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를 상대로 영국-프랑스- 외 기타 몇몇 떨거지(샤르데냐나 몬테네그로 정도?) 싸운 전쟁인
크림 전쟁. 그 전투 중 하나인 바라클라바 전투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전투배경은 영프, 오스만 연합군의 주요 목표 세바스토폴 항구 때문입니다.
크림반도에 상륙한 영프 연합군은 크림반도에 있는 중요한 항구 세바스토폴(지금도 중요한!)을 포위하기 위한 군사적 움직임을
가져 갑니다. 그리고 바라클라바는 이 군사적 움직임에 있어 중요한 지점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토폴 위치- 올 포풍같던 러시아 정세에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죠.>
이 세바스토폴을 포위하기 위해서는 바라클라바라는 마을을 지나쳐 가야 했습니다.
<현재의 바라클라바>
바라클라바는 생각보다 오래된 마을로써 고대 그리스 식민시 중 하나였습니다. 중세때는 동로마 제국의 도시로, 중세 후반에는
제노바의 상업 거점으로 여기를 통해 중세 러시아의 수출품인 노예 등을 팔던 항구였죠. 하나지만 오스만 통치시기 폭망해서
다시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 러시아의 손에 세바스토폴이 발달하자 뭐 근교에 보잘 것 없는 어촌으로 전락했는데....
사실 세바스토폴로 가는 주요 도로가 통과하는 험준한 두개 계곡을 통해 세바스토폴을 방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아니었다면 그냥 뭐
고대 그리스나 중세 역사에 관심 있지 않으면 걍 듣보의 마을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세바스토폴로 가는데 필요한 주요 도로가 이 마을 근처에서 험한 계곡을 지나는 바람에 러시아 군은 일단 세바스토폴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곳 근처 두 계속에 진을 칩니다.
<세바스토폴이 세바스토폴 만 남쪽에 위치한 바람에 뺑 둘러서 행군한 연합군,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도시가 아니라
이 도시 근처의 두 계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군은 전투에서도 정작 마을은 지키지도 않았죠.>
정작 바라클라바 마을은 버림 받은 상태에서 무혈로 마을을 점령한 연합군은 마을 근처 코샥 만에 대규모 함대를 배치하여
계곡에 위치한 러시아군에 대한 포격을 날렸고, 이곳에 진을 쳐 두 계곡 공략에 나서게 됩니다. 이게 1854년 10월에 일입니다.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딱히 이 두 계곡을 지킬 의향은 없었고 적당히 연합군을 막다가 세바스토폴로 후퇴할 생각이었습니다.
어자피 바다 근처라 제해권을 잃은 러시아 군 입장에서 해군 포격의 위력을 몸으로 막아 가며 싸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덕에 전투 자체는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지 않고 양측 각각 6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끝났습니다. 크림 전쟁 자체가 100만의
사상자를 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전투가 아니었던 거죠. 그냥 크림전쟁의 하이라이트 세바스토폴 공성전의 전초전 성격의 야전
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럼 왜 이전투가 유명하냐? 딱 이거 하나 때문입니다.
[바라클라바의 경기병 돌격]
이 사건을 단순히 스타 크래프트 적으로 설명하면 이겁니다.
[언덕 공성전차가 배치된 두 언덕 사이에 난 길로 온니 드라군 러쉬]- 실제 전투에 영국 기병 로얄 드라군 대대 참가
[이걸 인간이 뻔히 자살 공격인 걸 알면서 군인이라는 이유로 이 명령을 수행했다는 거....]
<당시 전투 타임 라인 동쪽이 러시아군 서쪽이 영국군, 계곡의 포대는 전원 러시아 포대>
이 멍청한 작전 계획을 1차적 책임은 이인간 래글런 남작 피츠로이 섬머셋 공에게 있습니다.
오스만 군의 졸전으로 러시아군은 다수의 포를 노획했고 이를 통해 바라클라바의 연합군을 향해 역습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영국 육군 중기병대 지휘관인 스칼렛의 기병들이 이런 러시아군의 선봉 기병대를 쓸어 버리면서 다시 러시아군에게 노획된 포대를
되찾을 찬스가 생긴 거죠.
이런 찬스에 정신줄을 놓아 버린 래글런 남작은 부하인 제1기병사단장 루칸 백작에게 도저히 알아 먹을 수 없는 명령서를 보냅니다.
그나마 해독한 내용은 Causeway Height(위 타임 라인 아랫쪽에 위치한 고지 이름)로 기병대를 진격 시켜 탈환할 기회를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보병을 지원해서 탈환하라는 것이었는데, 보병은 다른 전선을 만들고 기병은 Causeway Height로 진격하라는 명령으로
오독한 건 덤이었습니다.
