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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28 14:21:01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역사토론 통합불판)조선시대에 대해 계속 말해볼까요?
지난 주말에 몸이 너무 좋지 않아, 불판만 세워놓고 전혀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하고요, 이렇게라도 다시 불씨를 지펴보겠습니다.

세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1.조선 성리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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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림파에 대한 재평가
https://ppt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4&sn1=&divpage=3&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225
3.광해군과 인조반정
https://ppt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4&sn1=&divpage=3&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230


각각의 주제에 대한 토론을 정리하고, 못다한 이야기들을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는 역시 환타지일 때 재미가 있는 법, 저처럼 환타지와 먼 사람이 토론을 이끌어가면 아무래도 건조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을 전공해서인지 증명되지 않는 역사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고려시대 김부식이 그랬듯이 중국에서도 사마광은 사마천의 <사기>속에 담긴 ‘사기적인’기술을 배격해서 역사를 합리적 기준에서만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치통감>을 만들었고, 이것이 송나라 신유학자들을 열광시켰으며 이후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역사인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결국 우리나라 역사에 현재까지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환타지’를 쫓던 한백겸이었습니다.

그래서,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해선 안될 역사매니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논리적 완결성은 오로지 추상적 세계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현실은 훨씬 풍부한 자기논리를 바탕으로 전개한다는 것을 저도 늘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저도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겠습니다.

일단, 이전 토론을 정리하겠습니다.(제가 정리에 관한한은 학창시절부터 불치병수준이었던지라,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전 학생시절,노트필기란 걸 거의 해본 적이 없습니다.그림만.....잔뜩 그리는 불량학생^^)

1. 조선성리학에 대한 평가
swordfish님은
조선 성리학을 실패하지 않은 학문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500년간의 온건한 체제를 유지한 것이 바로 ‘조선 성리학’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본같은 잔인한 수탈도 피하고, 중국같은 무자비한 형벌로부터도 평민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조선성리학’의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국가 엘리트의 도덕적 규범의 형성과 강제가 ‘조선 성리학의 힘’!
그러나 물질문명에 대한 대응이 늦었던 점이 있다.과학,특히 수학분야의 발전추진력이 없었던 점이 치명적으로 여겨진다.물론 이것도 물질적 하부구조(의역:경제관계의 발전과 분화와 이를 표현하는 사회적 신분의 성장)이 취약해서 그렇다.

귀염둥이님은
조선성리학 발제(제 발제문이 이언적-이황-이이...뒤이은 호락논쟁으로 이어집니다)에 남명조식이 없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셨습니다.
(제가 답변을 못드렸는데요, 이 자리를 빌어서 답변을 드리면, 남명 조식선생의 사상은 철학사상적으로 정리하면 이이와 서경덕의 합집합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따라서 철학계보상으로는 제 능력으로는 짚어내기 어려웠습니다.다만 광해군편에서 보듯이 정인홍과 광해군의 몰락으로 조선 성리학 내에서 의도적으로 폄하해 왔다는 점에 대해서 공감합니다. 누군가, 두 사람의 복권을 해줄날이 오길 바랍니다.)

Benjamin Linus 님은
고려시대가 계속되었다면 꾸준히 중동과 교류해서 여러 정보와 문물을 얻어 임진왜란도 막았을테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격정적인(^^) 주장을 하셨습니다. 조선 성리학이 외부세계와 조선사회를 단절시켰던 결과가 쇄국정책과 그 뒤를 이은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윤성민 님은
학문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성리학의 배타성이 내부 개혁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십니다. 양명학을 비롯해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학문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처럼 서양과 동등하게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오야붕 님은
노론독재,세도정치로 인해 이전 시대까지는 서로간의 논쟁을 통해 발전하던 조선성리학이 붕당,가문싸움으로 변질된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과학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양세력에 무릎을 꿇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리와 톰 님은
조선의 비극은 정치적인 비극일 수는 있으나 결코 철학의 실패는 아니었다고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에 벌어졌던 성리학 내의 철학적 논쟁은 전세계의 무수한 철학적 논쟁과 더불어 그 궤를 달리할 정도의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역을 포한한 제 개인의견첨부^^: 어떤 나라도 이렇게 철학적으로 풍부한 논쟁을 통해 풍부한 사상적 유산을 가진 나라가 없다는 말씀에 대해 저또한 동의합니다. 후세의 우리가 이를 비하하고, 알려하지 않아서 봉인되어버린 중세의 마법술이라고나 할까요?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철학적 검증과정에 대해 누군가 말해줄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lovehis 님은
Benjamin Linus님의 의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성리학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데, 그렇게 까지 좋은 것 잘한 것 없다면 조선은 500년 동안 지속되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500년 이상 간 절대왕조가 전 세계적으로도 얼마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망할때가 된 것이니 망한 것 같습니다.
(한가지, 그냥 여담인데요, 전세계에서 수천년간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온 왕조가 일본 왕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섬나라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 몽골-고려 연합군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겠지만, 저는 철저하게 역사에 만약이란 말을 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라...)

大司諫 님은
주자 성리학은 그 긴 세월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했고, 지금도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붕당 정치 시기는 절대 피의 정치가 아닌, 정치적 희생자가 가장 적었던 시기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자 성리학의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제 의견 첨부: 한 철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붕당간 정치적 균형을 이룰 때 민란도 적고 봉기도 적었다고 합니다. 견제와 균형, 그것은 절대 오늘날 의회정치만의 문제는 아니고,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붕당정치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붕당정치에 대한 폄하나 혐오에 대해 당당히 맞설 필요가 있지 않나...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시대는 끝났으려나?)

한사영우 님은
유학은 고려와의 정신적 문화적 단절, 그리고 정신과 문화의 관계에서 중국에 복속 되는 효과를 가져온 점이 역사적으로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당연합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소림무술 님은
Benjamin Linus님의 주장(의역에 가까운 해설: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역사적 퇴행이라고 여기셨습니다)에 대해,
고려보다는 조선이 상대적으로 발전된 국가입니다.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모두 고려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예컨대 과거제도,조선 초기의 과학기술 등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참고로 고려가 조선보다 좋다는 인식은 그 뿌리를 파헤치면 일제의 식민사관에 토대를 두고있다는 점을 염두해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Eternity 님은
어떤 국가이든지 그 국가가 멸망할 때에 그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지배적인 사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은 쉬이 범접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깊이가 있는 학문이며, 다만, 그러한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배층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고. 변질되어왔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순서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한 성찰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의 위치를 제대로 판별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성서의 가르침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보다... 성리학이 못할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냐고 물으셨습니다.

윤성민 님은
(의역보충:조선보다 고려라는 나라가 훨씬더 변화에 탄력적이기 때문에 ) 아라비아 상인이 속요에 등장할 정도로 무역이 활발했던 점, 사상의 자유로움 등은 19세기 말에 우리 나라가 살아남는데는 고려라는 나라체제가 더 적합했다고주장하셨습니다.
더불어 Eternity님의 주장에 대해 성리학이 좋은 학문이었던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 뒤부터는 저의 의역입니다) 세계정세의 변화에 발맞춰 조선사회의 발전을 이루어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으로서는 부적합했다고 하셨습니다.

한사영우 님은
윤성민님의 주장에 대해,(유학과 성리학은 다르지 않느냐는 주장겸 질문에 대해)
그래서 유학과 성리학을 구분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리학은 태생적으로 중화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의역:그 수많은 이기설과 인물성동이론과 같은 철학적 담론의 치열한 공방전이 아무리 벌어져도,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말씀^^)

제리와 톰 님은
성리학의 발생과정에 대해 법가와 유가의 역사적 전개(법가의 진나라,유가의 한나라)를 통해 살펴보셨습니다.이를통해 중국이 왜 아직도 유가적인가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혼란기의 국가에 있어서는 국가의 능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내어야 하므로 법가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통치기에 들어선 국가에 있어서는 국민들을 어떤 식으로 복종하게 만들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유가는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의견 첨부:이 설명은 성리학의 발생과정이라기 보다는 유가 사상의 발생과 전개라고 해야 엄밀할 듯 싶습니다.유학도 공자,맹자시대와 이후 한나라-동중서-시대가 다르고, 이후 송나라 신유학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만들어졌으며, 성리학적 이상국가였던,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 퇴보로까지 일컬어지는 명나라는 서양학문과 만나면서 자기반성을 통해 고염무,황종희 등의 처절한 이론적 실천적 변화를 모색하였고, 이때 성리학은 폐기되다 시피 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통해 이런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요, 남명조식,화담서경덕 문인들은 이론에 철저하지 못했고,실천적으로는 지독한 근본주의적 태도로 인해 파멸한 것이 결정적으로 주자성리학자들의 사상적 반동이랄 수 있는 인조반정에 의해 맥이 끊겼다고 여겨집니다.)

나이트해머 님은
성리학이 문제가 아니라 사상 독재가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동방정교회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이런 종교분야에서 탈락한 시점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고요.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조선 후기엔 그런 경쟁이 멈춰 버렸고, 그로인해 발전이 정지되지 않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의견 첨부: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갑니다.^^)

루크레티아 님은
'철인정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 라고 주장하셨습니다.(개인의견첨부:꽤 매력적인 슬로건 같습니다. 정치는 현실이니까요^^)
그 근거로,
과격한 현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냉엄한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와 언제 먹고 먹힐지 모르는 국제정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란 씨알도 안먹히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죠. 문제는 성리학은 이런 기술은 전혀 없고 당장 외적이 쳐들어오고 백성들이 굶어죽는 마당에 우주의 원리나 탐구하라고 계속 뜬구름을 잡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信主SUNNY 님은
조선 시대의 유교는 학문이기도하지만 종교이기도 했고, 그리고 정치체계이기도 했는데, (의역:)이것이 조선시대 말의 비극을 낳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죽자고 하나만 붙잡고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자명하지요. 학문의 단계에 머물렀다면 다른 것들을 받아들여 새롭게하는 것이 쉬었을지 모르겠지만, 신앙이자 사상의 단계이기 때문에 사수해야한다는 사명감도 생겼고, 정치체계이기도 했다는 것은 정치인들이던 유학자들에게는 밥줄이기도 했기에 놓을 수 없는 절박함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개인의견첨부:왜 학문이 아니고,철학이었는가에 대한 답으로 저는 일본과 서양의 경우는 신과 천왕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만이,특히 우리나라가 더 이런 경향이 강한데요, 중국은 주자학이 그토록 노력했는데요, ‘가례’로 발전하지 못하는 벽이 있었어요.근본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유학 혹은 성리학을 법률 혹은 관습으로 받아들이거나 학문으로 여겼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공자도 신이됩니다.그들의 신앙체계는 꽤 편리한 분리가 가능하거든요.도교적이기도 하고 불교적이기도 하다고 해야 하나? 뭐 그래요.그래서 공자도 신이 되는거죠.
반면에 한국은 좀 달라요.조선시대도 그랬지만 현재도 그런 것 같아요.전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가 한국이 아닐까요? )

이상입니다.

