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런던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기 전 난생 처음으로 하게 되는 외국 생활에 저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나 상상하던 런던이라는 도시를 제가 직접 가게 된다는 설렘이 컸었습니다.
출발하기 전 런던과 관련한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런던의 모습을 찍은 여러 사진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제 눈을 잡아끌었던 것은 바로 30 St Mary Axe라고 불리는, 41층 180미터짜리 유리 건물이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는 The Gherkin 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건물이지요(오이절임에 쓰이는 오이를 Gherkin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건물 모양이 그 오이절임에 쓰이는 오이와 비슷하다고 불은 별명이라고 하네요).
대도시답지 않게 고층 빌딩이 별로 없고 빅토리아 시대의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런던의 스카이라인 가운데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이 건물을 사진으로 처음 봤을 때 “와, 이게 뭐야?” 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 여행을 잘못해서 뭔가 자신의 시대와 맞지 않은 곳에 떨어져버린 건물인 냥 주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 빌딩...탄환 같기도 하고 거대한 새가 낳은 길쭉한 알 같기도 한 독특한 외관과 푸른빛이 도는 색깔...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건알못이었지만 저의 막눈으로 보기에도 이 건물은 범상치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런던에 가게 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건물을 꼭 찾아가서 두 눈으로 직접 보리라 다짐했었지요.
하지만 막상 런던에 도착하고 나서는 적응하느라 이것저것 정신도 없었고 빅밴, 버킹엄 궁전, 영국박물관, 트라팔가 광장, 세인트 폴 성당과 같은 런던을 가게 되면 누구나 다 방문한다는 유명한 곳들을 다니다 보니 막상 30 St Mary Axe를 가 볼 기회가 좀처럼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크리스마스 날 드디어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던 30 St Mary Axe를 가보자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크리스마스 즈음부터 1월 초까지 학교, 도서관, 상점들이 문을 다 닫고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도시가 매우 한적해 지는데 제가 30 St Mary Axe로 출발하는 그날 역시 거리에 차도 거의 없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아서 도시 전체가 마치 윌 스미스가 주연했던 영화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살던 Bloomsbury 지역과 30 St Mary Axe가 있던 시티 지역은 걸어서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크리스마스에 조용한 거리를 나 홀로 걷다 보니 외롭기도 하고 가족 생각도 나고 공부를 잘 마무리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여러 생각들이 났었던 것 같습니다.
텅 빈 런던의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목표했던 30 St Mary Axe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니 괜히 가슴이 뛰고 점점 더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사진으로만 보던 저 건물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건물에 도착하고 보니 저처럼 이 건물을 찾아 온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출발한 터라 30 St Mary Axe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여러 장 사진을 찍었지요. 역시 사진에서 보던 그 느낌 그대로 멋진 건물이었습니다. 건축의 힘이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요? 우리나라도 랜드 마크가 될 거라면서 여러 고층 건물들을 짓기는 하지만 그저 높기만 할 뿐 아직까지는 이 빌딩과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 해졌고 저는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걸었지요. 돌아오는 길 역시 아무도 없는 런던의 고즈넉함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평소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거리였는데 그날은 정말 조용한, 마치 잠이 든 것 같은 런던의 분위기를 맛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세한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가면서 오면서 혼자 많은 생각을 했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30 St Mary Axe 사진을 보게 되면 2009년 12월 25일 조용했던 런던에서의 약 5시간 정도의 도보 산책이 기억나곤 합니다. 그 적막함과 고즈넉함, 외로움 같은 느낌들이 다시 살아나서 저를 감싸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혹시 기회가 돼서 다시 한 번 런던을 가게 된다면 그때에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그땐 외롭지 않게 양 옆에 마누라와 딸내미를 끼고 즐겁게 웃으면서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