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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04 20:56:29
Name Tigris
Subject [일반] 일곱 편의 시 (수정됨)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권혁웅 - 시집「마징가 계보학」에서)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바람이 불면』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 보고 걸었다




(이시영 - 시집 「만월」에서)









『세탁기』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는 말은
나,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
나, 죄가 크다는 말
나, 한 세상 잘 놀고 있다
양심은 팬티와 같은 것
가끔 벗어서 세탁기에 빤다
말려서 다시 입는다

한 세상 슬픔을 잊고 웃다 간다는 말은
나, 독하게 살았다는 말
나, 한을 주었다는 말
나, 한 세상 늘 웃고 있다
의무는 런닝셔츠와 같은 것

나의 세탁기에서는
땟물과 함께
눈자위 붉은 그리움이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간다




(나해철 - 「시와 사람」 2004년 겨울호에 수록)









『불면증』


사흘 밤낮을 꼬박 새운 눈으로
밝은 세상에 나가 물상을 보면
생명 가진 것들은 다 죽이고 싶지

꽃밭에 석유 뿌린 뒤 불지르고
쥐틀로 잡은 쥐를
쥐틀째 양동이에 넣어 익사시키고
개미집을 찾아다니며 파헤치던
그런 날들이었네 박해의 기쁨과
자학의 쓰라림으로 빈사상태가 되면
내 살갗을 뚫고 들어오던 주삿바늘

꿈도 없는 잠에 빠지면
48시간 후에나 깨어나지
목이 타고 방광은 터질 듯하여
걸음 옮길 힘도 없는 상태가 되어

그런 날들이었네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선인지 악인지 모르고
자기 긍정 혹은 자아 도취
타인의 호의에 대한 지독한 냉담으로
조물주의 침묵에 대한 광포한 적의로
구원받느니 악마에게 혼을 팔겠다고 다짐하던
그런 결의의 날들이었네 핏발선 눈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네
인류의 삼분지 이가 굶주릴 때
나머지는 과식하거나 비만을 걱정하듯
왜 한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짐이 될까

한 존재를 용서하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용서할 수 없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잠 못 이루던 날들.




이승하 - 시집「폭력과 광기의 나날」에서









『구관조 씻기기』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황인찬 -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서)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황인찬 - 시집「구관조 씻기기」에서)




 









 먼지 쌓인 시집을 꺼낸 김에 몇 편 옮겨봤습니다. 이대로 올리면 규정위반이 될 거 같아, 뻔한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봅니다.




 시 감상은 딱히 낭만적인 일도 아니고 그리 고상한 취미도 아닙니다. 음악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즐기면 그만입니다.

 시를 즐기는 방법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의 재미를 전혀 모르겠다는 분들께 권하고픈 '시 읽는 요령' 정도는 있습니다.

 하나는 소리내어 읽는 겁니다. 시는 본래 노래였습니다. 노래는 소리죠. 음성 자체가 갖는 느낌도 시에서는 중요합니다. 모든 시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행을 악보의 작은악절(4마디)이라 여기면 대략 적절합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시어를 이미지(그림)로 연상하며 읽는 겁니다. '사막'이라면 사막의 풍경을, '구관조'라면 구관조의 모습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됩니다. 만약 '무언가가 살아있다'라는 구절을 읽는다면 자기 나름의 '무언가'와 '살아있음'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가령 저라면 새까만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연상할 듯 싶습니다.) 시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떠올린 이미지는 움직이거나 심화되거나 다른 이미지와 충돌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낳습니다. 거기서 느껴지는 감각을 순순히 따라가면 그걸로 좋습니다. 그 끝에 남는 복잡미묘한 인상이 바로 그 시의 의미입니다. 교과서에 뭐라 씌어 있든, 국어선생이 무슨 소리를 하든 상관없습니다. 백 명이 시를 읽으면 백 가지 의미가 생겨나는 게 정상입니다. 학교 국어 시간에 '이 시의 주제' 어쩌고 하며 필기하라 가르치는 것은 (교육여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인정합니다만) 단적으로 말해 가장 잘못된 방식의 시 읽기입니다. 문학자나 평론가의 해석에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은 것에 불과하며, 그것이 문학적으로는 대단히 유의미하고, 또 읽다보면 공감되는 해석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들의 감상을 나의 감상보다 우선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누구보다도 시인이 바라지 않습니다. 시 쓰는 일을 '말 걸기'에 비유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지요.

 시인에 관한 정보나 해설 등은 각 시에 대한 자기만의 감상을 충분히 즐긴 후 찾아봐도 늦지 않습니다. 아예 안 읽어도 무방합니다. 중요한 건 나의 감상이지 남의 감상이 아닙니다. 설령 해설을 찾아보더라도 '정답이 뭘까'라는 마인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을까'라는 느낌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한편, 글을 잘 쓰고픈 사람에게도 시 읽기는 좋은 취미입니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교수는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 200편만 외우면 (네 전공이 무엇이든 간에)무조건 등단할 수 있다'라고 공언하곤 합니다. 원래 말을 막하는 분이긴 합니다만, 뭐 의도는 납득할 수 있죠. 시에는 논설문이나 기사문과는 다른 언어적 깊이가 있으니까요. 문학적 문장력은 일상적 문장력과 궤가 다릅니다.

 시를 써보는 것도 좋지요. 어렵지 않습니다. 시로 만들고 싶은 인상적인 무언가를 포착하면 그 대상이 가진 이미지를 차근차근 쓰고, 소리내 읽으며 표현을 다듬어나가면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차원적인 표현은 피해야 합니다. 사랑을 '사랑'이라 쓰면 그것은 좋은 시가 아닙니다. 죽고 싶은 심정을 '죽고 싶다'고 표현해서는 시가 안됩니다. 말글이라는 틀은 우리의 정서나 감정보다 작은 틀이기 때문에 깊고 복잡한 감정일수록 1차원적인 표현에 제대로 담기지 않습니다. 허나 그 원칙을 알고도 깨트릴만한 이유를 찾았다면 그때부터는 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현직 문인들은 시에 사진이나 그림을 넣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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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구조
14/07/04 21:08
수정 아이콘
좋습니다
LionBlues
14/07/05 05:31
수정 아이콘
아 이 새벽에 귀한글을 읽었습니다 잘봤습니다
부침개
14/07/06 23:3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시를 인터넷에 올리면 저작권법 위반이 될 수 있는데 이 시들은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14/07/09 08:36
수정 아이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제가 되면 책임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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