2.사림파에 대한 평가

Valentian 님은
1)조선건국부터 조선의 역사는 중세를 넘어서 근세로 평가받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고려의 음서제도와 과거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개혁하여 신분 위주의 등용보다 능력 위주의 등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이를 토대로 조선이 고려와 대비하여 사회, 경제, 문화 등으로 쭉쭉 달라지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중세라 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라고 제게 물으셨는데요,

(이자리를 빌어 대답합니다:중세와 근세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엄격한 용어를 쓴것은 아닙니다.원래는 고려시대까지 포괄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나,고려시대의 토론주제가 없어지는 바람에 이두 시대를 포괄하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굳이 큰 토론거리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3,4)에 대해서도 질문하셨는데요.
“각 붕당이 끊임없는 내분을 통해 세력을 잘라낸다는 내용은 일본의 우익과 우리나라의 극보수가 똑같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식민지 타율성론과 다를바 없습니다. 초기 붕당정치의 하에서는 '공존'의 미덕이란 반드시 지켜졌습니다. 조선의 미묘한 권력의 분배(예를 들어 이조전랑을 통해서, 조선의 3품 이하의 관리들이 그저 실무직으로 전락하는 사태를 막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의 원칙 하에서 붕당이란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갖춘, 꽤나 선진적인 정치 시스템이였습니다. 4)중간내용과 맞물리게 말한다면, 조광조는 '공존'의 미학을 지키려고 했던 자이기 때문에 '공자 vs 소인'의 구도를 말하였습니다. 붕당정치의 변질 과정에서 이와 같은 구도는 '충신 vs 역적'의 구도로 변질되었고, 따라서 공존의 원칙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론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식민사관이니,어쩌니 하면 꼬리표 붙이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사실을 중요시하고,그 사실에 대한 재해석에 더 노력하고자 하거든요.가령,고조선의 멸망이나 낙랑군의 위치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합니다. 당시 한반도의 주체는 고조선만이 아니었고,고조선의 독무대이던 시절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으며,그것의 정치적 표현이 고조선고립화정책-한반도에서 만주,간도까지 넓게 분포한 우리민족의 선조들에 의한-이었다고 보니까요.이점이 앞으로 더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붕당정치에 대해서도 저는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정파가 타협을 위한 타협정치의 선구적 실험이었던 것에 대해 동의합니다.그래서 가장 정파간 힘의 균형이 맞았을 때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기 쉬웠고,그만큼 민중들의 불만도 작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요, 조선시대 권력구조시스템자체가 붕당의 파괴에 너무 취약했습니다.그걸 보여주는것이 인조반정에 의해 권력을 손에 넣은 서인들이 국정장악방식입니다. 비변사만 손에 넣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치시스템의 문제는요, 우리나라 중앙집권 국가의 독특한 정치구조에서 나왔는데요, 왕권중심의 승정원 체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무력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붕당은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이기도 합니다. 훈구파의 독선적 강압적 지배방식, 다소 법가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반대급부로 탄생한 것이지요. 법은 늘 낡고 보수적인데 비해 여론은 급변하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보여주기 때문에 진보적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우수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론독점적 구조를 손아귀에 쥔 사림파의 정치적 기술이기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드러나는데요, 이후 여론을 손에 쥔자가 국가시스템을 손에 넣는 산림정치로 급속하게 변질하고, 다시 산림정치를 없애기 위해 벌인 숙종-영조-정조시대의 왕권강화책은 국가시스템의 중추부인 비변사만 손에 넣으면 몇가문만으로도 운영이 되도록 하는 일이 벌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나 할까요? 사림파는 붕당이데올로기를 만들 때, 여론에 대항할 안정적인 정치재생산구조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하지만 그 시대에 현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시대의 산물^^

Architect 님은
조광조는 스스로 자멸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자신이 섬기는 임금의 그릇과 성격을 제대로 몰랐으며, 밥그릇을 섯불리 뺏었다가는 어떠한 결과가 있을지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의역:정치적 미숙?)조광조의 자멸은 조선사 최악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제리와 톰 님은
사림파의 등장을 성종대의 인재수혈책의 일환으로 보셨습니다.(제 의견첨부:대개의 경우 성종대의 인재수혈책이라는 개념보다는 보통은 훈구세력 견제,왕권강화책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만....이것은 역시,좌측에서 보느냐 정면에서 보느냐 위에서 보느냐의 시점문제인거 같습니다)
세종의 사망 후, 다시 세조의 인재 제거 정책으로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육성되었던 엘리트 학자들의 수가 급감하고, 승정원 위주의 밀실 정치를 펼치면서 인재의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력의 등장은 요원해 질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성종이 훗날 사림의 정신적 거두가 되는 김종직을 등용함으로써 사림파를 정치무대에 데뷔시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의 상층부에서 학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보기가 어려웠기에 긴급히 새로운 세력의 수혈이 필요해 지게 된 것이며 이것이 이후 은둔하고 있는 학자(사림)들의 경세에 대한 자신감을 부추기게 되어 훗날 여러 번의 사화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완전히 사림파가 조선이라는 사회를 지배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개인의견보충:재밌는 시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크레티아 님은
Valentian님이 말씀하신 붕당이 선진적인 정치체계였다는 것에 대해,
그것이 인정을 못 받는 이유가 바로 그 견제의 미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의 시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개인의견첨부:좀 더 실증적인 주장이 필요한 시기인 듯 합니다. 견제나 정쟁이 무엇을 가져왔는지...가령, 우리나라도 해방이후 정쟁이 그칠날이 없으니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기도 하고, 아! 제가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요,저는 그럴만한 능력이 못됩니다)

3.광해군과 인조반정

평온하게 진행되며, 인조를 밤 까먹듯 까먹던 분위기에서

엘렌딜 님이
최악의 사건을 계유정난으로 보며,최악의 인물은 수양대군(의역:세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홍승식 님이 이에 대응하셔서,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너무 어린 왕은 무리가 있는게 사실이며, 문종이 너무 일찍 죽은게 안타까울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종은 거의 세종 주니어 라고 할만큼 성군의 자질이 충만했고 동생들과의 우애도 좋아 종친의 힘으로 신하들을 압박할 수도 있었고, 문종이 단종이 성인 될 때까지만 살았어도 조선의 전성기는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개인의견첨부:이시대 연구가 천박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문종은 성군이 될 자질이 없었다고 봅니다. 고집불통 뚱보^^-앗,죄송....사실,전 문종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문종은 집현전 학자를 억누를 기세나 학문적 성취가 모자랐고, 집현전학자들은 슬슬 정치세력화하는 중이었던지라, 세조는 현실적 판단을 내렸다고 봅니다.)

제리와 톰 님은
(제가 느낀 바로는)세조의 왕위찬탈이 나쁘다고 해야할지는 의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엘렌딜 님은 당장에 제리와 톰 님의 저 두루뭉실한 의견에 대해 반박,
집현전 엘리트 관료의 전횡이라고 해봐야 한명회 등 세조집권공신세력과 비교해 더하냐고 물으시면서, 세종, 문종, 단종대로 넘어오면서 왕권의 독단보다 재상 중심의 유교 정치의 기반이 자리잡혀 가는데 수양이 공명심이 넘쳐나고 권력욕이 강해서 그런 '시스템'은 무시하고 살육을 벌여 정권을 잡은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홍승식 님도 엘렌딜님의 의견에 보태셔서
(의역하자면)성종은 밥숟가락 하나 얹은 임금이며, 세조는 공신을 남겨둬서 분란의 싹을 키운 인물이다.
성종때 이뤄낸 모든 것들은 다 세종, 세조때 시작된 일들이 성종때 정리된 것 뿐,성종 치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은 없으며 이때가 전성기라는 건 그때부터 국운이 꺽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시대의 흐름일 수도 있지만, 지도자의 리더쉽이 부족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성종과 선조 중 하나를 뽑으라면 차라리 전 선조를 뽑겠다고 했습니다.

제리와 톰 님은 홍승식 님과 엘렌딜 님의 의견과 달리하셔서
성종에 대한 평가도 달리 보아야 하고, 그 근거로는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파의 등용 등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업적이 아니냐는 의견이셨습니다.
단종이 계속 정권을 이어갔다면 그것이 세조집권보다 더 낫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권력의 개편이 아니라 수평이동만이 존재, 오히려 집현전 학사와 기득권층으로의 권력집중만을 낳았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십니다.(다소 의역입니다)

Benjamin Linus 님은
(의역)단종이든 세조든 그밥에 그나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결국 성리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죠^^

루크레티아 님은 (주제를 돌려놓으셨군요^^)
광해군은 '정치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최고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될 것 같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유정난에 대해서
태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신하들을 모두 물리친데 반해 세조시대에는 한명회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신숙주나 홍달손 등도 장난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 직전법이나 6조 직계제의 부활, 경국대전의 편찬 착수 등으로 나름대로 왕권의 강화를 꾀해보았지만, 정말로 필요했던 일인 공신들의 숙청은 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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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유리
09/09/28 14:23
수정 아이콘
늘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 ^^;
한때는 역사에대해 관심도많았고 , 토론도많이했었는데..;
이젠좀 힘드네요 흐흐
릴리러쉬
09/09/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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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님 뜬금 없는 질문인데..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중고는 지증왕부터인가요 법흥왕 부터인가요..강의 들어도 들어도 헷갈리네요.
엘렌딜
09/09/2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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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Linus님//
세종, 문종 대에 성리학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이 세력을 잡았을 때처럼 교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소중화 의식보다 자주적이고 우리 것을 더 강조했고, 우리 역사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사를 편찬했겠지요.
성리학이 변질 - 이라기 보다 시대에 맞지 않는 이데올로기 - 가 된 조선 중기 이후의 상황은 따로봐야지 그 잣대로 세종, 문종, 단종 대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또, 누가 뭐래도 권력에 대한 야심가인 수양과 한명회, 권람 같은 건달들과 세종 때부터 나라를 위해 일해온 김종서를 위시한 기존 대신들을 모두 똑같은 인물이고 왕위를 쥐고 흔들 야심가들이라고 같은 선에 두고 보는 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닙니다.

