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습니다. -_-; 조선이랑 일본이랑 하루 차이가 맞는데, 일본력이 1일이면 조선력은 2일 하는 입니다. 정반대로 다뤄 버렸
네요. 다행히 뒤바꿔야 될 오류는 없네요. 휴...; 명량해전 같은 경우는 15일설, 17일설 다 있는 모양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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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요약
"날이 저물어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으니
지눌국사 조계종이 와서 왜적의 형편을 말하고, 또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꺼린다고 했다." -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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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후, 수군은 해류와 바람을 타고 당사도까지 갑니다. 이후 21일 고군산도에 도착할 때까지 북상을 계속하죠. 수군은 재정비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적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말이죠. 육지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적들이 있거나 초토화시켜놓고 갔으니까요. 가는곳마다 따라다니는 수백여척의 피난선들도 책임져야 했죠.
+) 이 때 고군산도에 전라도 순찰사 황신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온다는 얘길 듣고 배 타고 도망갔다 합니다 (...)
고군산도에서 간단히나마 재정비를 하고 승첩장계까지 쓰던 24일, 그의 몸에도 한계가 온 듯 합니다. 이후 3일동안 병에 시달렸죠. 그 후에도 몸이 편하진 않았겠지만 일은 계속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그의 집은 아산, 일본군의 공격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병조에서 공문이 왔는데, 그 편으로 아산의 고향집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걱정하면서 아들 이회를 보내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보게 했죠.
가족의 생사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 편지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상황, 그럼에도 일은 해야 했습니다.
10월 3일, 수군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겨울을 보낼 곳이 필요했습니다. 안전한 곳이 필요했지만 적에게 너무 멀어서도 안 됐죠. 정찰을 지속적으로 보내서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수군이 머물만한 섬을 찾게 합니다. 일단 나쁘지 않은 소식이 들어왔죠.
"소문에 호남 안팎에 적의 자취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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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후퇴를 했습니다만 적을 놔두고 멀리 갈 순 없었습니다. 바다를 지킬 건 그들밖에 없었으니까요. 특히 고군산도 이북으로는 가지 않았고, 가면 안 됐죠. 그 바로 위가 군산이었고, 금강의 입구였습니다. 이 위로 올라가면 적 수군이 충청도의 육군과 합류할 수 있게 되죠.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요.
명량해전으로 일본군이 총퇴각을 했다... 이러면 정말 시원시원하지만 이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게 사실입니다. -_-a
이에 대한 반론으로 '원래 계획이 거기까지였고 전략적 목표를 다 이뤄서 후퇴한거다'는 것이 있습니다. 근거는 있죠. '전라도는 빠짐없이 공략하고 충청도, 경기도는 가급적 공략해라'는 히데요시의 명령문(주인장)이죠. 이걸 그대로 해석, 전라도를 초토화시켰으니 전략적 목표 달성, 추워지기 전에 '계획대로' 후퇴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근거가 되는 게 실록에 나옵니다. 포로가 된 복전감개(후쿠다 간스케)의 증언이죠. 가토 기요마사 밑에서 100명 정도를 지휘했다고 하고, 진격 및 작전에 대해서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이죠.
"당초에 행장과 청정의 뜻은 세 길로 나누어 직접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 등의 소굴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 길밖에 안 되는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선 더 정보를 캐며 끌어들이려 했고, 그도 자기 능력 좋으니 써달라고 했습니다만 뭐가 안 맞았는지 처형됩니다. 아무튼 그 이전에 잡은 포로 역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얘는 한 술 더 떠서 10월 2일까지 도착해서 20일 안에 배 타고 일본에 오라고 했답니다. 오죽 황당했는지 심문하던 명군도 이 말을 의심했다 하죠.
