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타이거즈의 역사도 끝자락에 닿았습니다. 이번회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간을 다룹니다.
원래 해태는 1982년부터 2001년 시즌 중반부까지 존재했지만 이미 2001년은 기아편에서 다루었기때문에 2000년에서 해태의 역사를 매듭짓습니다. - 해태와 기아를 합치면 이러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죠. -
절취선----------------------------------------------------------------------------------------------------------------------
1998년, 1993년부터 5년간 해태의 공격의 50%를 차지했던 이종범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해태.
이로인해 김응룡 감독의 명대사가 하나 생겼으니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그리고 앞에서 서술했듯이 김응룡 감독은 하와이 항명사태의 주범들을 하나씩 처리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순철, 정회열, 조계현을 삼성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용병제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던 1998년. 해태는 전설적인 용병을 데리고 옵니다.
이름도 유명한 숀 헤어. "3할을 원하는가? 30홈런을 원하는가?", "펜스를 넘겨야 홈런인가? 구장을 넘겨야 홈런인가?" 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으나 성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결국 시즌중에 퇴출당합니다.
일단 이종범, 조계현, 이순철, 정회열등의 선수들이 빠진 해태는 "Ace of Ace" 이대진을 주축으로 삼아 이강철, "아기호랑이" 김상진, 최상덕등으로 선발진을 구성했고 작년에 마무리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던 임창용을 주전 마무리로 삼습니다.
타선에서는 이호준, 김창희, 홍현우, LG에서 건너온 송구홍, 최훈재, 장성호, 최해식등을 주축으로 삼았습니다.
시즌 초중반 해태는 5월 14일에 vs 현대전에서 10연속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에이스 이대진을 앞세워 리그 상위권을 질주합니다.
이대진앞에 타 팀의 타자들은 맥없이 아웃당하기 일쑤였고 9년간 두자릿수 승수, 세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한 이강철도 조용하지만 꾸준히 상대 타자들을 맥없이 돌려세웠습니다.
이대진, 이강철등의 선발진을 넘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임창용. 이 해의 임창용은 작년보다도 더욱 단단한 구위를 선보였습니다.
1998 이대진 : 28등판, 28선발, 179.1이닝, ERA : 3.26, 12승(12선발승) 11패, 183K
1998 이강철 : 31등판, 28선발, 179.1이닝, ERA : 3.11, 15승(13선발승, 2구원승) 11패, 160K
1998 임창용 : 59등판, 133.2이닝, ERA : 1.89, WHIP : 0.90, 8승(8구원승) 7패 34세이브, 141K
임창용은 평균 자책점 1.89를 찍었으나 아쉽게도 현대의 정명원이 선발투수로 전업, 평군 자책점 1.86을 기록하는 바람에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실패합니다.
이대진은 1995년에 이어 2번째로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강철은 10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 세자릿수 탈심진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합니다.
이 외에도 최상덕이 8승을 올리며 선발진에서 활약했고 김상진도 121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3.87을 기록합니다.
타선에서는 이종범이 빠지고 나서 생긴 선두타자의 부재를 장성호가 잘 메웠고 게다가 해태타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우타일색을 말끔히 해결했습니다.