김종서와 대신들이 단종을 어떻게 배필했고, 단종이 왕으로서 통치할 능력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 그랬을 경우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까를 좀더 살펴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요? 수양이 안 잡았으면 대신들이 잡았으니까 다 똑같다는 식의 주장은 요즘 말로 '물타기'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happyend
09/09/2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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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러쉬님// 법흥왕부터요^^이때부터 중고기 왕들의 공통점은 독자연호를 가졌죠.법흥왕이 맨처음 연호를 가졌고,마지막 연호는 진덕여왕.김춘추의 태종무열왕부터 연호가 사라집니다.이시대를 중고기라고 합니다.^^

엘렌딜님// (이시대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그래도 세종,문종대 성리학자들이 '소중화의식'이 없었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성리학 계보가 사림파 시대와 다른 것은 분명해보입니다.그래서 이때의 성리학을 저는 개인적으로'경국대전세대성리학'이라고 이름짓기도 합니다. 권근,정도전부터 양성지까지 이시대 유학이 주자성리학과 계보가 같다고 보긴 어려우니까요.뭐랄까 원나라를 거쳐서 들어온 고려말 성리학의 독특함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도 두파로 나눠졌는데요,세조편에 가담한 학자들은 왕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정주의자들이었고,반대파의 경우가 오히려 신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귀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평가를 개인적으로 하기 보다 조금 더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필요도 있어보입니다.
(경국대전이 얼마나 위대한 체제인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도 별거 없다는 식으로 한다면...음...)
릴리러쉬
09/09/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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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아하 지증왕은 아니군요.정말 감사합니다.담에 궁금한거 생기면 질문좀 해도 될까요?하하 요즘 국사공부중이라서요..
Astral_폭풍
09/09/2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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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있고 또 잘 보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먼저 달고 정독하겠습니다.^^
엘렌딜
09/09/28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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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그렇군요. 잘 배웠습니다^^
09/09/2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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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릉...

경주 저희 집 뒷산에 있는데...핫핫핫..;;
사실좀괜찮은
09/09/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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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Elminsis
09/09/2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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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궁금한게(아는게 없어서ㅜㅜ)
1.조선의 성리학이 중국의 성리학(주자학?)과의 차이점이 정확이 무엇인지?
(이황/이이등에 의해 발전되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것에 대해)
2.조선의 성리학이 여러 문화 예술 부분에 영향을 준 점이 있는지
(불교같은 경우에는 나름 사찰이라든지 영향을 많이 준것 같아서..)
그리고 성리학이 나라를 망쳤다는 주장때문에 궁금한게
3.조선이전의 주류사상에 의한 조직시스템(즉 고려의 조직시스템)과 성리학을 주류로 택한후 조선의 조직시스템의 차이점
그리고 명나라/청나라의 조직시스템과의 이전시스템과의 차이(어느정도 나라의 차이가 있지만 양명학을 받아들여서 생긴 차이는?)
만약 실학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조직시스템이 어떤식으로 바뀌었을까?
그리고 실학을 받아들여서 조직시스템이 좀더 좋아졌다면 이후 제국시대에 좀더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서양 같은 경우 중동지역에서 동방과의 거래를 오스만 제국이 막았기때문에 항해에 대한 필요가 생기고
항해에 대한 관심증가 -> 항해술및 그로 인한 여러기술 발달 을 했지만
동양같은경우 그런쪽의 필요가 적었기때문에 서양에 비해 과학적인 발전이 늦게 되었고 그게 패망의 길이 된 것이지
동양쪽만 생각했을 때 조선이란 국가가 그리 나쁜 국가였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평가를 할 때 철학적인 부분만 가지고 다른 학문과 비교를 해서 평가를 하거나(이부분은 철학전문가분들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종합적으로 역사/사회적인 요소들을 감안했을 때 어떤 의견들이신지 궁금합니다.

좀 더 궁금한 것을 나열해보면
그 당시에 동양의 다른나라들(중국, 일본, 동남아국가, 인도, 중동)의 정치시스템들과 비교를 해보고 평가를 해보면 어떤지?
또 현대의 정치조직시스템과 비교를 했을 때 먼저 그러한 제도를 도입하게 된 나라들이 (서양이 되겠죠?)
어떠한 요소들을 계기로(기존 문화가 다르니 한가지가 아니겠지만) 그러한 제도 시스템이 도입되어 왔는지?
동양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서양의 제도에 흡수되어 버린감이 있는데 만약 동양이 먼저 기존의 시스템에서 현대와 같은 시스템이 되었다면 어떠한 변화가 필요했는지?
그런관점에서 볼 때 성리학이 어떠한 역할을 해줄 수 있었는지?
만약 성리학이 그러한 점에서 부족하다면 어떤 변화가 필요했는지?

이거 질문만 나열해도 되는건지 모르겠네요... -_-;;
Valentian
09/09/2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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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크크 예전에 썼던 댓글이 기억나 다시 찾아보려는 날에 이런 좋은 글을 써주셨네요.
많은 생각으로 못난 댓글을 쓰니 같이 생각해 보아요.


1.붕당문제 - 현대의 관점에서 400여년이나 앞섰던 붕당의 원칙은 합리적인 시스템이였으나 조선 정치 하에서는-결론적으로-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였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라는 좋은 시스템 하에서 한나라당이 이러한 시스템의 취약점들을 악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쥔 자들이 그것을 악용하거나 아예 다른 시스템으로 판을 갈아 엎어버린다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유명무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 중기 가장 현명한 왕인 정조가 이러한 붕당 시스템 자체를 갈아엎으려는 노력(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대표되는 것이 학파적 성격을 띄고, 교조화가 되어버린 성리학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아예 '판'을 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성리학이 쩔게 4서를 해설한 것이라면, 아예 '주나라는 이랬다. 혹은 이러하다.'라고 말하던 6경을 공부하자! 이런 논리입니다. 아예 판을 바꾸고 나니 6경 공부에 미흡했던 권력을 쥔 자들이 당황했었죠. 이래서 독살 얘기가 나오기도 하고.. 무튼 이건 논점이 아니니. ^^ 이것으로 대표되는 것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초계문신제입니다.)을 한 것으로 보아서 조선 중기에 이미 붕당 정치는 엉망이 되었던것 사실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붕당 정치의 실태와 관련해서 일본이 당파성론을 주장한게 어찌보면 맞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_-; 씁쓸합니다.

2.중세 표기와 일제의 식민사관 얘기와 관련하여 - 저는 우리나라 역사 인식 틀에 있어서 이것보다 중요한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단순한 꼬리표놀이가 아닙니다.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30년 이후, 우리나라 해방 이후에도 소위 '친일파'들은 청산되지 않고 아직도 우리나라 정계와 재계의 한 축으로 남아있습니다 . 일본은 강점기30년간 우리에게 이런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한민족은 나라를 세울 능력조차 없는 민족이라고. 조선은 경제적 발전이 전무한 중세에 머물렀으며, 소모적인 당파싸움에 시달려서 발전을 할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근대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침략은 정당한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들의 침략 결과 조선을 발전하였다고.

식민사관이란 꼬리표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가령 일제강점기30년동안 '쌀생산량 급격히 늘었네? 어? 조선의 농업이 많이 발전했구나.' 라는 배경지식이 동원되지 않은 사실->인지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역사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이말을 언제나 합니다. 쩌는 거짓말쟁이는 언제나 100%사실만을 얘기합니다. 다만 다 얘기 안할 뿐이지.

cf)
1.고조선고립화정책이란게 무엇인가요.
2.꼬리표라는 단어를 오해했네요. 내용을 지울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냥 냅두기로 했습니다. 크크
제리와 톰
09/09/2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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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happyend님께서 정리하신 내용을 정독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놓으시고 정리에 서툴다고 표현하시면 이윤열 선수가 앞 마당 먹고 저 저그전 잘 못 해요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정리된 글 중에 제가 댓글을 단 몇 개의 글을 보니 제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옛 말에 말을 많이 하면 쓸 말 보다는 쓸모없는 말이 더 많아진다고 했는데 제 경우가 그런 듯 합니다.
어쨌든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Elminsis님// 제가 지식이 얕아서 남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할 능력은 되지 못 합니다만 Elminsis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을 곰곰히 살펴보니 주제 하나 하나가 너무 진중해서 한 번의 토론으로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혹여라도 기회가 되신다면 한 개씩 주제를 정하셔서 불판을 만들고 토론해 보시는 것이 어떠실지라는 얕은 조언을 드려 봅니다.
happyend
09/09/2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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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an님// Valentian님//
1. 일본이 주장하는 바대로 정말 조선후기가 '당파싸움만 주야장천 해댔는가?'의 문제는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 점에 관해서는 일본식민사관식 관점을 반대합니다.
조선후기 사회를 붕당시대라고 보지도 않을 뿐더러, 각 정치계파는 단지 이해집단만 다른 계파간 갈등이 아니라,사회역사,경제적 맥락을 달리하는 치열한 정치투쟁이었는데, 이런 정치투쟁은 동서고금시대막론하고 있어왔는데 굳이 조선만 더 지독했다는 시각은 시각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어찌보면 정치투쟁의 형식이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에 비해 조선이 더 선진적인 면도 있었고,그점을 역사학자들이 부각시켜내지 못하니까 맨날 붕당얘기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정파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은 성리학이라고 뭉뚱그려지지도 않고, 지지기반도 양반사대부부터 중소상공인,소농까지 다양했습니다. 좀더 사회를 역동적으로 분석해서 정파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역사관련 종사자들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후기를 농업경제사 중심으로 분석해냈던 김용섭 교수의 노력이라거나,차라리 뉴라이트계열 역사론자들의 그것처럼 생산력중심의 서술도 차라리 낫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어찌되었든 서인-노론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기나긴 독재정치기간에 다른 정파가 한일이라고는 없다고...그것은 찻잔속의 태풍과 같다고....그래서 외부에서 이식되어야 했다고....
그점에 대해서는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함으로써 오히려 이식된 현재의 문화와 강제이식된 경제관계가 가져온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정신적 실마리로...
어찌되었든 변하는 역동적 세계정세속에서 '유신' 혹은 '변법자강운동'을 스스로 이루어내기 위한 기반이 붕당정치의 붕괴로 인한 독선적 독재정치때문에 자생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점에서 임진왜란이 낳은 최대의 정치적 산물은 '비변사'인 것 같습니다. 도무지 이 시스템을 무너뜨릴 무력집단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없으니까요.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한....

