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노>에 대한 감상글입니다. 따라서 여기 소개되는 일본 드라마 <진(仁)>과 <추노>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일본 드라마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는 아마도 시청률일 것입니다. 올해 1분기 드라마 가운데 시청률 15%를 넘긴 드라마는 단 둘, 그나마도 20% 시청률을 넘긴 <료마전>은 시청률 보증수표라고 하는 NHK사극입니다.
이런 극심한 침체는 이미 2007년 이후부터 시작되어 작년에 본격화 되었는데요, 그 와중에도 30% 시청률에 육박하며 일요일 밤에 일본인들을 TV앞에 모이게 했던 드라마가 있었지요. 바로 <진(仁)>입니다. (비 NHK 일요일 드라마 시청률로는 경이로운 수치라고 합니다)
<진(仁)>은 외과의사 미나가타 진이라는 현대의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가 살던 에도시대로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데에는 물론 절정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과 원작 스토리의 힘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현재 일본인들의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준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카모토 료마. 그가 살았던 시대는 가난과 불평등으로 인해 일본이라는 사회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었고, 사회는 극심한 무기력에 빠져있던 막부시대 말기입니다. 료마는 이 시대에 비젼을 제시하고 활기를 불어넣은 인물의 상징이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현재 NHK사극 <료마전>을 통해 다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후쿠야마 마사하루라는 인기와 매력을 갖춘 배우가 연기하고 있고, 카가와 테루유키의 집념과 혼을 담은 연기력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진(仁)>만큼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카가와 테루유키는 한국에는 오다기리 죠가 출연한 영화 <유레루>를 통해 그 연기력을 선보인 바 있는 정말 매력적인 배우입니다. 도쿄대 출신의 배우라는 점 때문인지 한국의 이순재씨와 괜히 닮은 꼴 배우로 여겨지기도합니다만, 물론 그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仁)> 속에 등장하는 미나가타 진이라는 외과의사가 현대 일본인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감정이입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닥터 진은 동급생이자 동료의사였던 여자친구가 자신이 집도한 뇌종양 제거 수술 후 뇌사상태에 빠지자 슬럼프를 겪습니다. 의술에 대한 회의와 조롱이 반복되며 피폐해져 가던 어느 날, 닥터 진은 타입슬립을 통해 막부시대 말로 떨어집니다.
바로 거기에서 닥터 진은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동양의학의 한계를 절감하며 서양의술을 받아들이겠다고 스스로 무릎 꿇는 사람들, 심한 사투리에다 기품따윈 없는 하급무사에 불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위로는 장수부터 아래로는 천민까지 설득해내는 사카모토 료마의 열정. 닥터 진을 통해 일본인들은 바로 그 시대를 보며 무릎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기불황, 일본 기술력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던 도요타의 위기,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속에서 일본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지요. ‘어쩌다 이지경이 된 것일까?’하고 말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바로 현재의 그들을 만들어낸 시대인 막부말기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가져다줄 하나의 단서가 된 것입니다.
2.
닥터진이 타입슬립해 간 시대는 막부 말기인 1862년으로 1853년에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이 이루어졌던 때로부터 대략 10년이 지난 때입니다. 사회는 개혁에 대한 저항과 열정이 뒤엉킨 시대였습니다. 이시대의 일본을 한마다로 정의한다면 ‘암살의 시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각 진영은 극심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료마는 바로 그런 시대에 변화를 열망하고 있었던 하급무사 중 한명입니다. 당시 상급무사와 하급무사의 계급적 신분적 격차는 하늘과 땅. 하급무사인 사무라이들은 경제적으로는 극도의 궁핍함을 견뎌내야 했고, 상급무사들의 인격적 모욕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거기에다 하급관리로서 농민과 평민들의 삶을 체감하며 나라가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식자층’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검술을 배워 몸과 마음과 정신력을 갖춘 하급 사무라이들에게 페리 제독과 함께 등장한 신세계는 충분히 피를 끓게 했습니다.
