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라고는 담배 반 갑과 오백 원이 전부였다.' 라는 문장은 부코스키나 까뮈의 소설을 여는 첫 문장으로는 적절할지 몰라도 하루를 여는 문장으로서는 명백하게 부적절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내가 그러하다. 예술은 예술일 때나 아름답지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예술적으로 완벽한 안나 카레니나가 당신이 아는 여자라면 그냥 연을 끊는 게 답인 것처럼 말이다.
후.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술을 조금 많이 마셨고, 길바닥에 누워 자다가 가방을 잃어버린 것뿐이다. 가방 안에는 신분증, 내 명의의 체크카드와 바 틸트 명의의 신용 카드, 창천스포츠센터 회원카드와 동서한방병원 진료카드, 아이폰, 전자담배, 거의 꽉 차 있는 전자담배 액상, 가게 열쇠, 집 열쇠, 그 외의 돈이 되지 않는 잡다한 물건(회기동 단편선의 데뷔앨범 등) 정도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별일 아니다. 옆집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려 아내에게 두드려 맞아 안경이 부서져 안경을 바꿨다는 수준의 평범한 비극일 뿐이다. 안경, 다행히 안경은 내 머리맡에 고이 놓여 있었다. 첫 문장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진 것이라고는 담배 반 갑과 오백 원, 그리고 고이 접어둔 안경이 전부였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조금 덜 예술적이다.
기억 속 가장 가까운 파출소-정확히는 경찰 파견센터-를 찾아 체크카드 분실 신고를 했다. ARS는 친절하게도 마지막으로 쓴 돈이 GS25에서 담배 두 갑을 산 금액이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거 기억할 정신이 있으면 내가 카드를 잃어버려서 분실신고를 하겠니. 물어보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옵션이 그렇다/아니다밖에 없다는 건 좀. '모른다' 항목은 있어도 되잖아. 그리고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경찰 아저씨께 물어보니, 이제 곧 아침 회의 시간이라 여기를 잠시 닫아야 하니 저 앞 공원 화장실을 쓰고, 급한 일은 근처 파출소로 문의하라고 하신다. 경찰 아저씨는 정말로 친절했지만, 공무원의 체계라는 건 아무래도 슬픈 일이렷다.
인근 파출소로 걸어갔다. 아침 회의 중인지, 파출소의 홀에는 경찰들이 집합해 있었다. 아침에는 회의해야 공무원이지. 그런데 파출소는 행정업무보다 대민업무의 중요성이 높은 곳 아닌가. 굳이 정문 바로 앞의 홀에서 각 잡고 길게 회의를 하는 것보다는, 안쪽에서 회의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강도를 당했다거나 분노한 아내에게 구타당하여 생명이 위급한 옆집 아저씨라면 회의와 상관없이 파출소로 쇄도했겠지만. 사소한 일로 아침에 파출소를 방문하는 자에게 정문 너머로 보이는 집합광경은 약간의 거리감을 준다. 방해하기 그러니까 회의 끝나고 신고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자산의 80%를 투자하여 라이터를 사서 담배를 피우고 나니 회의가 끝나 있었다. 핸드폰 분실 신고와 신용카드 분실 신고를 할 시간. 핸드폰 분실 신고 와중에 '상담원과의 연결은 0번을 누르세요' 라는 말이 나와 0번을 눌렀지만 '잘못된 입력입니다'라는 오류 메시지가 떴다. 장난하나. 야구를 못하면 통신망 서비스라도 잘 해야지. 5분 30초를 투자하여 핸드폰 분실신고에 성공하고 틸트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위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틸트는 아버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 중간에 아버지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등록금의 반쯤 되는 연구장학생 선정을 위해 다른 소득이나 직책이 없는 쪽이 유리했기에. 네? 꼴랑 그거 주고 '해당 프로젝트 전업 연구원'하라고요? 웃기시네. 학원 강사로 일하는 친구들을 차치하고라도, 내가 아는 모든 해당 프로젝트 <전업> 연구 장학생은 당연히 다른 프로젝트를 겸업했다. 