이거랑 좀 다르게 주장하는 것도 있죠. 서울 공격 포기는 맞는데 그게 명량해전이 아니라 명과 붙은 직산전투 때문이라는 거요. 이 역시 근거가 있습니다. '조선물어'에서는 9월 9일 직산에서 회의가 열렸고, 오타 가즈요시가 서울 공격 반대를 주장해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거 지은이가 오타 가즈요시 부하입니다 (...)) 이 오타 가즈요시를 따라다니던 종군승 케이넨은 14일 퇴각이 결정됐다면서 좋아하고 있구요. 그리고 '고려일기'에서는 16일, 조선력 17일에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진지에서의 회의를 다루고 있죠. '정읍회의'입니다. 회의 결과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했고, 즉 이 때 일본군의 총퇴각이 결정됐고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주장들이 그냥 일본이 자위질 하려고 나온 건 아닙니다. 다들 근거가 있죠.
임진년의 겨울은 일본군에게 충분히 혹독했습니다. 항복한 조선인들은 일부고, 대부분은 도망가거나 싸웠습니다. 육로로 보급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컸고, 그나마도 게릴라에 시달렸죠. 그리고 명의 참전은 큰 위협이 됐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백만대군이야 허세였겟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충분히 강했고 전쟁이 지속되면 또 얼마나 더 많이 들어올 지 몰랐습니다. 최소한 명이 조선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계속 확인할 수 있었죠.
이런 상황이 어느덧 6년째, 일본군의 전의가 높을수가 없었습니다. 히데요시의 망상을 이루기는커녕 조선을 지배하는 것도 불가능이라는 게 드러났으니까요. 고니시는 히데요시까지 낚으면서 강화를 추진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자들이라고 적극적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토 기요마사 정도? 기요마사야 뭐 원래 히데요시 키드였으니까요. 솔직히 고니시가 심심하면 기요마사 때문이라고 해서 그렇지 진짜 기요마사가 다른 자들보다 적극적이었을지도 의문이긴 합니다.
그 히데요시부터가 전라도를 집중공격하고 충청, 경기도는 가능하면 공격하라고 꽤나 큰 재량권을 줬습니다. 여기다 한양에서 5~6일 일정으로 대규모 명군이 접근할 경우 보고하라고 했죠. 자기가 직접 도해하겠다면서요.
때는 9월 중순, 곧 겨울이었습니다. (음력이니까요) 한양은 코 앞이었지만, 겨울도 코 앞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군과 한 차례 교전을 치룬 것이죠. 직산 전투는 그 성과가 결코 크다 할 수 없지만 중갑기병의 돌격에 일본군이 놀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건 명이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죠.
명량해전 역시 이런 상황에 맞춰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나마 임진년보다는 신중하게 달려오긴 했지만 보급 문제는 여전했습니다. 임진년 때는 관아에 쌓인 곡식들을 노획할 수 있었지만 이 땐 아니었죠. 이원익과 권율을 중심으로 조선군은 청야작전을 계속 펴고 있었거든요. 약탈로 충당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죠.
중요한 건 안정된 보급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해운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육군은 명군과도 한 판 붙고 서울 코 앞까지 가 있다가 주춤하나 상황인데 수군은 이제 진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싸우니 마니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거죠.
명량 해전에 투입된 133척 외에 수백척이 더 있었는데도 참전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들이 수송선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들의 목표가 13척밖에 안 되는 조선 수군 격멸이었다면 칠천량에서처럼 참전해도 왰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수백척의 수송선을 꽁무니에 단 채로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가 패배합니다. 그러고도 조선 수군이 후퇴하자 서해로 진입했죠.
+) 사실 이걸 보면 칠천량 해전의 천 척도 허수가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수는 그냥 허세고 실제 조선수군을 공격한 건 소수라는 거죠.
이 수백척이 전라도 서해안을 공격하는 용도였냐 하기엔... 이미 육지에서 털린 상태였고, 추가로 털려고 시마즈, 쵸소카베군 등이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뭐 전라도에 섬이 하도 많긴 합니다만 그 섬들을 털기에도 너무 많은 수죠.