이 변화의 에너지는 처음 암살자의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수많은 열혈 사무라이들은 자객으로 이름을 드러냈고, 상급무사들을 지탱하던 막부체계를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변화는 자연스레 개항과 동일시되기 시작했습니다. 개항과 변화는 하급사무라이들에겐 꿈을 이루어줄 유일한 길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는 단지 분노를 칼끝에 모으지 않았습니다. 닥터진속에 표현된 당시 변화에 대한 열망은 칼끝이 아니라, 입과 머리에 있었지요. 차가운 이성과 상대를 설득시키는 웅변. 칼의 시대는 바로 다음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사카모토 료마에 의해서.
이 드라마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콜레라를 퇴치하기 위해 당시 기술적 한계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닥터 진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꺼이 전통적 방식을 버리고 협력하는 사람들. 페니실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닥터 진은 비로소 자신과 여자친구가 의대생이던 시절의 ‘초심’을 되찾게 됩니다. 실패, 수많은 실패와 거듭된 시련속에서 페니실린을 정제해 가는 과정 그자체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바로 저것이야,우리가 잃어버린 것은...’하고 가슴이 뜨거워질만한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느닷없이 에도시대로 떨어져버린 현대의 외과의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절대반지가 자신의 손에 왜 주어졌는지 충분히 생각하고 난 뒤 결론을 내리고 떠날 수 있을만큼 현실의 시계가 멈추지 않았지만 떠나야 했던 프로도나 왜 자신이 정의로워야 하는지 모르는 채 정의를 실현해야 하고,정의가 무엇인지를 미처 결론 내리기 전에 행동해야 했던 스파이더 맨처럼,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볼드모트와 싸워야 하는 해리포터처럼 현대의 모든 사람들은 매일매일 혼란과 갈등을 겪습니다. 다른 드라마가 그랬듯이 주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삶 그 과정자체가 ‘의문의 유일한 해결’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련의 보편적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이 드라마가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힘이었겠지요.
어찌되었든 드라마는 여기에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드라마가 끝난 시점부터 5년 뒤인 1867년에 에도막부는 끝이 났고, 메이지 천황이 권력의 정점에 섬으로써 유신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 드라마는 바로 그 다가올 메이지 유신은 그저 주어진 역사의 은혜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었음을 잘 표현해냄으로써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현재 일본의 문화 중 아주 많은 부분이 이 시대에 새롭게 들여와 일본화한 것들이고 보면,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은 원령공주가 사는 태고의 숲과 함께 메이지유신시대의 사무라이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그들에게 정체성의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 즉 1862년에 조선에서는 향리들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진주민란(임술 농민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근대로의 길이 시작된 것이지요.
3.
현재 드라마 <추노>가 방영되고 있는데요, 여성작가들의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사극과는 다른 남성적이고 파워풀한 사극이라 그런지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 송지나씨의 <대망>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하던 장혁이 <추노>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습니다만 제게 <추노>를 추천하며 ‘노비반란’얘기라고 하길래, 솔깃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노비들은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한은 ‘반란을 꿈꾸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추노를 10회 이후에 보기 시작해서, 내용에 대해 제가 불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는데요, 양해바랍니다)
조선시대의 반란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 그러니까 성종시대를 정점으로 조선시대의 건국이 일단락되면서 권력이 안정화되자 당연하게도 그 권력에 압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바로 ‘천민들’인 ‘향소부곡민’들입니다.