중심타선에서는 홍현우와 이호준이 한방을 날려주었고 데뷔하자마자 이순철을 밀어내고 주전 중견수자리를 차지했던 김창희도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적생 송구홍도 타율 0.288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1998 장성호 : 125경기 출장, 타율 0.312, 529타석 465타수, 145안타, 15홈런, 76득점
1998 홍현우 : 126경기 출장, 타율 0.269, 533타석 442타수, 119안타, 15홈런, 62타점, 80득점, 13도루
1998 이호준 : 121경기 출장, 타율 0.303, 465타석 422타수, 128안타, 19홈런, 77타점
1998 김창희 : 124경기 출장, 타율 0.267, 500타석 439타수, 117안타, 12홈런, 64타점
하지만? 시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팀의 에이스 이대진이 심각한 팔꿈치와 어깨부상이 생기면서 연패에 빠지기 시작했고 - 원래 부상이 있었으나 숨기고 던지다가 발견된 것입니다. - 이적생 송구홍도 허리부상의 재발, "아기호랑이" 김상진은 호투했음에도 승보다도 더 많이 패를 챙겨야만 했으며 1997년 말에 벌어진 IMF사태로 해태그룹이 도산위기에 몰리며, 특히 주력인 해태제과가 부도가 나면서 팀내 분위기도 심각하게 어수선해졌습니다. - 그나마 1998년에는 해태상사와 해태타이거즈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
이러한 상황속에서 해태는 조금씩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OB베어즈의 막판 연승가도 앞에 4위를 내주며 5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1998년말에는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완투승을 일구어낸 "아기호랑이" 김상진이 목의 통증으로 인해 쓰러졌고 진단결과 위암말기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 암세포가 위벽에서 생겨난 상황이라 내시경으로 발견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암세포는 목에까지 침투한 상황이어서 손 쓸 방법이 거의 전무했습니다. -
1999년, 마무리 임창용을 삼성으로 보내는 대신 삼성에서 최고의 좌타자 양준혁, 유망주 황두성과 곽채진을 받아온 해태.
하지만 양준혁은 해태로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트레이드를 거부하는 대신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1년을 뛰다 오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 하지만 한미선수협정 7항, 즉 구단에서 임의탈퇴된 선수는 미국에 진출할 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마이너리그에서 뛸 수 없게되자 양준혁은 1년간 미국연수를 가겠다고 다시 입장을 밝힙니다. -
이 때, 양준혁이 현대로 재트레이드된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해태구단은 "재트레이드는 없다" 라는 입장을 밝혔고 김응룡 감독이 양준혁을 설득 - 그리고 이 해에 도입된 FA규정으로 인해 - 양준혁은 극적으로 해태에 오게 됩니다.
1999 시즌의 해태타이거즈는 무서운 화력을 뽐내는 팀이었습니다.
톱타자 장성호를 시작으로 양준혁, 홍현우, 샌더스, 브릭스, 이호준등이 무시무시한 홈런포를 쏟아냈으며 이 해에 해태는 팀 홈런 210개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작성합니다. - 1999년에 삼성은 홈런 207개를 때려냈고 2003년에 이승엽 - 마해영 - 양준혁이라는 극강의 클린업 트리오를 보유한 삼성이 팀 홈런 210개를 기록하며 1999년 해태의 기록과 타이를 이룹니다. -
두자릿수 홈런을 때려낸 타자 7명, 투수가 잘못 던지면 그냥 펜스 넘기는 타선이었습니다.
1999 장성호 : 129경기 출장, 타율 0.342, 559타석 485타수, 166안타, 24홈런, 62타점, 110득점
1999 브릭스 : 115경기 출장, 타율 0.283, 382타석 361타수, 102안타, 23홈런, 74타점, 48득점
1999 양준혁 : 131경기 출장, 타율 0.323, 588타석 496타수, 160안타, 32홈런, 105타점, 96득점, 21도루
1999 홍현우 : 129경기 출장, 타율 0.300, 561타석 487타수, 146안타, 34홈런, 111타점, 99득점, 31도루
1999 샌더스 : 125경기 출장, 타율 0.247, 526타석 409타수, 101안타, 40홈런, 94타점, 86득점
1999 이호준 : 107경기 출장, 타율 0.276, 342타석 312타수, 86안타, 16홈런, 55타점, 48득점
1999 김창희 : 117경기 출장, 타율 0.261, 412타석 341타수, 89안타, 10홈런, 39타점, 55득점
1999 정성훈 : 108경기 출장, 타율 0.292, 416타석 366타수, 107안타, 7홈런, 39타점, 49득점
장성호는 정확성과 장타력을 동시에 갖춘 타자였으며 해태로 건너온 이적생 양준혁은 1996년부터 시작된 20 - 20의 기록을 1999년에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2루수에서 3루수로 다시 2루수로 보직을 변경한 홍현우는 LG의 이병규, 한화의 데이비스와 함께 30 - 30을 기록하며 우리나라에 단, 5명만 기록한 30 - 30클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용병타자 샌더스는 야구 관객들에게 타자의 기록을 타율, 출루율, 홈런, 삼진, 볼넷만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해에 해태가 갖고있던 심각한 문제점이 타선의 강력함을 빛이 바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마운드의 붕괴.