간양록을 지은 강항은 23일에, 해상록을 지은 정희득은 27일에 영광 근처의 바다에서 사로잡힙니다. 일본군은 여기저기 병력을 풀어 정찰을 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갔죠. 그들의 본대는 무안에 있었구요. 이는 결국 적이 서해에 진출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하지만 반대로 겨우 거기까지밖에 가지 못 했다는 것도 말해주죠. 적들은 포로에게 조선 수군의 위치를 물어본 모양입니다. (강항은 태안에 있다느니 명군과 합류했다느니 하며 뻥을 많이 쳤습니다)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적들은 그 정도까지만 할 뿐, 다시 조선 수군에 도전하지 못 합니다.
수백척의 배로 서해에 진입했지만, 무안하게도 무안 정도까지밖에 진출하지 못 한 거죠. 이걸로는 주변의 섬들이나 영산강을 이용하는 것 정도밖에 하지 못 합니다. 그마저도 오래 있지 않았죠.
10월 3일부터 조선 수군이 다시 남하했고, 적들을 만나질 못 합니다. 이러면서 9일에 우수영으로 귀환, 적들이 있다는 해남에 정찰을 보내죠. 척후장 조계종은 11일에 돌아와 상황을 보고하면서 '
적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꺼린다.'고 보고합니다. 그에게 딸려줄 병력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이 정도면 적들이 그냥 수군을 보면 무서워서 도망간 겁니다.
그 때 전라도 서남해에 배치돼 있던 건 적의 수군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전라북도에서 추가로 남하해서 나주, 강진, 해남 등으로 배치됐죠. 하지만 이들 모두 동쪽으로 계속 옮겨가더니 아예 경상도로 가 버립니다. 원래 계획이 그냥 전라도에 점만 찍는 거였다고 하기엔 시마즈군이 백성들을 다시 불러모으려 했던 포고문이 남아 있고, 정읍회의에서 나온 결정부터가 시마즈군이 전라남도로 남하해서 성을 쌓고 주둔하는 거였습니다.
이들이 조선 수군이 남하하고 동진하는 족족 도망쳤다는 것이죠. 바다에 있는 게 아니라 육지에 있던 적들이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신중한 이순신이 정찰보낸 배들이 4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적들이 멀리 도망쳐서 쫓아가느라 늦겠지'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적들이 명량 해전으로 인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충청도의 적들은 직산 전투 이후부터는 진군이 둔화됐고, 15일 정도로 가면 퇴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명군과의 대치와 겨울이 다가오는 압박이 그 이유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군이 10일부터 충주로 이동하고 거기에 눌러앉아 있었던 것이죠. 단지 퇴각하려는 거였다면 청주에서 경상도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청주 쪽의 적들이 후퇴하자 명군을 유인하려는 계략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김경진님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죠)
어찌됐든 이들은 후퇴합니다. 여기에 명량해전의 역할이 얼마나 됐을지는 추측의 영역입니다. 사실 해전의 결과가 초스피드로 전달되고 듣자마자 총퇴각을 결정해야 얘기가 되거든요. 이걸 생각하면 명량해전의 영향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 가능성도 큽니다. 반면 보급이 그 정도로 중요했다는 것과 임진년의 조선 수군의 활약을 생각하면 일본 수군이 막혔다는 얘기를 듣고 결정을 한 게 그렇게 큰 억측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후퇴 후 일본군의 배치에는 확실히 큰 영향을 미쳤을 거구요. 일본의 연구들에서 이 둘의 연관을 부정하거나 아예 다루지 않더라도 일본군의 서진이 막혔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그정도까지 가면 걍 인터넷 혐한이죠) 적의 목표가 한양이 아니었더라도, 총퇴각을 했든 안 했든간에 서해로 못 간 건 큰 문제였습니다. 한강까진 아니더라도 아산만, 아니면 금강까지만 적 수군이 갔더라도 정유재란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테니까요.
+) 위에서 다뤘던 얘기 중 히데요시의 명령 때문이었다는 것, 이게 정말이라면 서울 공략에 대한 회의가 열렸을 리가 없습니다. 케이넨이 한양 간다고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구요. 그런 히데요시의 명령부터가 안 남아 있고, 명령문에서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식으로 썼지만 여기 담긴 속뜻이 하지 말라는 거겠습니까 하라는 거겠습니까. 부하들에게 그 정도로 말해둔 거겠죠.