덕분에 명의는 아버지 앞으로 되어 있고, 가게 신용카드를 운용하는 데 사소한 법적 귀찮음이 자주 발생한다. 졸업 이후 명의를 옮기려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개인사업자 명의를 이전하는 것은 매우 귀찮으며 돈까지 드는 일이라 포기했다. 더 웃기고 씁쓸했던 것은, 석사학위를 받고 몇 년 후에 나는 나의 '숨겨왔던 나의 돈벌이'를 잡다한 문서로 자랑스럽게 증명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연구단의 프로젝트 실적과 졸업생들의 활동현황이 지나치게 좋다. 조작된 것이 아닌가' 라는 감사가 들어왔기에. 나는 '졸업생 사업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업자증명서 한 장 달랑 떼주는 대신 가족관계증명서와 보건증 등의 잡다한 문서를 첨부해야 했다. 하긴 '전업 대학원생들'이 꼴랑 그 장학금을 받고 겨우 졸업해서 취직에 성공한다거나 사업을 한다거나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안 그래?
애초에 술이 문제였다. 어제는 두 개의 술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하나는 신입 바텐더 환영식. 하나는 필요에 의한 술자리. 근처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어떤 외국인이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고 들어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 외국인은 나를 똥 같은 머저리shittiest shabby라고 칭했다 한다. 나는 대충 오해의 이유를 안다. 그가 만취한 채로 내 가게에 들어와서 내 손목을 붙잡고 잠깐 나와보라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나는 충분히 경계한 채로 그를 쫓아낸 기억이 있거든. 경계를 안 할 수가 없다. 10년 전, 알고 지내던 신촌의 노점상이 시비를 거는 미군을 말리다가 칼침을 맞았다(주한미군 신촌 칼부림 난동사건). 굳이 저 사건이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유흥가의 '술에 취한 외국인'들은 자영업자의 공포의 대상이다. 그들은 말이 잘 안 통하며, 필요 이상으로 영혼이 자유롭다. 나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특히나 손목을 잡고 잠깐 나와보라는 자에게는 더욱.
저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가게에 가려 했으나 그의 가게는 닫혀 있었다. 하여 다른 곳에서 맥주를 마셨는데 그게 문제였다. 뉴질랜드인이 운영하는 그곳의 맥주는 지나치게 맛있었다. 간단히 마시고 신입 바텐더 환영식을 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나는 꽤 술을 마셨고, 그 상태로 또 술을 마셨다. 그리고 길바닥에서 자 버렸다. 엄밀히는 편의점 앞 의자에서. 안경을 머리 위에 고이 접어 모셔둔 채. 가방을 어디 던져버린 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옷 안 벗고 잔 게 어디야. 나는 집에서 보통 팬티도 입지 않고 잔다. 내가 옷을 벗고 잤더라면 당신은 나를 내가 쓴 기사가 아닌 남이 쓴 사회면 기사에서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낫지.
당신이 집에서, 혹은 단골 술집에서 모기에 뜯긴 팔뚝을 긁으며 편하게 읽고 있을 이 글은 열쇠집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집 앞 피씨방에서 쓴 글이다. 내 사정을 듣고 만원을 흔쾌하게 빌려주신 연남동 파출소의 경찰 아저씨에게 이 글을 바친다. 또한 며칠 전에 웹서핑을 하다 본, '종양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지만 긍정적으로 유쾌하게 받아들이며, 수술 전에 유쾌한 문신을 새긴 어느 나라의 알 수 없는 젊은이'에게도 감사를 바친다.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집 문을 따러 나가야겠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쯤, 나도 집 안에서 편히 누워 모기에 뜯긴 팔뚝을 긁고 있으면 좋겠다. 물론 가방은 못 찾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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