전선의 루칸 백작은 이 명령서를 다 읽은 후 기가 찼습니다. 도대체 뭘 공격하라는 건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명령서를 보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는 명령을 실행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연락장교인 루이스 놀란 대위는 이런 루칸의 행동에 열받아 원래 공격 목표인 Causeway Height가 아닌 계곡 가운데
돈 코자크가 진치고 있는 러시아군 방어선이 공격 대상이라고 가르켜 버린 것입니다.
그곳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군 포대가 진치고 있는 고지 사이의 외길로쭉 들어 가야 했습니다. 돈 코자크 다수의 포대로
방어선을 방어하고 있었구요.
결국 루칸 백작은 놀란에 굴복하여 카디건 백작이 지휘하는 경기병대에 돈 코자크의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합니다.
이 명령서를 받아본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데넬은 자살 공격인지 뻔히 알았고 부하들도 만류했지만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그의 부하들 역시 뻔히 이게 자살 공격인 줄 알면서 이 공격을 실행하게 됩니다.
이 장엄하고 뭔가 바보같은 자살 공격을 본 프랑스 장군은
[장관이군. 하지만 이건 전쟁은 아니지]란 평을 내리며
북쪽 언덕의 포대를 제4 엽기병으로 공략하여 일부라도 영국 기병들을 살리는 공을 세웁니다.
결국 제11 드라군 대대 모리스 대위 등 일부는 돈 코자크 진지까지 한번 찍고 총 600명 중 200명 가량을 살려 올 수 있었다는게
지금까지의 알려진 내용입니다. 참고로 놀란 대위는 뒤늦게 자신이 잘못 위치를 찍었다는 걸 알고 깊히 말리러 뛰쳐나갔지만
포 맞아 전사....
<지금까지 알려진 일화로 만든 영화... 그러나 진실은...>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돌격을 포함하여 전투 총 사상자는 600명입니다. 이는 영국, 오스만, 프랑스군 다 합쳐서 말이죠.
그럼 이전투의 전사자가 400명이면 대부분 여기에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되죠. 결국 이것
역시 사실 언론의 장난 스러운 내용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관련 당사자- 래글란, 루칸, 카디건-에 대해 맹렬히 씹어대었고, 그들이 귀족이기 때문에 이책임에 벗어났다고
단정지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저가의 대중적 신문이 점차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인지라 그냥 자극적이고 많이 팔릴 내용을 소설처럼 만들어내어
대중에 뿌리는 옐로 저널리즘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무식한 작전에 책임자 전원이 구시대의 귀족이라는 것도 평민들에게는 상당히
자극적이고 팔릴 만한 내용인지라 없는 것도 만들어내고 있는 내용을 극화시켜서 팔아 먹어 버린 거죠.
하지만 여기에서 카디건은 사실상 상당히 부당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카디건은 이 말도 안되는 작전을 성공직전까지
이끌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부하들은 돈 코사크 진지까지 이끌었고 실제로 돈코샤크 기병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일부 알려진 거과 다르게 그는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는 군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사내였지만 이 사건 이후 언론의 장난질로
매관매직하는 무능한 귀족군인의 표상처럼 인식되어 버린 거죠.
심지어 후방에서 부하들 죽어 가는 걸 그냥 구경했다는 내용도 있지만 그는 가장 선두에서 돌격을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살아 남아
부하들을 다시 모으고 재편하여 살려 돌아오게 한 것도 카디건 백작의 공이었습니다.
사실 그후 고발에서 그가 무혐의였던 가장 큰 이유는 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가 바라클라바나 다른 크림 전쟁 당시 전투에서
딱히 무책임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 컸습니다. 오히려 유능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실제 이 무모한 전투 결과는 영국 기병대 270명 사상(100명 전사), 러시아 기병대 패주로 끝났습니다. 이러니 고발이 될리가 없죠.
아무튼 진실이야 어떻든 가운데 이 사건 자체가 언론을 통해 영국 전야 흘러 나와 많은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일단 영국 육군에 만연했던 매관매직제가 폐지되어 실적제로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영국군사 귀족들의 무능이 전국에 폭로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후대에 직업 관료제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도 그 영향에 있죠.
그리고 영국의 애국주의 표상처럼 되었는데 못난 위것들의 부당한 명령에도 우리는 명예와 의무를 다했다 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포장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의류에 미친 영향인데 카디건 백작이 입고 있었던 스웨터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옷만 잘입는 한량처럼 다시 카디건 백작이 씹혔다는 건 또 함정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