그들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심각한 차별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러한 향소부곡은 특수부락, 그러니까 지금으로 보면 ‘국영 산업단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농공상’ 이데올로기 즉 ‘농장을 가진 선비’들의 이익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농장을 가진 선비들은 옥답을 확보하기 위해 기꺼이 향소부곡민들을 부랑민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터전을 잃은 그들은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아웃사이더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시대의 반란의 주체는 이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무정부주의적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광해군시대를 거치면서 완벽한 굴곡을 겪게 됩니다. 변화를 꿈꾸고 변화를 실현할 수 있을 만한 대안세력이 이 두 시대에 궤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중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의 승전보가 조정에 닿기 무섭게 내려온 것은 칭찬도 포상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조정에서 내려 보낸 관리에게 ‘병권’을 넘겨주라는 명령서였습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왜병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어쩌면 ‘반란군’이었을까요? 빛나는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은 결국 반역의 죄를 쓰고 무고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도 집권 양반사대부세력의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그토록 활약이 대단했던 승병들은 임진왜란의 종결과 함께 더 깊이 산으로 산으로 숨어야 했습니다.)
(이후 조선에는 의로운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어느 연구자의 기록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임진왜란때 의병참전율이 전체 인구의 3.5%에 이르렀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할 동안의 5년간 의병및 대일항전에 참가한 인구의 비율은 1.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마치 IMF경제위기 때 국가가 개인과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자 모두가 개인주의에 빠지고,가족이라는 울타리만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후 조선 사람들은 개인주의화하고 가족이나 가문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걸 탓할까요? )
전쟁은 이후 집권사대부들이 탐욕을 응징할 에너지를 전부 쓸어가 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곽재우를 비롯한 실천적 지식인들은 몸을 사리며 백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로 권력의 중심부에 올랐던 남명 조식계열의 실천적 성리학자들은 인조반정과 함께 뿌리가 뽑혀버렸습니다.
대안세력의 궤멸은 사대부층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급성장한 도시의 중인계층과 특별히 서얼들은 일부 사대부들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드는데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하급무사와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집권세력내로 들어가려던 그들의 꿈은 광해군시대와 함께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하급무사에겐 막부-천황 간의 정치적 대립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의 서얼들에겐 그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인조-소현세자의 갈등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추노>는 서얼 대신에 그 자리에 노비들을 놓음으로써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4.
노비들은 반란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그 유명한 망이 망소이의 반란과 같은 일이 조선에선 왜 벌어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시겠지만 고려시대 천민반란을 일으켰던 망이 망소이는 ‘명학소’ 소속의 천민들입니다. ‘향소부곡’으로 알려진 ‘소’의 소속 천민들은 국가의 특수행정구역에 거주하며 공물을 생산하는 곳입니다. 도자소에서는 도자기를, 지소에서는 종이를, 그리고 염소에서는 소금 따위를 만들어 바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세금내는 천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북방민족과의 전쟁시에는 군인으로서 활약하기도 했으니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비백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무신집권과 같은 신분질서의 교란을 목격하였을 때 집단거주라는 조직력의 장점까지 더해지며 반란을 성공시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노비의 위치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재산’이었습니다. 가령 한양에 사는 김아무개의 재산상태를 기록하는 장부에는 ‘전 몇 평, 답 몇 평, 여자 노비 몇 명, 남자 노비 몇 명’...이런 식으로 표기되었습니다. 노비는 거래되기도 했고 세습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멸에 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노비들은 반란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반란을 꿈꿀 힘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인이 가진 권력 부스러기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비에겐 조선 후기 백성들을 거리로 내몰고 도둑이 되거나 거지가 되도록 했던 삼정문란이라 불리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군포를 낼 필요도 없었고, 환곡미에 압살당하거나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주는 밥을 먹고 주인이 주는 일을 하였지만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농민들은 일부러 전답을 처분하고 노비가 되는 길을 자청하기도 했습니다. 농민은 나라의 봉이었고, 나라의 노비였으니 어쩌면 그들이야 말로 ‘추노’의 노비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조선후기에 국가시스템이 정지한 이후는 지역사회의 실권을 장악한 향촌의 양반-서리집단들의 권력은 관가의 노비들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궁궐부터 촌구석까지 세금집행자는 관노였습니다. 그들은 그 권력을 마음껏 유지했습니다.