이 해전의 의의를 누구보다도 크게 받아들인 이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명군이었죠. 적들의 퇴각이 확인된 후 선조는 명 장수들을 찾아가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양호 등은 만나자마자 이순신 칭찬을 했죠. 자기들의 승리를 자랑해도 뭐라 할 게 없는 상황인데 말이죠. 물론 선조는 그럴때마다 겸손하게 작은 승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걸 잊지 않습니다. 양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줍니다. '직접 걸어주고 싶으나 할 수 없다'면서요. 당시 중국에서는 축하할 때 이렇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 때 안위는 통정대부를 받아 정 3품 당상관으로 폭풍승진합니다. 인생 한 방이긴 한 모양입니다. 나머지도 크고 작게 벼슬이 올라간 모양이구요. 하지만 이순신에게 온 건 은자 20냥이었습니다. 네 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돈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명나라 장수들은 이순신을 정말 우대했습니다. 다음 해 4월 26일에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명나라 장수들이 단체로 온갖 선물을 이순신에게 보내주죠. 단지 이순신이 명장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칠천량해전으로 수군이 무너지자 명나라에서도 급히 수군을 파견했고, 10월 말 즈음엔 선봉이 강화도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명나라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죠. (물론 당시 일본 수군과 왜구들은 많이 달랐습니다만 그걸 알 리는 없었죠) 조선의 뱃길을 일본에 빼앗기면 명의 바다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자가 들어갈지 알 수 없고 얼마나 큰 피해가 날 지도 알 수 없죠.
명량해전은 조선만 살린 게 아니라 명의 그런 큰 걱정도 덜어줬습니다. 이쯤됏으니 선조가 이순신을 함부로 할 수 없게는 도와줬을 겁니다. 뭐 그렇다고 전투 자체에서 딱히 도움이 된다거나 한 건 없겠습니다만. 이후 계금이 수군을 이끌고 합류했고, 이후 진린도 합류하죠. 그리고 진린은 명나라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말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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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고난은 이것으로도 끝이 아니었으니...
10월 14일, 적들이 물러나면서 조금이나마 안심하고 겨울을 보낼 섬을 찾고 있던 상황, 뜻밖의 비보가 찾아옵니다. 참 뭐가 있는건지 그 날 꿈에서 막내아들 이면을 끌어안는 꿈을 꾸었죠. 겉봉에 '
통곡'이라고 적힌 편지,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었습니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둘째 아들)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짖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 ... 뭐 분위기 잠깐 깨자면 이렇게 써내려가면서도 일기에 충실하게 마지막에 밤 늦게 비가 내렸다는 걸 덧붙입니다
고뇌하는 이순신,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멀리 갈 거 없습니다. 그냥 난중일기만 보면 됩니다. 무인으로서 집에서 쉴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이순신에게도 막내아들은 정말 소중했나 봅니다. 그 아꼈던 셋째 아들이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분탕질하는 적들과 맞서다 죽었다 합니다. 어머니에 이어 아끼던 막내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때 그런 것처럼, 그에겐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수군에겐 안전한 곳이 필요했습니다. 이 조건이 좀 까다로웠죠. 주변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으면서도 방어엔 유리해야 했고, 수군과 피난민들을 먹여살릴 정도는 돼야 했는데 그렇다고 너무 크면 방어하기 힘들었죠. 이런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명량해전의 승리로 돌아온 수군 장수들과 병사들을 받아들이고 벌하고, 일본군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해서 처벌하고, 물자를 모으고, 적이 어디 있는가 정찰하고, 적이 오면 싸우게 병력을 보내고, 그 모든 걸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마음대로 울지도 못 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장수들이 문안왔지만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 후에도 새벽에 아무도 없을 때나 울었던 모양입니다. 그 자신도 마음껏 울지 못 한다고 한 걸 보면요. 결국 19일에 코피가 납니다.