에이스 이대진이 부상으로 주저앉아 이 해에는 단 1경기에 선발로 등판, 3.2이닝을 던지는데 그쳤으며 차기 에이스 김상진은 위에서 서술하다시피 말기 위암, 그나마 10년간 두자릿수 승수, 세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했던 꾸준한 선발투수 이강철은 삼성라이온즈로 이적, 최강의 마무리 임창용도 삼성으로 이적한 상황이었으므로 도저히 쓸만한 투수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2년차 곽현희가 11승을 올리며 선발진을 이끌었으며 삼성에서 건너온 곽채진은 계투로 활약하며 8승 8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이 외에 최상덕 7승, 유동훈 - 2009 시즌에서 대 활약한 "달의빛유" 입니다. - 7승으로 어느정도 활약하지만 20승 투수 정민태, 10승 투수 김수경을 보유했던 현대 - 타선은 쌍방울을 제외하면 최악이었지만 - , 17승 투수 문동환, 13승 투수 주형광, 11승 투수 박석진을 거느린 롯데, 15승의 노장진, 12승의 김상진 - 해태의 김상진과 동명이인입니다. - , 11승의 김진웅, 13승 38세이브의 임창용이 있는 삼성, 정민철이 18승, 송진우가 15승, 이상목이 14승, 구대성이 8승 26세이브를 기록한 한화, 13승의 강병규와 이경필, 16승 36세이브를 기록한 진필중의 두산에 비해 마운드가 너무나도 얇았습니다.
결국 해태는 마운드의 열세로 인해 60승 69패 3무를 기록하며 드림리그 4위, 전체 7위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1999년 6월 10일에 "아기호랑이" 김상진은 눈을 감습니다.
2000년, 최상덕이 12승을 올리며 선발진을 이끌었고 이대진이 1999 시즌 중반이던 6월 11일에 미국에서 어깨 수술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이대진은 선발, 마무리, 계투를 오가며 105이닝을 던졌고 8승 13세이브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 해의 무리가 독이 되어 다시금 깊고 깊은 재활의 기간에 잠겨들고 맙니다.
이 외에 쌍방울에서 건너온 성영재가 7승, 작년에 11승을 올린 곽현희가 7승을 올렸지만 해태의 마운드는 예전의 명성만큼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1999년에는 장성호, 브릭스, 양준혁, 홍현우, 샌더스, 이호준등의 막강한 타선이 존재했지만 2000년에는......
양준혁은 LG로 건너갔고 샌더스, 브릭스와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으며 작년에 3할을 기록하며 30 - 30에도 이름을 올린 홍현우는 타율이 0.234로 순식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 그나마 홈런은 14개를 때려냅니다. - 이호준은 SK와이번스로 건너갔습니다.
그나마 작년에 데뷔했던 장일현, 홍현우 대신 주전 3루수로 발탁된 정성훈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고 장성호가 공격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시즌 중반에 건너온 외야수 용병 타바레스가 큰 활약을 했지만 해태는 옛 왕조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2000 장성호 : 115경기 출장, 타율 0.324, 546타석 450타수, 146안타, 14홈런, 48타점, 90득점
2000 타바레스 : 74경기 출장, 타율 0.334, 334타석 305타수, 102안타, 3홈런, 44타점, 39득점, 31도루
일단, 이 해에 해태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준 선수들의 기록입니다.
해태는 57승 72패 4무를 기록하며 드림리그 4위, 전체 6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2001년 중반까지 해태타이거즈라는 이름은 존재했지만 기아자동차가 210억에 해태타이거즈를 인수하며 8월 1일부터 팀 명을 기아타이거즈로 바꾸면서 9번의 우승을 이루어낸 전설적인 왕조 해태타이거즈는 약 20여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 27년사에 등장하는 모든 구단들을 다루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번외편으로 한국 프로야구 27년사 총 결산편과 부록으로 2009년을 다룰 예정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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