양반가의 노비 또한 권력의 수혜자였습니다. 양반들은 차츰 지주화해가고 있었고,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이라도 붙여먹기 위해 그 관리인들인 노비에게 아첨을 해야 했고, 굴욕을 참아야 했습니다. 노비들에 의해 사사로이 린치가 가해지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농민들을 보호할 법은 이미 사라졌습니다.(정약용은 바로 그런 법치의 복귀를 꿈꾸며 목민심서를 지었습니다만, 그것은 헛된 꿈이었습니다)
조선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노비’가 아니라 ‘농민’이었습니다.
5.
영국 유학생이던 시절 '이토 히로부미'는 영어못하는 노란 원숭이라는 놀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열등감때문이라기 보다는 영어가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여긴 까닭이겠지만 귀국 후 일본의 총리가 되자 영어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온 나라에 영어 교육학교를 세웁니다.(아시다시피 일본은 영국식 전통을 대거 도입했습니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이 일본의 지향점이라고 여긴 것이겠지요.)
한술 더 떠 그의 후계자는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했습니다. 근대문명은 영어문명이었으니 그럴법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책은 곧 폐기되었습니다.'영어를 공용어로 하면,상류계층과 하류계층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부지한 일본어. 그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의 개혁 성공의 열쇠였고,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해준 힘이었고, 이후 2차 대전이후 재건에 성공해서 경제대국이 되게 해준 밑바탕이었습니다. 일본어는 ‘가나’라고 하는 단 하나의 언어체계로 전국민을 통합해냈기 때문입니다.
<추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에 바로 양반 사대부와 백성-노비들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막표기’입니다. 수준급의 한문실력을 가진 사람도 그 자막의 도움없이는 드라마를 볼 수 없게 하는 양반들의 대화는 그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집권층과 피집권층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 언어적인 집입장벽을 만들어 특권을 누리는 일들은 중세 유럽학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드를 중심으로 치고 올라오는 기술자들의 도전 앞에 자신들의 위세를 드러낼 필요가 있었는데요, 그것이 ‘가발 쓴 귀족’으로 대표되는 ‘학회’의 설립이었습니다. 수많은 학회는 폐쇄적인 회원제였고, 이 학회는 회의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문자를 깨우치지도 못한 기술자들과 자신들을 차별지어내는 이 체제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갈릴레오는 이탈리아어로 책을 썼습니다.
조선은 세 개의 문자체계가 공존하던 시대였습니다. 집권 사대부들의 한문체계와 중인계층의 향찰, 그리고 이 두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는 계층의 언문. 달리 말해 조선시대는 세 개의 신분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19세기 말에 한글의 사용은 ‘신분해방’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끝까지 한문을 고집한 양반들과 한글을 사용한 평민들은 평행선을 걸었습니다.
(한글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글 성경과 한글 예배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성공적 기독교 선교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했습니다. 중국에서도 기독교의 거듭된 선교실패를 문자체계에 있다고 보고, 고문이 아니라 백화문으로 된 신문과 성경의 보급을 통해 내륙까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를 장악한 자가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할만합니다.
이에 대비되어 19세기 말 이후의 일본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이미 가나체계를 일본 지배세력이 선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학자는 조선의 멸망을 ‘조용한 멸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에게 주권을 뺏겼다고 생각하기 보다, 양반중심의 세상의 종말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시대 조선인들의 행동에 대한 분석이었는데요, 그것은 결국 한문체계의 종식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더 이상 한문은 우리민족의 문자체계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추노>가 시도한 한문-한글 자막은 조선양반사대부권력에 대한 통찰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드라마가 표현하려는 역사에 대한 해석의 뛰어난 점이기도 합니다. 조선 왕조 500년동안 시도했지만 결국 우리의 언어체계(사고체계)는 결코 한문으로 표현되지 않았으며, 왜 조선이 백성들에게 버려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모쪼록 명품드라마로서 <추노>가 기억되길 바랍니다.