이순신의 조카이자 이 때 종군했던 이분이 쓴 '행록'에는 고하도에 있을 때 꿈에 이면이 나와서 '나 죽인 놈이 거기 있다'면서 죽여달라고 했다는 게 나옵니다. 이순신은 '살아있을 때 장사였으면서 죽여서는 못 죽이냐"고 답했다고 합니다만 (...);;; 어쨌든 꿈에서 깨서 포로들을 심문해 보니 정말 이면을 죽인 놈이 나왔고, 참형에 처했다고 하죠. 이분이 그 때 이순신과 같이 있었던 거 생각하면 아예 거짓은 아닐 것 같은데... 정말 꿈이 신통했던 건지, 이분이 지어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아무나 죽여놓고 복수했다고 자위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충무공에겐 어울리지 않네요.
자, 그런 가운데서도 일은 다 했습니다. 끊임없이 정찰을 보내고, 물자를 구하고, 죄 지은 놈들을 처벌하고, 겨울을 보낼 곳을 찾았습니다. 강막지 등 염전을 만드는 자들의 협조를 통해 소금을 구했고 (임진년에 그랬듯 이걸로 돈을 벌었고) 주변의 사족(양반)들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얻으려했습니다.
머리는 아팠겟지만, 이 일들 자체가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그 이전과는 상황이 달랐으니까요. 명량해전 때 조선 수군의 후방에 대기하던 백여척의 피난선들 역시 이순신과 함께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그리고 명량해전 전부터 노량해전까지 물자를 지원하고 의병으로 참전한 양반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죠. 그 강항도 이순신과 함께 싸우려다 붙잡혔는데요 뭐.
한산도에 있었을 때보다 나았던 몇 안 되는 점이었을 겁니다. 그 때는 수군에 가기 싫어서 거부했지만, 이 때는 수군과 함께 있는 게 유일한 살 길이라는 걸 모두 알았으니까요. 이순신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능력, 칠천량에서 도망친 장수들과 부하들이 뒤늦게 합류한 것도 큰 이유겠지만 이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는 큰 이유였을 겁니다.
뭐 이것들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이순신의 건강을 갉아먹는 것 역시 분명했겠지만요. 식소사번食少事煩, 그 제갈량이 일은 많이 하면서도 밥은 적게 먹는다고 해서 나온 고사입니다. 사마의의 예측대로 제갈량은 얼마 못 갔죠. 이순신도 이 때 이랬습니다. 고기를 안 먹었죠. 상중이었으니까요. 어머니의 상, 자식의 상...
이 소식이 선조한테까지 가서 12월 5일엔 선조가 직접 선전관을 보내 고기를 내리면서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이순신은 그 명령에 따르죠.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면서요.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펴면서 나온 난중일기에선 선조가 고기 내려준 거에 감동먹었다고 합니다만, 원본에는 그저 비통했다고만 나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골수 유학자였습니다.
+) 김경진님의 임진왜란에선 이걸 충성서약으로 다뤘지만 그건 좀 지나친 것 같구요
10월 29일, 마침내 적당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목포 앞의 보화도, 고하도입니다. 겨울의 서북풍을 막을만하고, 배를 감추기에도 적합했으며, 상륙해 보니 지형이 좋았다 합니다.
조선의 운명이 롤러코스터를 타던 1597년 정유년이 끝났습니다. 그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조선 수군은 목포 앞의 작은 섬에 들어갔구요. 여기서 조선 수군은 재건됩니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쓰다보면 솔직히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정말 영웅사관에 어울려도 너무 잘 어울리는 위인이니까요. 많이 공감하실 거고, 다음 편을 보면 더 공감하게 되실 겁니다. -_-; 아마 마지막 글에도 이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겠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걸 또 어찌하겠습니까. 명량 해전을 통해 그는 정말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맞먹는, 혹은 그걸 뛰어넘는,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을 겨울 동안 해냅니다. 조선 수군의 재건 말이죠.
이제 전쟁은 1년 남았습니다. 차라리 빨리 끝나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직 1년이나 남아서 힘든 일을 계속 안겨줬죠.
그리고 그 끝에는 큰 승리와,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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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정말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__);
이번 편이 쓰기 특히 힘들긴 했지만; 앞으로도 더 빨리 쓸 거라 장담할 수가 없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천천히,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