2.저는 그것을 '식민사관'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동안 쌀생산량이 늘었으니 일본의 은혜다....
맞지 않나요? 쌀생산량이 늘었던 것도 사실이고, 일본의 기술과 자본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이걸 부정할 수 없죠.
단지, 그 수혜자가 누구인가,즉 정치적인 문제로 보면 달라지겠죠.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국적만 달라지면 용납되는건가요? 선진국의 기술을 도입하고,선진국의 자본을 끌어들인 뒤 한국의 국토와 세금과 인력을 합법적 절차없이 사용하여 소수 독점기업에 특혜를 주었고, 그것이 그 수혜기업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당연히 우리나라 생산력과 생산량도 증가했죠.
냉정하게 보면, 그렇습니다. 일제가 잘못한 것은 쌀의 생산력을 늘려준 것이 아니라, 그 분배구조와 생산방식의 합법성과 국민국가로서의 국민의 최대행복을 목적으로 기여하였는지 등이 정밀하게 판별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꼬리표붙이기,저로선 그래봐야 이젠 내용없는 슬로건이 되어가며 국민의 감성에 호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반대하셔도 괜찮습니다.저는 굉장히 독특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cf)고조선고립화정책은 예전 고대사편불판에서 잠시 언급했는데요,요약하면
당시 고조선은 선진국인 한나라와의 독점무역으로 성장했고, 이것에 불만을 품은 주변소국들의 무역개방압력을 받았습니다. 예군남려 20만명의 한나라 투항사건을 비롯해 한반도 주변에는 크고작은 소국들이 계속 성장해서 무역을 통한 발전을 모색중이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동맹국이라곤 하나도 없었죠. 뭐,그러면 다른 소국들은 동맹을 맺어줄 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그런거라고 볼 수 있겠죠?천만에요, 소위 한사군중 낙랑군을 제외하곤 토착세력에게 임명장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퇴출되었으니 그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죠.
낙랑군이 비교적 순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은 이들이 '무역독점권'을 풀었기 때문이죠.주변소국,특히 해상을 통한 왜,제주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무역에 나섰고,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낙랑군은 한나라의 우수한 철기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였고,한반도 여러민족은 이걸 이용해 성장했습니다.
낙랑군이 한나라 사람이라서 감정적으로 싫다고요? 뭐,어때요? 위만도 한나라사람이고, 고조선이 멸망할 때 투항한 귀족드이 낙랑군시대 귀족으로 잘먹고 잘 살았는데요.오히려 낙랑군에서 우대받은 귀족은 한나라에서 건너온 철기귀족들이었으니 한반도가 무얼 원했고,고조선이 무얼 몰랐는지 잘 보여주는 역사죠.
이런 걸 무슨 식민사관이라고 합니까? 제 견해는 그래요.물론, 저보고 식민사관이라고 한다면,어쩔 수 없지만....
뭐,그런 얘기입니다.^^
happyend
09/09/28 22:10
수정 아이콘
Elminsis님// 저역시 답변을 달자니 엄두는 안나고요,
다만 서양의 경우는 대규모 치수가 필요하지 않은 여건과 문명이 바닷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상업중심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농업국가였던 로마제국체제의 붕괴와 함께 고립된 도시간의 교역이 필요했던 점, 등등에서 동양과 다릅니다.
상업과 항해는 수학과 특별히 기하학의 발전을 유도하고요, 바로 그점에서 동양과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은 다른 길을 가는거죠.가령 레오나르도다빈치가 아무리 위대해도 과학사에 기여한 것은 갈릴레이에 비할바 아니잖아요? 니덤이라는 동양과학사학자는 동양에는 갈릴레이는 없었고,다빈치만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중앙집권적 통치는 농업(그것도 대규모 치수산업을 필요로하는 벼농사중심의 농업)국가로서는 필요불가결했고, 그때문에 일찍 실용과학이 발전했지만 모든 것은 관리의 일이다보니 순수한 학문적 욕구가 살아나지 않았고, 상업도 마찬가지,대부분은 왕실의 개인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거나 전매를 통한 국유화,상업적 이니셔티브가 생기지 않았고, 이것이 정치세력으로서 상공업계층의 형성을 막았습니다. 시민이 형성되지 못한 채 신민(백성)만이 존재하는 동양식 정치구조는 단지 우리나라가 못되먹어서 그런게 아니라 경제적 필연구조였던 것이지요.

다만 중국과 일본을 비교하여 보면,중국은 이민족에 의해 왕조가 교체됩니다.이민족-한족-이민족-한족...따라서 나름대로 개혁같은거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마지막 중앙집권국가였던 청나라도 이민족의 집권기였던 초기에는 여전히 막강하게 서양과 맞설 수 있었으나 한화되어버린 후기에는 멸망이 길을 갔죠.농업국가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국가는 중세 저열한 생산력에서는 강력한 시스템인데 효율중심의 근대문명앞에서는 경쟁이 안되었던 것이지요.

일본의 경우는 바다를 통해 서양문명을 만나기 쉬웠고, 무엇보다 각각의 영주들의 독립성이 존재,자신의 힘을 키우는데 과학,기술,상업 등을 이용할 수 있는 토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조선은 중세적생산력에서는 최적화된 시스템이었으나 근대에는 비효율적인 시스템....그러므로 그점을 높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절제된 지배계급의 통치가 세계에 있었을까요?조선의 지배계급은 정말 양반,신사입니다^^)

성리학의 문제요? 시간이 없었던 거 아닐까요? 조선이 스스로 변화하기에는....세계정세가 가만히 두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나쁘다...이런 관점이 아니라, 운이 없었다라고 평가하게 되기도 합니다.
happyend
09/09/28 22:28
수정 아이콘
Elminsis님// 성리학이 문화에 끼친 영향은 아주 많습니다.
먼저 태극기....이것이 성리학적 우주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주역...이진법 체계를 포함한 통계학 등등의 '점'문화
제사를 비롯한 조상숭배문화-이 부분은 조금 보충하자면, 북송시대가 끝나고 송나라 신유학자들은 정말 위기에 빠진 한족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부여해야 했고,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문명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문명국가인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힘만 센 야만족은 주변부 오랑캐라는 거죠.
이걸 보여줘야 하잖아요?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그래서 문명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가정의례법칙'인 '주자가례'란 걸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니라라 관혼상제 문화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많겠지만, 그냥 편하게 몇가지만 적어봤습니다.(다른 분이 도와주시겠죠,뭐^^)
Valentian
09/09/28 23:56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반박에반박에반박에반박에 즐거운 토론을 이어나가보아요.
형식을 어떻게할까 하다가 제 글의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길래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서술하겠습니다.

1. 일본이 주장하는 바대로 정말 조선후기가 '당파싸움만 주야장천 해댔는가?'의 문제는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 점에 관해서는 일본식민사관식 관점을 반대합니다.
조선후기 사회를 붕당시대라고 보지도 않을 뿐더러, 각 정치계파는 단지 이해집단만 다른 계파간 갈등이 아니라,사회역사,경제적 맥락을 달리하는 치열한 정치투쟁이었는데, 이런 정치투쟁은 동서고금시대막론하고 있어왔는데 굳이 조선만 더 지독했다는 시각은 시각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어찌보면 정치투쟁의 형식이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에 비해 조선이 더 선진적인 면도 있었고,그점을 역사학자들이 부각시켜내지 못하니까 맨날 붕당얘기만 나오는 것 같습니다.

->
가. 전 조선후기사회를 붕당의 역사로 본 적이 없습니다.
나. 마찬가지로 붕당 정치가 다른 시대의 그것보다 더 치열했다 하지 않았습니다.
다. 그게 붕당정치입니다만.. 역사적 맥락에서 좀더 서술하겠습니다. 일제 당파성론에 대항하는 의미도 있지만, 붕당정치를 정치적 의도로 악용한 대통령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 주야장천 당파싸움해서 일본한테 먹혔잖아. 니들 계속 싸우면 북한이 쳐들어와서 망한 조선꼴난다!! 무섭지? 권력내놔 크크.' 이러한 논리로 유신체제를 합리화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학자들은 명백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붕당정치를 부각했던 것입니다. ^^



조선시대 정파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은 성리학이라고 뭉뚱그려지지도 않고, 지지기반도 양반사대부부터 중소상공인,소농까지 다양했습니다. 좀더 사회를 역동적으로 분석해서 정파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역사관련 종사자들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후기를 농업경제사 중심으로 분석해냈던 김용섭 교수의 노력이라거나,차라리 뉴라이트계열 역사론자들의 그것처럼 생산력중심의 서술도 차라리 낫다고 봅니다.)
->어떤 의미의 문단인지 명확하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반박내용도 역시....부가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물론 이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어찌되었든 서인-노론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기나긴 독재정치기간에 다른 정파가 한일이라고는 없다고...그것은 찻잔속의 태풍과 같다고....그래서 외부에서 이식되어야 했다고....
그점에 대해서는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함으로써 오히려 이식된 현재의 문화와 강제이식된 경제관계가 가져온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정신적 실마리로...
어찌되었든 변하는 역동적 세계정세속에서 '유신' 혹은 '변법자강운동'을 스스로 이루어내기 위한 기반이 붕당정치의 붕괴로 인한 독선적 독재정치때문에 자생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점에서 임진왜란이 낳은 최대의 정치적 산물은 '비변사'인 것 같습니다. 도무지 이 시스템을 무너뜨릴 무력집단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없으니까요.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한....