6. 덧붙여
짝귀의 등장으로 <추노>에 새롭게 추가된 재미는 바로 이시대 ‘왈패’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당시 왈패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소설로는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을 추천드립니다. 신분해방과 인간평등론자였던 박지원은 소설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였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거지’입니다. 거지들이 보여주는 위대한 인간애를 통해 가식적인 양반세계를 비웃었습니다. 그런 점이 박지원 소설의 매력인데요, 특별히 소설의 주인공으로 거지가 등장한 점에서 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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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노비의 삶이 안정되었다는 이야기는 제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당장 수십년전 사극만해도 노비들의 한이나 분노가 많이 담긴 것들이 많지요. 그런 한이 있었던 삶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물려받은 세대가 드라마를 보았으니까요. 반란의 주체가 노비가 아닌 농민이 된 것은 오히려 그 노비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실재로 조선후기 많은 노비들이 재산을 모아서 주인으로부터 벗어나서 면천을 하게 됩니다. 정조때는 공노비들이 공식적으로 없어지고 장원은 이미 조선후기부터 노비경영의 비효율성때문에 대부분의 노비들이 소작농으로서 최소한의 인격적인 독립을 얻었지요.
노비문제에 대하여, 아주 디테일한 정보나 연구를 한 것은 아니라 제 해석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노비 면천은 양반과 왕실권력간의 역한관계의 산물이지,노비들의 투쟁의 산물로 얻은 결실은 아닙니다.즉, 노비는 양반에겐 경제적 기반이 되고,당연히 반대로 국가에는 세금손실이 됩니다.그래서 대대적인 면천을 통해 세수원을 확보하려는 일은 고려시대부터,(어쩌면 고구려시대의 을파소의 개혁도 저변에는 이런 의미가 있고요)있어왔고, 왕권이 강할 때 실행되는 것입니다.
사노비, 그러니까 당시 양반층의 변화 역시 같은 방향이었습니다. 이건 조선 전기는 경지에 비해 인구가 적기 때문에 인신지배를 하는 방향이 지배층에 더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확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경지는 얼마든지 개간할 수 있으니까요. 실재로 토지의 소유주가 실경작자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합니다. 그런데 후기로 가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인신지배보다는 토지를 소유하는편이 더 유리했습니다. 농사지을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래서 관리가 까다롭고 생산의욕이 적은 노비보다는 소작형태의 장원지배를 더 선호하게됩니다. 조선후기 노비의 감소는 어느 한쪽의 의지라기 보다는 인구증가와 생산력 향상이라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른 대응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노비의 삶이 상민에 비해 나쁜 편이 아니었다고 밝히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임진왜란때 천민들이 앞서서 장혜원인가 노비문서 창고를 앞장서서 불태운 것 등을 볼 때 조선 의 시기에 따라 상민과 천민의 삶의 질의 차이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노예나 농민들의 반란은 역사시대 이후로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기원전에도 있었고, 중세에도 있었고, 근대에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수탈과 착취에 견디지 못해서 다 죽이고 새로운 세상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식의 농민반란을,
일본의 메이지유신 처럼 근대화를 향한 투쟁의 길로 보는 것은,
조선역사를 대단히 과대평가하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조선후기 농민봉기를 일으킨 세력들이 신분타파와 평등한 세상 따위를 부르짖기는 했어도,
그 정도 요구야 기원전의 진승오광이나 스파르타쿠스도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일본의 유신지사들처럼,
근대화를 향한 열망, 깨어있는 의식, 풍부한 지식, 비전, 넓은 세상에 나가 위대한 문물과 문명을 보고 배운 사람들,
그것에서 큰 충격과 자극을 받아 내 나라를 부강하고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열망에 찬 사람들이,
주축이 되지 않고서야,
단순히 평소에 원한이 많았던 양반집에 낫 들고 뛰어들어가 다 죽이고 불을 지르거나,
지방 수령들의 공덕비를 때려부수는 수준에 머물러서야,
설사 성공한다 한들 주원장의 명나라처럼 왕조만 뒤바뀌는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