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램 가고 말램 마라." 그리고 <해적>
경기도 안성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동네에 딱 하나 있는 분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대여섯살 즈음의 나는 마을의 유일한 불알친구인 원준이네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시노비' 등의 비디오게임이 가능한 최신 팩게임기와 책장 위로 '김구, 강감찬, 장제스' 등의 이름이 빼곡한 위인 전기 시리즈가 구비되어있던 그녀석의 집은, 그 당시 어린 내겐 최고의 놀이터이자 최상의 휴게공간이었던 것. 어쨌든 그렇게 친구네 집에서 놀다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로 툭하면 티격태격 싸우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왜 싸웠는지' 그 이유는 기억이 나질 않고 '싸운 후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만 기억에 남아있다.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자잘하고 사소한 문제들이 점차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엔 '삔트가 상해버린 내가' 더 이상 뭐 어떻게 맞받아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던지던 최후의 통첩이자 초강수는 딱 하나였으니, "나 집에 갈래!!" 라면서 거침없는 기세로 휘적휘적 방문을 열고 나와 대청마루 밑 댓돌 위에 놓인 신발을 구겨 신고는 친구집을 나서는 일. 하지만 그렇게 아쉬운 거 없다는 듯 쿨하게(?) 집을 나서면서도 딴에는 내심 친구가 무슨 말을 걸어줄까 싶어,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는 척 신발을 천천히 찾아 신고는, 강경한 말투와는 사뭇 다른 느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곤 했다. 암튼 그렇게 자존심의 날을 세우며 친구 집 대문을 나설 때마다 대청마루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얼굴만 빼꼼 내민 친구가 내 뒤통수에 대고 날리던 시크한 한마디가 있었으니,
["갈램 가고 말램 마라!"]
이 말인즉슨 풀이하자면, '널 붙잡고 싶지만 내입으로 가지말란 말은 곧 죽어도 못하겠으니, 그러니까 니가 알아서 다시 돌아와.'라는 뜻. 한마디로 "가지마."라는 뜻이 담긴 최후의 통첩이자 그녀석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최대치의 표현이었던 것. 하지만 이런 애매모호하고 쿨내 나는 말에 자존심을 굽히며 회군할 내가 아니었다. "가지 말고 그냥 나랑 놀자."라는 말을 들어도 고민할 판에, 갈려면 가고 말려면 말라니? 나는 이런 친구의 퉁명스러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더 쿨내 풀풀 풍기는 말투로 "그래, 그럼 나 간다!" 라는 작별인사를 던지며 그렇게 휘적휘적 대문 밖을 나섰다. 하지만 대문 안에서의 거침없던 기세도 잠시, 대문 밖을 나서면 금새 허전하고 축 처진 어깨로 신발 뒷굽을 질질 끌며 골목길을 쓸 듯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절로 실소가 머금어지는 우습기 그지없는 장면이지만, 이게 그 시절 그 녀석과 내가 자못 심각하게 종종 연출하던 '날카로운 작별인사의 추억'이다.
그리고 서른이 넘은 2014년의 어느 날, 킬링타임용 팝콘무비인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을 관람하던 도중 이런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대사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극중에서 우연치 않은 만남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키워오던 산적 장사정(김남길)과 해적 여월(손예진)이 중간에서 헤어지는 씬. 자신의 부하들을 구하고 세력을 되찾기 위해 힘을 합친 장사정과 여월의 합동작전이 성공한 후 배를 나눠 타고(정확히는 여월의 커다란 배에서 허접하고 작은 쪽배로 갈아타고) 각자의 배 위에서 서로를 마주본 채로 헤어짐의 인사를 고하던 순간에, 산적두목 장사정은 짐짓 심각하고 멋진 표정으로 한껏 폼을 잡으며 목소리를 깐 채 여월에게 이렇게 말한다.
["있어달라 애원하면 머물 것이고, 따라온다 사정하면 거둬주겠다."]
이 말이, 킬링타임용 코믹영화인 <해적>을 보고 나서도 내내 마음에 남았다. 아마 장사정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게다.
"솔직히 널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날 붙잡아줘."
다시는 만나게 될 수 없을지도 모를 안타까운 헤어짐의 순간에서도, 진심이 담긴 사랑 고백을 저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는 장사정이란 남자의 한계, 혹은 그 남자의 그 시시껄렁하고 안쓰러운 자존심. 하지만 나도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마음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결국엔 진짜 얘기는 한글자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그 안쓰러운 답답함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별 거 아닌 이 장면에서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짠해지고 말았다. '왜 저렇게 밖에 말을 못하나', '자존심을 죽이고 조금 더 솔직해지면 안되나'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기실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런 모습이 '가장 장사정다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장사정은 평생 그렇게 살아온 남자였으니까. 아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그 때 그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을 홀로 걸으며 내내 후회를 하곤 했다. '그냥 자존심 죽이고 친구네 집으로 다시 들어갈 걸..', '아니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걸음마다 몇 번씩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고 그날은 아쉬움과 후회만을 가득 안은 채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만약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만약 친구네 집에서 싸우고 툭하면 귀가하던 그 시절의 나, 여섯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간다면 "갈램 가고 말램 마라!"라는 친구의 무뚝뚝한 일갈(?)에 나는 어떻게 응수할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말하는 꼴 하고는-_-+"
이렇게 퉁명스럽게 응수하고는 구겨 신었던 신발을 못이긴 척 댓돌 위로 내팽개치듯 벗어던지고 다시 대청마루로 올라서고 싶다. 나는 그러고 싶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오래전 그 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하게 "니 마음이 정 그렇다면 헤어지자. 알겠으니 잘 지내라."라며 차갑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던 그녀에게도, 기회가 된다면 "그때 내 마음은 사실 그런 게 아니었다."고,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킬 새라 그렇게 냉정한 척 말했던 건 정말 미안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