 아니죠. 진린은 지휘권 문제도 직접 꺼냈고, 황제가 이순신을 부른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순신은 적이 또 언제 올지 모르니 조선에 있겠다고 하는 것이죠.
명나라에서 이순신을 그저 잘 싸우는 조선의 장수로 본 것이 아니라 많이 탐 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황제가 직접 말이죠. 이쯤되면 전쟁 끝나면 바로 데려갈 기세입니다. 이 정도면 명나라 장수들의 태도 및 진린의 태도가 이해 되죠.
이런 상황을 종합해서 나온 떡밥이 바로 김경진님의 임진왜란에서 나온 '대명수군도독'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얘기를 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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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arfog.net
여기서 임진왜란-대명수군도독 파트에 있습니다. 어느새 10년이 된 얘긴데, 책으로 나올 수는 있을까요.
현재 통영 충렬사에는 명나라 신종 만력제가 내렸다는 '도독인'을 비롯한 팔사품이 있습니다. 통제영에 쭉 보관돼 온, 조선 수군의 자랑이었죠. 진린이 이순신의 공을 황제에게 보고해서 정 1품 수군도독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기록에 나오는 건 1650년 김육이 쓴 신도비명부터구요.
+) 참고로 김응하(임란 때는 김응서)는 심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명에서 요동백으로 추증해 줍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별다른 연구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진님의 과감한 해석이 나온 것이죠.
- 수군도독은 정황상 이순신이 살아있을 때, 명량해전의 공으로 무술년 4월 26일 받은 걸로 추정된다. 양호가 이 때 선조에게 이순신을 가자하라 압박을 준 것은 명의 품계로 정 1품인데 조선 걸로는 겨우 정 3품이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해결된다. 진린은 도독 대접 받았지만 사실 종 2품 도독첨사로, 이순신보다 아래가 된다.
부하가 뇌물 좀 주고 잔치 좀 베풀어줬다고 맞먹자 하는 상관 없고, 그 부하를 상관으로 모시지도 않는다. 이순신이 상관이어야 말이 된다. 품계로 이순신이 위니까 대접은 해야겠는데 직책으로는 자기가 위고 지휘권은 갖고 싶으니 선조 앞에서 그런 쇼를 벌인 거고, 정작 이순신 앞에서는 얌전하고 말도 잘 들었던 것이다.
+) 흔히 알려진 이야(李爺)로 존칭을 썼다는 것, 거기다 위에 이순신의 답시에서 '부군'은
남편 친구를 뜻한다 합니다. 진린은 아저씨라 하고 이순신은 진린보고 친구라 했다는 거죠.
- 이 사실이 1650년에야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조선의 왕이 대충 명 정 1품급과 격을 맞추는데 신하가 정 1품인 건 숨겨야 됐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무술년 편이 거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시무시하죠.
하지만 사실 이건 역덕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지진 않았습니다. 팔사품 자체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것도 있지만, 명에서도 기록이 없었거든요. 임란 끝나고 이순신한테도 포상해라 정도가 다입니다. 이에 맞설만한 논리는 그저 명 실록에 안 남았다 정도일 겁니다. 조선의 실록에도 없는 건 (당연히) 많고, 특히 만력제는 황제일을 파업(...)했으니까요. 하지만 실물이 남아있으니 부정도 없었죠.
이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면 (정말 없었거든요 -_-;) 했고, 실제로 연구가 최근에 됐죠. 헌데... 이건 다른 의미로 많이 무시무시합니다.
http://tyinews.com/ArticleView.asp?intNum=31078&ASection=001001
세 줄 요약해 봅니다.
- 도독인(印)의 모양을 보면 절대 관인(官印)이라 볼 수 없다. 개인이 만든 사인(私印)이다. 안에 내용도 제대로 해독 안 된다.
- 도독인을 넣은 함궤 역시 명나라 것과 생긴 게 다르다. 후대에 만든 거다.
- 다른 팔사품들 역시 황제의 예에 맞지 않고 오히려 지방색이 난다. 그 중에 몇 개는 후대에 만든 거다.
... 무시무시하죠? 참고로 저 후대라는 게 신관호=신헌 때입니다. 신헌은 수군통제사를 지냈는데... 대원군 때이고, 김정호가 지도 만드는 걸 감독했으며, 강화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 더 무시무시하죠?
http://blog.naver.com/hangiree/30012336970
예전부터 이에 대한 주장이 나왔었구요. 한길님인데 제 글에서도 여러 번 이 분의 연구를 인용한 적 있습니다.
위의 중국인 학자나 장경희 교수나 '진린이 선물해 준 거다'는 결론에서 멈추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발표할 당시 매서운 항의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하네요. 저기서 한 마디만 더 가면 정말 무서운 결론이 나오죠.
진린이 그냥 개인 자격으로 도독인을 만들어줬을 것 같진 않습니다. 애초에 이런 게 가능이나 할까요? 그것도 자기보다 더 높은 품계의 것을 만든다는 게요. 진린은 정유재란 때의 공으로 종 1품 도독동지에 오릅니다. 참고로 명에 수군도독이란 것도 없습니다. 후에 진린이 좌도독에 오르죠. 만약 정말 진린이 도독인을 만들어 준 거라면, 오히려 명에서 정말 도독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겠죠.
다른 물건들은 진린 등 명나라 장수들이 조문하면서 선물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저 도독인과 도독을 받았다는 것의 물증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걸 수백년 동안 써 온 거구요.
이쯤 되면 도독인이 처음 나오는 신도비명이 명이 망한 후인 (남명이야 있었지만) 1650년에 나온 것을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겠죠.
이제 막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됐으니 앞으로도 결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만, 참 충격적인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 진린의 태도에 대한 반박되는 부분도 있구요. 행록이나 위의 시에 맞춰본다면 진린이 이순신에게 정말 예의를 차린 것 같지만, 그것도 과장으로 볼 수 있거든요. 행록을 지은 이분이 현장에 있었다지만 과장은 가능하고, 저 위의 시들은
1934년에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것으로 출처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과 진린이 지은 게 맞겠지' 하는 것인 겁니다. 한편 실록 등을 보면 진린이 이순신의 공격을 방해한 것을 볼 수 있구요. 진린이 이순신을 잘 대해주고 나름대로 열심히 싸운 것이긴 하지만, 상관 대접을 해줬다는 건 과장이라는 거죠.
자...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팔사품, 어떤 결론이 나게 될까요?
일단 더 긴장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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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이제 끝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