2.저는 그것을 '식민사관'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동안 쌀생산량이 늘었으니 일본의 은혜다....
맞지 않나요? 쌀생산량이 늘었던 것도 사실이고, 일본의 기술과 자본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이걸 부정할 수 없죠.
단지, 그 수혜자가 누구인가,즉 정치적인 문제로 보면 달라지겠죠.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국적만 달라지면 용납되는건가요? 선진국의 기술을 도입하고,선진국의 자본을 끌어들인 뒤 한국의 국토와 세금과 인력을 합법적 절차없이 사용하여 소수 독점기업에 특혜를 주었고, 그것이 그 수혜기업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당연히 우리나라 생산력과 생산량도 증가했죠.
냉정하게 보면, 그렇습니다. 일제가 잘못한 것은 쌀의 생산력을 늘려준 것이 아니라, 그 분배구조와 생산방식의 합법성과 국민국가로서의 국민의 최대행복을 목적으로 기여하였는지 등이 정밀하게 판별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가. 예전에 이 내용때문에 pgr에도 실시간초호화불판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저도 해피엔드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부가 많아지다보니(결코 깊어지지 않습니다. 크크) 생각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어떤 나라던간에 중세~근대에서 경제임계점은 한순간에 빵~~~하고 터집니다. 우후죽순이란 말이 여기에 딱 어울리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후기사회는 분명히 상업사회의 맹아가 자라고 있었고 그것이 언제든 터질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일제가 짓밟아놓고서 '후후 우리때문에 성장한거야 이것들아.'라고 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실->인지의 과정이겠지요?
나.일제가 쌀 생산력을 늘려주었다는 것에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의 문장에 a.합법성 - 물론 합법적입니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는 과정이 합법적이듯이. b.국민의 최대행복~ - 자료도 구하기 힘들거니와 당시의 초기공리주의적 관점인데, 계량화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큽니다. 100여년 전 10~20대였던 80~90세의 어르신들께 '80년전 어르신이 느끼기엔 어떠셨나요?' 라고 묻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크크.



꼬리표붙이기,저로선 그래봐야 이젠 내용없는 슬로건이 되어가며 국민의 감성에 호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반대하셔도 괜찮습니다.저는 굉장히 독특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꼬리표 붙이기라는 단어를 일종의 '정형화' 나 '범주화'라고 해석합니다만, 이러한 해석에 비추어 봤을 때 문장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부가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f)고조선고립화정책은 예전 고대사편불판에서 잠시 언급했는데요,요약하면
당시 고조선은 선진국인 한나라와의 독점무역으로 성장했고, 이것에 불만을 품은 주변소국들의 무역개방압력을 받았습니다. 예군남려 20만명의 한나라 투항사건을 비롯해 한반도 주변에는 크고작은 소국들이 계속 성장해서 무역을 통한 발전을 모색중이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동맹국이라곤 하나도 없었죠. 뭐,그러면 다른 소국들은 동맹을 맺어줄 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그런거라고 볼 수 있겠죠?천만에요, 소위 한사군중 낙랑군을 제외하곤 토착세력에게 임명장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퇴출되었으니 그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죠.
낙랑군이 비교적 순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은 이들이 '무역독점권'을 풀었기 때문이죠.주변소국,특히 해상을 통한 왜,제주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무역에 나섰고,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낙랑군은 한나라의 우수한 철기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였고,한반도 여러민족은 이걸 이용해 성장했습니다.
낙랑군이 한나라 사람이라서 감정적으로 싫다고요? 뭐,어때요? 위만도 한나라사람이고, 고조선이 멸망할 때 투항한 귀족드이 낙랑군시대 귀족으로 잘먹고 잘 살았는데요.오히려 낙랑군에서 우대받은 귀족은 한나라에서 건너온 철기귀족들이었으니 한반도가 무얼 원했고,고조선이 무얼 몰랐는지 잘 보여주는 역사죠.
이런 걸 무슨 식민사관이라고 합니까? 제 견해는 그래요.물론, 저보고 식민사관이라고 한다면,어쩔 수 없지만....
뭐,그런 얘기입니다.^^
->
가.고대사 내용 잘 보았습니다. 다만 고조선 동맹이 없었던 이유를 보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
나.위에서부터 이따금씩 설의법으로 서술을 하시고, 그에 대한 제 답변을 단정지으시니 당황스럽습니다. 또한 식민사관을 계속 오역하시는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정의를 하겠습니다. 책을 찾기 시간소모가 많이되서 네이버 백과사전을 참조합니다.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 여기에 더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즐거운 토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적집단초전
09/09/2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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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서 저 한대 청류와 탁류 시절부터 당파가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아니 유럽 역사에서도 고대에 평민파와 귀족파부터 시작해서 숱한 내전을 겪었고 중세에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구교와 신교로 아주 수백년간 전쟁과 내전을 벌였었지요. 결국 이런 갈등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킨게 바로 정당제도입니다. 뼈와 살이 타는 내전에 비해 오히려 조선시대 당파싸움은 얌전한 편이었지요.

한가지 더,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유교, 그것도 성리학중 심의 국가였습니다. 물론 고문사학같은 비성리학 움직임도 있긴 했지만 양명학 마저 사문난적으로 규정할 정도로 근본적으로 성리학 국가였지요.
09/09/29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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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에 대해서 두서없이 짧게,

1. 임란 이후 선조가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보인 적대적 태도를 방계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타당하다고 보긴 곤란한 게, 즉위 당시 출신과 관련하여 취약한 정통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어도 실제 선조의 왕권은 초기부터 별다른 위태로움 없이 반석 위에 오를 수 있었단 말이죠. 중종/인종/명종 대를 지나며 앓으면서도 마무리가 지어진 바, 정도 이상의 권력을 지닌 외척이나 권신도 없었고 그나마 남은 이들이라야 당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시작한 분열 이전의 사림과 대립각을 이루었기에 왕권을 위협할만한 특기할 요소는 없었습니다. 인순왕후가 7개월만에 수렴청정을 거둔 것은 이를 잘 나타내는 단적인 예일테구요. 여기에 정권이양기에 흔히 나타날만한 시시한 역모사건, 국문 등도 없었으니 선조가 이를 갖고 콤플렉스를 느낄래야 느끼긴 힘들었을 겁니다.

1-1. 보다 타당한 설명은 임란을 거치면서 보여준 선조 자신의, 일국의 왕이라고 보기엔 민망할 정도의 무책임한 처신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요. 임란이 터지자 김성일을 탓하며 책임을 모면하기 급급했고 임란 도중에도 자신이 채택한 사안이 실패를 거듭할때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보단 해당 건의를 제기한 이에게 먼저 화살을 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도를 떠나 제 몸 보전을 위해 신의주까지 가면서도 오히려 축객령만 못한 명나라의 냉대를 받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구요. 그에 비해 광해군은 양궁이 분리된 후 스스로 적과 맞서싸우며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전란 중 위험을 감내하며 실질적인 조선의 조정 역할을 맡아했지요. 이런 점을 고려할때 선조가 광해군 느꼈던 적대감은 그가 이순신에게 느낀 위협, 부채의식과 같은 맥락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1-1-1.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면서도 만일의 경우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해 공격의 실마리를 주지 않는 세련된 방법의 정치수완은, 사실 선조가 가진 가장 탁월한 능력이 아니었나하는데요. 물론 그것이 위처럼 전시엔 위정자로서 지극히 부적절한 방식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임란 이전까진 그런대로 무리없는 국정운영을 보여주었습니다. 훈구나 외척으로 대변되던 권신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사림이 분열되어 당쟁에 이르자, 양측 사이에서 매끄럽게 줄타기를 하며 포지션을 잡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대단하단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는데, 그 절정이라면 정여립 역모사건이라 불리는 기축옥사겠지요. 세력이 팽창하던 동인을 견제하면서 그 비난의 화살은 정철과 서인에게로 돌리고 정작 자신은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기록에 언급될만한 허물을 남기지 않습니다. 점령국을 통치하기 위해 초기 가혹한 통치로 규율을 잡고 이에 대한 대중의 증오는 부하 장수에게 물어 처형했던 체자레를, 군주론에서 경탄하며 서술하던 마키아벨리가 이를 무지한 대중을 상대로 한 포퓰리즘이 아닌 정쟁 과정에서 능수능란한게 구사하던 선조를 보았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1-1-2 임란 이전의 아쉬운 점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이이의 죽음이겠지요. 시대의 과제를 제대로 직시했고 이를 수행할 실무 능력과 성리학도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춘 그는, 분명 초기엔 교격하다 배척되었으나 점차 시간이 흘러가며 선조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불교 문제로 말이 많았고 사생아적 계보와 직언을 마다않는 그 성정으로 여타 사림들과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그 위치도, 절묘한 조정능력을 지닌 선조의 후광이 있다면 정쟁거리가 되어도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순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도 탄핵여론에 의해 낙향과 실각을 거듭하는 와중이지만 이이가 제 목소리를 낼만큼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2년도 채 되지 않았고, 때문에 이이의 죽음 이후 조선은 분열되는 사림을 맞서는 선조의 수완은 방향성을 잡을 수 없었지요.

1-2. 광해군에게 없었던 것이 이런 선조의 정치수완입니다. 실무경험, 현실인식, 행정능력 모두 탁월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연산군처럼 거듭되는 옥사나 중종처럼 특정 신하에게의 권력 집중과 이후 숙청, 정도 외에 별다른 수완을 보이지 못했지요. 또한 현실인식 능력은 뛰어났을지언정 시대의 모순을 간파하고 개혁하려는 의지 역시, 경기도에 제한적으로 실시된 대동법과 대 후금정책 정도를 제외하곤 찾기 힘든 게 사실이구요.

1-2-1. 때문에 전 인조반정 없이 광해군의 집권이 계속되었다고 딱히 조선의 역사가 혁신적으로 경장/개혁 되었으리라 보진 않습니다. 후금/청의 연이은 침략이야 피할 수 있었겠지만요.

1-2-2. 인조반정은 지리하게 행해진 옥사와 권력집중/권력공백, 숙청의 굴레 속에서 쌓여진 관성이 빚은 해프닝이죠.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굴레에서 견디지 못해 정상궤도로의 복귀를 다짐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인조반정이 사전 포착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던 건 광해군이 나태해서, 혹은 보위에 신물이 나서(퇴위 후 그가 복위에 보여준 집념을 생각하면 사실 성립할 수 없는 설명이죠.)가 아니라 그저 옥사의 관성이 낳은 오보려니, 하고 생각없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정치수완으로 국정운영을 했다면 나타나지도 않았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죠.

2. 세조의 집권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여러 분들께서 워낙 적절하게 설명해주셨기에 사족 정도밖에 달게 없군요.

2-1. 우선, 세조 집권 이후 들어선 훈구들이 보여준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폐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 물론, 한명회는 분명 날건달이 맞지만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고 신숙주야 능력만 놓고 본다면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죠. 그러나 이들에게서 정도전, 혹은 비근한 예로 김종서와 같은 비전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냐하면 이는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하죠.

2-1-1. 능력있는 신하가 권력을 장악하면 사리사욕을 채우기 급급하고 이것이 갖가지 폐단으로 이어지는 건 고래를 통틀어 흔히 있는 일입니다. 뛰어난 위정자라면 그 정도를 조절하고 적절히 사용하는 동시에 그들의 사리사욕이 사회적인 폐해로 이어지지 않게 컨트롤해야할텐데요. 그 대표적인 예로 태종과 세종이 있을 것이고,

2-1-2. 그러나 세조는 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2-1-3. 태종이 진정 탁월한 점이라면 뛰어난 정치수완은 물론 실무경험과 현실인식,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비전과 행정능력을 모두 고루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정도전을 제거하고 쿠테타를 일으켰어도 딱히 비판할 구석은 없지요. 왜냐면 정도전의 이상은 태종의 손으로 하나하나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2-1-4. 허나 세조의 경우, 별다른 문제의식과 비전을 갖추지 못했고 그런 그였기에 딱히 태종처럼 공신을 숙청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 자신이 살아있을 적엔 워낙 권력이 막강했는지라 표면 아래에서 쌓이고 있던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수탈을 제외하곤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자신의 후대를 염려해서 하륜, 조영무를 제외하곤 외척과 공신의 씨를 말린 태종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죠.

2-2. 단종이 제대로 국정운영을 했겠느냐?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엘렌딜님 말처럼 조선은 재상 중심의 정치가 자리잡혀 있었고, 그것이 세조에 의해 위태위태 흔들려도(연산군처럼 뿌리채 엎어버리지 않는 한) 성종대에서 증명되듯, 나이 어린 왕이 오랫동안 용상에 있어도 큰 무리 없이 국정운영은 가능하죠. 뭐, 성종대 재상들의 도덕성이야 루크레티아님 말처럼 개차반이고 비전이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으니, 국정운영에서의 유능함을 제외하곤 기대할 부분이 없었습니다만. 아마 자기규제가 철저하며 비전과 지구력 모두 대단한 김종서같은 이라면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겠지요.

3. 조선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괜찮은 나라였습니다. 적어도 정치에 한해선,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됨을 제도적으로 완비한 국가기도 했구요. 지도층의 부패와 파벌화, 미숙한 대처, 그리고 양란이라는 수많은 악재들 속에서 그나마 버틴 건 정도전이 기본 플랫을 워낙 대단하게 잡아놨고 세종이 그것을 튼튼하고 세심하게 갈고 닦은 덕이죠.

3-1. 어느 나라든 하나의 지도 이념을 갖고 500년씩이나 버텨나가다보면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Valentian, 이적집단초전박살님의 말처럼요. 기독교라는 하나의 이념 속에서 중세 유럽이, 동구권에서 나타난 코뮤니즘이 어떠한 양태를 띄었는지 상기해보시길 바랍니다. 그에 비한다면 조선의 케이스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중세 유럽이나 동구권에서 나타난 모습만 갖고 해당 종교/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성리학 그러한 종류의 비판에 시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3-1-1. 제 자신의 짧은 역사 지식으로, 세계사 속에서 500년 이상 유지된 국가 중 군인 세력이 중심이 된 쿠테타로 국가 전복이 일어나지 않은 케이스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이것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의 모든 것을 변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조선이라는 체제의 안정성을 설명할 수는 있겠죠.

3-2.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셨듯, 조선 전기는 성리학에 찌들어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유연한 부분이 많았고, 신사임당/이이의 가정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집안내 여성의 위상 또한 조선 후기와는 천양지차였지요. 이것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임란 이후부터인데, 이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겁니다.

3-2-1.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 소학이 보급이 끝난게 대강 그즈음이었죠.

3-2-1-1. 유학하면 흔히 떠오르는 앞뒤 꽉 막히고 가부장에 찌든 무언가, 그것이 바로 소학에 기술되어있습니다. 참 엽기적인 내용 많아요. 아비가 아프니 손가락 잘라받은 피를 먹여 낫게 했다는 아들은 정도에도 못낍니다. 호랑이에게 시아버지 대신 아들을 바치는 며느리, 남편의 친구가 놀러오자 먹을 게 없어서 허벅지 살을 떼어주는 아내, 이게 다 소학이 말하는 바람직한 모습들입니다.

3-2-2. 소학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사림에서 퍼지게 되었는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김종직 전대엔 한반도에 들어왔으리라는 건 확실합니다. 이것이 조광조의 등장과 함께 중종 대에 향악의 형태로 조선 전체에 보급되기 시작하지요. 이들이 사림의 인재풀이 되었구요.

3-2-3. 그러나 적어도 선조대 까지는 소학에 찌들지 않은, 즉 교리화되지 않은 학문을 학습한 유능한 인재를 길러낼만한 인적기반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었고 그 증거로 당시에 수많은 인재들이 폭발하듯 쏟아져나옵니다.

3-2-4. 그리고, 임란이 터지죠.

3-3. 많은 분들이 아시듯, 조선 전기를 성리학에 찌들었던 때로 모사하는 건 조선 후기를 근대 사회의 맹아기로 만들려는 노력에 일환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시점에 꺼내는 건 적절하지 않은만큼 줄이겠습니다만, 그저 항해술이 좋았고 유럽의 여러 국가와 교역했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이 아니라 고려가 계속 되었다면 더 좋았을 거다, 라는 건 서구의존적 역사관의 폐해라고 밖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모든 가치를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냐, 라는 기준으로 측량해야할만큼 이 땅의 역사가 척박한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조선, 이라는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론적 시선밖엔 되지 않구요.
Elminsis
09/09/29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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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직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조선시대가 국왕/3의정/6조 ... 이런 구조로 되어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이들이 나라를 운영하는게 아니라 어떤식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예를 들면 우리나라 국회가 되겠네요.
국회에서 이것저것 토론하지만 방향을(언론법, 5대강같은...) 제시하고 예산을 부여하는데 역할을 두고
실제로 나라가 굴러가는 건 고급공무원들이 일처리를 하듯이 그 당시에도 그렇게 흘러갔을텐데
(제가 실록같은 사료들을 보지 못해서 그 당시 왕과 신하와의 회의(?)속에서 어떠한 내용이 오고 갔는지 알고 싶네요.)

예를들어 삼년상/일년상 같은 문제로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그 자체가 문제가 되기보다는(현재 국회돌아가는 모습을 봐선.. -_-;;)
그런 와중에 국정이 제대로 안되는 것이 문제일텐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런 와중에서도 실무진들은 자기일들을 하고 있었을테고
실무진들에게 어느정도 문제가 되는 사항은 올라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료를 찾아본적이 없어서)
임진왜란전에 흔히말하는 십만양병설같은 일본침략설도 의제로 나온 것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국정에 위기가 되는 사항들을 올라와서 토론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당시 조직시스템을 이끌어 나가는 수뇌부들이 어떠했는가라는 정치적인 이야기로 흘러가게 되는데 그런의미에서 조선전기때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 안좋았던 정치사들이 좀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많은 분들이 이야기 했듯이)
09/09/2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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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관계가 없느 내용이긴 한데
예전에 어떤 험한 일본인이 백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가다.
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어서요.

험한 일본인이 한 말 같아서 그냥 무시하고 싶긴 한데..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혹시 그게 뭔지 아시는 분 계시나요?
그리고 그 근거가 말이 안 되는 이유까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당신의조각들
09/09/2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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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불판이 계속되었었군요.. 방학 하기 직전이어서 과제를 마무리 하다보니 불판들을 놓친 것 같습니다.
불판글과 댓글들이 굉장히 흥미롭네요. 질문을 하고 싶지만.. 조선시대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게 없어서 패스하겠습니다.
시간이 난다면, 방학 동안에 역사 관련 책들을 좀 읽어야 할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헤헤; 감사합니다!
윤성민
09/09/2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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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저님// 1-2-1에서 광해군의 계속 집권시 병자호란 정유재란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건 굉장히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진 조선이 그에 대한 반대급부 또는 컴플렉스로 성리학에 더 절대적으로 파묻혔지 않습니까. 청나라와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면 실학과 같은 다른 학문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만큼 베타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3-3에서 서구의존적 역사관의 폐해라는 말에 그런 내용의 댓글을 달았던 사람으로서 뜨끔했습니다. ^^;; 어떻게 반박을 달까 고민해 봤습니다만, 팟저님 말대로 결과론적 시선으로 본 것이 맞네요. 그런데 쇄국 정책을 대표로 해서 그렇게 문을 꽉 닫아 버린 경우의 결과가 조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옆 동네 북한만 봐도 알듯이 비슷한 원인 결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결과론적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조선이 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학문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것에 잇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고 봅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건 현재 우리 나라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덕분에 눈이 즐거웠습니다 ^^ 위에 두 개는 궁금한 점이었습니다. .



글 읽다가 제 아이디가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내공이 턱없이 없는데 글에 실어주시고 요약까지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ㅠ)(__) 항상 해피앤드님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윤성민
09/09/2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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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minsis님// 3의정은 모르겠습니다만 6조는 각자 하는 업무가 나뉘어 잇는데 국회의원으로 보는 것보다 oo부장관 이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요?
윤성민
09/09/2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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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집단초전박살님// 그러고 보면 궁금합니다. 다른 시기에도 비슷한 정치구도가 많은데 왜 조선시대에만 붕당정치라고 이름이 지어졌을까요.
Valentian
09/09/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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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Elminsis님//
1.국가의 주요 실무를 담당하는 것은 6조의 정랑과 좌랑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판서 - 정2품 - 장관급
참판 - 종2품 - 차관급
참의 - 정3품 - 차관보급
정랑 - 정5품 - 과장급
좌랑 - 정6품 - 과장급

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신나게 들고복고싸워도 실무자들은 묵묵히 일을 했답니다.

2.예송논쟁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효종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벌이는 신권과 왕권의 미묘한 권력경쟁이였습니다(효종은 장자가 아니라 차남이였거든요). 또한 예송논쟁은 처음에는 서인이, 그리고 후에는 남인이 승리하였으나 리얼 개그인 유막사건을 계기로 경신환국이 일어났습니다. 그결과로, 최종적으로 승리했던 서인의 독주가 시작되었습니다(유막사건이란 남인이 승리하고 많은 파티가 개최되었습니다. 어느날, 파티를 준비하는데 비가 오는겁니다!! 파티에 오는 사람의 수는 많은데, 취소는 할 수 없고. 열기는 해야 겠고. 그래서 왕실창고에서 효종에게 일언반구조차없이 유막. 천막을 빌려 비를 막습니다. 이 사실은 안 숙종은 삐쳐서 남인들을 내쫓고 다시 서인들을 등용한 사건이 바로 경신환국입니다. 명목은 반역자 차단이였지만 현실은 이랬습니다. 역사 속 개그죠 크크)

윤성민님//
1.일본의 식민사관 중 당파성론(조선의 정치인들아. 니들이 맨날 쓸대없이 싸워대니 조선이 그모양이되어서 우리가 잡술 수 밖에 없지 않느냐)에 대항하여 우리나라의 한 학자가 이것은 단순한 당파싸움이 아니라 붕당정치(당파싸움이 아니라 공론을 밑바탕에 깐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이 복합된 선진적인 시스템이였거든)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조선초까지 여성의 권위가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사초를 보아도 조선 초까지는 여성의 재가가 허락되었고, 여성도 재사를 지냈으며, 상속도 적장자가 아닌 공평하게 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성의 사회진출은 허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신라에는 여왕의 존재도 있었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허가되지 않은 것이 고려부터라고 생각되는데요. 궁금합니다. ^^
이적집단초전
09/09/29 12:27
수정 아이콘
Valentian님// 여성의 권리 자체보다는 평화시기가 계속되면서 자식은 많고 재산은 부족하니 장자상속이 대세가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렇게 했음에도 계속해서 양반가의 평균재산은 줄어만 가지요. 자식을 계속 낳으니 양반자체의 자연적 숫자가 늘어났거든요.
信主SUNNY
09/09/2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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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an님// 전에 여성관련 다큐를 본 봐로는 고려때부터 여성의 사회진출이 어려웠다기보다는 상당히 고대에서부터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일찍이 남성중심으로 변했으며(조금 의도적으로) 신라의 경우도 본래 여성의 역할이 비교적 강했으나 사회진출이 쉬이 허락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왕권이 아들이 아닌 사위에게도 넘어가기도 하는 것을 보며 '여성'의 역할이 높았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딸이 아니고 그 남편인 사위(사실상의 후계자이기는 했습니다만)가 왕권을 이은 것은 그만큼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고 봅니다.

여왕의 탄생은 우선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요. 김씨, 석씨, 박씨의 유력가문들이 있던 신라에서 김씨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딸이라도 왕권을 물려주어 다른 집안에 넘어가지 않게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의 천황도 여성이었구요. 진덕여왕의 경우도 선덕여왕의 경우와 비슷하게 왕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진덕여왕이 선덕여왕의 후임으로 정해지자(반란중에서 김춘추가 자릴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미리 예정되어있었다고 봅니다.) 남성중 왕위 계승순위의 상위였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그나마 이런 경우도 신라의 경우일 뿐이며 특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딱히 이후 고려와 조선이 유독 여성의 사회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구요. 권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고대사회에서부터 여성은 사회진출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의 의미는 인구가 아닌 세금을 내는 가족단위로 개수되었고, 부재시가 아니라면 남성이 대표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구요. 그외에도 국민=군인의 의미도 있었기에(둘다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는 뜻이죠.) 여성에게는 진출의 기회가 없었달까, 필요성이 전해지지 않았달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happyend
09/09/2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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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an님// Valentian님// ㅠ.ㅠ무려 30분이나 답변을 올렸는데,로그인이 풀렸는지,'사용권한이 없습니다'라는 차가운 글과 함께...
도무지 다시 쓸 힘은 없지만 다시 힘을 내서^^.(글쓰는 동안만이라도 로그인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Valentian님의 글이 정조가 4서와 6경의 사상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당쟁시스템의 교체를 추구했으나 실패(독살설)하였고, 결국은 일본이 주장하는 바대로 당파성론이 일정부분은 옳다는 취지의 글로 요약이 되는데요,
이것에 대해 저의 반박이 (일단 정조시대에 대한 평가도 다르긴 합니다만) 당쟁사로 Valentian님이 봐서가 아니란 것을 말씀드리면 될 듯 합니다.
결국, Valentian님이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게 모르게 조선시대 후기는 당쟁사로 수렴해버리는 경향이 있고,그러면서 그 당쟁속에도 일본이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 있을거야,라거나 일본식민사관이거나, 박정희 독재정권이 이시대 역사를 과장해서 이용해먹는 것은 경계하자거나로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즉,저는 당쟁사로 본다고 비판한게 아니라,당쟁사로 보지말자고 주장한 것 뿐이죠.
저는 역사연구의 관점이 '과학문화사'입니다. 말하자면 주제탐구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요, 학자적 표현으로는 전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정치사에 대해서는 풍부한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사가 보지 못하는 진실들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바로 조선후기 사회가 그랬습니다.
영정조시대는 서양학문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대였습니다. 서울에 사는 젊은 지식인들 사회에서는 '서학관련 책을 봤느냐 아니냐'로 구분이 될만큼 일대를 풍미한 유행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젊은 사람들인 노론,소론,남인,북인을 막론하고 존재했고,그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논쟁을 벌였다면, 이황-이이의 성리학정립과정이 우리나라 성리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놨던 것과 같은 성과를 이룰 수도 있었을거라고 봅니다.바로 근대화에 대한 모색이죠.

이시대 중인문화 또한 놀라울 정도였고, 상업의 분화와 발전도 태동하고 있었던 역동적인 시대였습니다. 이것을 정치사로 표현하면 '노론독
재-영정조의 탕평정책'의 대결로만 표현하면 포괄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박지원은 노론이었지만 벽파였습니다. 그가 탕평책에 반대한 것은 정조가 원하는 군주제가 가지는 위험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군주제는 왕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것이고,그것은 그 왕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소수의 집단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쉬운 구조란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실제로 세도정치로 나타났습니다. 탕평책은 매혹적이나 위험한 정책이었습니다.그토록 왕권이 약한 상황에서는.그래서 신하간 견제가 계속 이루어지도록 하는 '붕당의 시대'를 박지원은 더 진보된 정치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성호이익-정약용 등의 성호학파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구조만이 관료사회의 병폐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분노한 정약용
은 아예 이렇게 표현하죠,"관리를 혼내는 것은 임금,임금을 바꾸는 것은 백성."
하지만, 왕에 대한 견제가 투표를 통해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이상사회는 황홀한 유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조선후기의 역사는 풍부한 자기 논리가 있었고,그것이 여러형태로 표현되었지만 일제식민사관을 가진 사람도,그걸 비판하는 사람도 이런 것을 통해 조선후기 변화의 역동성을 말하기보다는 당쟁이라는 협소한 난장판 정쟁이라고 치부해버리거나, 아니면 이덕일씨의 경우에는 정치의 일선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자들의 논쟁은 역사 저너머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긴다는 것이죠.노론독재 사관이란 논리를 끌어오기 위해서.

저는 조선의 성리학도 실패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전세계에서 이토록 풍부한 논쟁은 없었으며, 이토록 멋진 정치사상은 없었습니다.단, 생산력이 저열한 중세적 가치속에서는 말이죠.성리학에 의해 조선시대는 가장 합리적인 관리,가장 인정넘치는 지배자가 존재했던 나라가 있나요?

다만, 성리학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후기,사회의 변화와 세상의 발전에 대해 '자부심'만으로 일관하다 대처가 늦어졌다고 생각합니다.(서명응을 필두로,황윤석 등의 성리학우월주의자들의 과학은 그래서 멋지지만 슬픕니다.)

성리학의 위기는 전쟁으로 한번 찾아왔습니다만, 역시 대체 이데올로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양명학? 그것은 철학적으로는 성리학에 대응을 못하는 실용학문입니다. 그냥 실용적으로 살아보자....

두번째 위기는 바로 서학. 서학은 자기 논리체계를 갖춘 세계관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서양학문을 받아들이는 장애가 되었는데요,일본처럼 섬에서 고립된 포르투칼-네덜란드 상인들의 활동이라면 그냥 좋았을텐데, 서학은 정치의 심장부인 한양으로 직수입되어버렸거든요.

아,참....당쟁얘기였죠? 아무튼, 당시 상황은 당쟁으로 좁혀서 보는것은 절대반대!합니다.

나머진 나갔다 와서 올리겠습니다.
Valentian
09/09/29 22:44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롯데가 승리한 좋은저녁입니다 크크.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네요. 꽤오래 댓글을 달았지만 '초성체 금지. 꺼지셈.' 이라는 경고문을 보고 멍..해있었죠.
해피엔드님의 글솜씨는 꼭 국사선생님이 강의하는 듯한 내용이 영상처럼 쉽게 펼쳐지는군요. 그러나! 토론은 담론이 아니거니와 주제에 어긋나는 글을 주욱 이어나가시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종종 문장을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a."이것에 대해 저의 반박이 (일단 정조시대에 대한 평가도 다르긴 합니다만) 당쟁사로 Valentian님이 봐서가 아니란 것을 말씀드리면 될 듯 합니다. "
와 같은 문장이나
b."결국, Valentian님이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게 모르게 조선시대 후기는 당쟁사로 수렴해버리는 경향이 있고,그러면서 그 당쟁속에도 일본이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 있을거야,라거나 일본식민사관이거나, 박정희 독재정권이 이시대 역사를 과장해서 이용해먹는 것은 경계하자거나로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
와 같은 문장.

이어지는 댓글들 열심히 읽겠습니다. ^^
윤성민
09/09/30 05:48
수정 아이콘
Valentian님//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
happyend
09/09/30 09:34
수정 아이콘
Valentian님// Valentian님// 계속하겠습니다^^죄송

2.
가)
어느 시대의 어느 사회의 정의의 문제는 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해 조금도 정당성을 인정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법률은 강제적이고 때론 폭력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식입니다.그러나 법이 의미가 있는 것은 한 국가내에 지배자와 지배당하는 자간의 힘의 균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아무리 독재적인 박정희정부라고 해도, 그들이 행한 일이 일부 소수의 독점적 관료와 그에 결탁한 재벌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했다고 해도 그 결과물은 결국 국민들의 저항에 의해 재분배됩니다.
이것이 한사회를 단위로 법률이 정해지고,국가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그 국가와 법률의 폭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에 행한 일은 다릅니다. 합법을 가장했지만 일본인의 안정과 일본의 번영과 일본의 안정을 위한 법률이므로 그자체가 조선의 국민을 위한 법률이 아니므로 받아들일리 없습니다. 따라서 그 법률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고, 그들이 외국인이기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무장력에 의존해서 지배하게 됩니다.법은 이미 의미를 잃었고,초헌법적 폭력만이 남은 것이죠.

하지만 경제관계는 정의의 문제라는 눈으로 보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조선이 자신의 발전과정에 따라 언젠가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눈부시게 성장해서 전세계 자본과 당당히 맞설 수 있다,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합니다. 현실은 조선이 오지에 존재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경제관계내에 강제 편입되었던 것이지요.
또한 가령 고대 그리스의 경우도 신석기에서 직접 철기문명으로 이전합니다.철기문명은 강제주입되는 특성이 있어서 외부 정복자들에 의해 그리스의 신석기문명은 멸망합니다.(그래서 서양엔 청동기문화전통이 없다고...)
마찬가지로 세계는 제국주의 정복자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이식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경제의 주체는 인간이죠.조선경제의 주체는 조선인. 그들은 자본주의 이행에 따른 고통(어느 나라나 겪었던 )에다 제국주의의 강제수탈에 의한 고통까지 이중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늘 경제문제는 정치문제로 변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분배와 정의의 문제로, 후자의 경우는 국제관계에 의해 표현되겠지요.(이 경우도 대부분은 강제수탈의 문제보다는 그에 따른 인권의 침해나 폭력적 지배기구의 문제로 나타나겠지만요)

따라서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이것은 저로선 언제나 진실이라고 보며, 이것을 정의의 차원에서 말하라면 당연히 이렇게 말하겠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행한 일은 천인공노할 일이다"라고요.

2-나)
자, 말씀대로(제가 좀 장황하게 말한다고 해서,논점을 명확하게 해서요,-사실은 논점이 많은데 제가 하고 싶은 논제만 말하는 것이긴 합니다만...)두번째의 주제,
"즉 a.합법성 - 물론 합법적입니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는 과정이 합법적이듯이. b.국민의 최대행복~ - 자료도 구하기 힘들거니와 당시의 초초기공리주의적 관점인데, 계량화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큽니다. "
에 대한 제 의견을 다시 말씀드리면,

a.합법성은 없었다는 것을 위에 장황하게 말씀드습니다.즉 일제의 행위를 "쌀 생산량을 늘렸다"는 진실과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일본의 이익을 위해 쓰였고, 그 방식은 초헌법적이었다,따라서 일제의 행위는 제국주의의 폭력적 방식에 의한 강제수탈이었다."라는 정의의 문제로 나눠서 얘기했을 뿐이라는 것이죠.그리고 전에도 그렇게 문제를 나누자고 했을 뿐 그것이 합법적이었다는 것은 아니었죠.미디어법? 그것은 다르죠. 만일 절차적 문제가 없다고 판단된다면,그것은 합법입니다. 그게 정의와 차이가 있을지언정,어찌되었든 한국사회에선 합법입니다.그러나 일제의 강제수탈방식은 그자체가 반합법이죠,왜냐하면 말한거 또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들의 지배방식이 '초헌법적'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최대행복? 말씀대로입니다. 일제통치기구는 한국인의 이익과 한국인의 안전과 한국인의 권력의 표현이 아닙니다.이것은 충분히 수치적으로도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 증거들을 근거로 '일제청산'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제 말에 오해없으시길 바라는데요, 저는 일제강점기의 야만성의 문제를 '객관적 수치적 증거들을 토대로'접근하였으면 한다는 말이었을 뿐이죠.

오해를 없애기 위해 좀 길어졌습니다.

cf)고조선동맹의 어떤 부분에 대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빠진 느낌인지도(제 안에는 다 정리되어 있어서 그럴지도)
happyend
09/09/3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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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an님// 바로 위위의 글을 뒤늦게 봐서요,굳이 해명을 하자면요,
토론에서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는것 자체가,토론의 주제가 핀트가 안맞아서 그런 것 같네요.그러니까 결국 원론적인 말만 하게 되는거죠. 제 불찰이고요, 주제도 워낙 여러개 섞여서 그런 것 같고요.

문제의 원인을 봤더니, 저는 Valentian님의 글을
1.당쟁중심의 정치구도를 바꾸려는 정조의 노력마저 물거품이 되면서 결국은 일제 사학자의 표현대로 되어버린 점이 있다...로 읽었고요,
그래서, 그렇지 않다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첫째는 정치구도를 바꾸려는 정조의 노력자체가 그자체가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박지원과 정약용등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고요,(가령 4서체계와 6경체제로의 변화라는 것은 정치구도 개혁과는 상관도 없고, 이것을 가장 먼저 정형화된 형태로 주장한 사람은 성호이익인데요, 성호이익의 뒤를 이은 성호학파들이 당연히 왕권파이고, 반대로 6경체제를 비롯한 성리학적 체제 자체에 의문을 품은 것은 홍대용이래의 노론 북학파 일부입니다. 또한 왕권파의 이데올로기도 남인정치의 이상으로 작용했지만 북학파의 이데올로기도 정치적 지향점이 있었으나 정치보다는 문화에서 더 영향을 끼쳐서, 결국은 문체반정이라는 역풍을 맞았는데,이것도 역시 정치적 미숙함은 성호학파가 서학을 받아들이고 운용하는데 보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정조의 개혁이 아니라 사회적 개혁을 정조가 이용하려 하였으나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개혁파들의 상황으로 인해 역풍만 초래한 점이 있었던 것이고요.
초계문신?역시 정조가 친왕그룹 육성이란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은 규장각 권력으로 변질되고,혁파되어버림으로써 다른 정치기구와 다를바가 없어져버리는데요,이 모든 것이 당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정조의 노력이라기보다 왕권강화라는 목적하에 일어났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만일에 당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면 지배계층의 계급성을 바꿔야 하는데요,정조는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었고,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습니다. 좀 더 효율적인 정부, 좀 더 도덕적인 정부를 통해 효율적인 왕권통치를 목적으로 했을 뿐이죠.물론 그것의 의의를 절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거죠,양면성을 저는 다 얘기하고 싶지만, 그러다보면 논쟁은 떠 옆으로 새니까 말하지 않았던 거고,그래서 핀트는 더 어긋나고...)

둘째는 계속 말한거 또 말하고 있지만 당쟁자체는 존재했을지 모르나 그게 조선후기의 결정적 요인으로 이후 조선멸망-일제강점기 진입의 원인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조선 멸망의 원인은 세계질서의 급변속에 대응하지 못한 것뿐이고, 그원인이 당쟁이라기보다는 '필연'.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낳은 결과라고 보고요, 만일에 조선이 애초부터 유신이나 변법자강운동따위를 벌인다고 해도 불가능한-농업국가의 느린 생산력발전과 경제관계의 변화로는 절대로 서양세력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도 조선처럼 허무하게 무너지는것은 아니지않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요,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사회경제관계와 정치적 변화를 포함해서 말하자면, 사림정치의 한계라고 봅니다.성리학적 이상주의(퇴계식의 표현으로 평등하게 굶자,그리고 율곡식의 표현으로 더 노력해서 조금 덜 굶자)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것.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은 어떤 연구에 의하면 서양의 동시대 생산력보다 낮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치적으로도 이시대까지는 결코 뒤지지 않았으니 결국,낮은 생산력의 문제보다 부의 집중과 빈부격차의 확대가 조선후기 사회 민심을 동요시켰고,이로 인해 생긴 대량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분업체제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중세적 관리시스템의 문제가 결국은 일종의 '농업공황'적 형태로 나라를 빈곤에 몰아넣었다고 봅니다.
사림파의 정치는 '향촌자치조직을 통한 농업생산력향상'이라는 경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확실히 이시대의 농업생산력은 협업에 의해 증가합니다.이 힘은 수리관개시설을 포함한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경지면적을 개간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습니다.그러나 '향촌자치조직사회'의 자율성이 경직되는 그 순간, 중앙정부의 효율적 통제는 먹혀들지 못했고,이것은 과거제도를 포함한 관리선발제도의 문제와 아전을 비롯한 향리계층이 실무의 최전선에서 소위 3정의 문란을 이끌어냈던 중세적 봉사관(아전은 봉사직)등이 문제였죠.
이것이 왜 개혁되지 못했냐? 이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그것은 당쟁에 골몰하느라 그런게 아니라,이 시스템의 실질적 박해자들인 농민은 경제적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빈민은 조직될 구심체가 없었고,상인은 조직의 형성기였기 때문입니다.왜 그토록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급속히 퍼지고,농민을 중심으로 동학이 그토록 열렬하게 지지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개혁의 주체가 누구였고,실제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알 수 있습니다.
일본처럼 상층부의 유신이 없어서 우리나라가 멸망한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그거야 말로 역사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나라는 충분히 스스로를 개혁할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쟁은 단지 구시대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하자면 조금 상대적으로 한박자느릴 수밖에 없는 정치영역의 관성일 뿐이고요.

당쟁에 골몰하느라 유신이나 변법자강운동이 조선에 없었기 때문에 구한말의 비극을 낳았다고 말한다면,저는 이렇게 반대하려고 하는거죠. 조선후기의 지배자(왕을 포함한)의 어떤 정쟁도 전세계에 다 공유한 것이니 딱히 비극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고, 유신이나 변법자강운동이 상층부에서 일어나지 못한 대신에 우리나라는 동학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변화운동이 존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동학의 실패원인에 대해서는 다음 근대사편에서 다룰 수 있다면 다루면 좋을 듯 하고요.(다만,동학농민전쟁이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한 실질적 노력의 첫번째 위대한 행보였다고 생각합니다,위의 논리를 근거로)

그리고 몇몇 제 글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여기시는 부분은 그냥 무시하셔도 될 듯 합니다.

(써 놓고보니 핀트가 또 안맞는듯도 하네요^^;;;)
Valentian
09/10/01 11:08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흥미로운 내용 잘 읽었습니다.

우선 붕당과 관련해서, 저또한 당쟁으로 인해서 조선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내용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오해하셨는지는 확실친 않아도 아마 박정희 대통령의 논리를 저의 논리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는 붕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한 것 또한 저도 동의하였습니다..(어떤 부분에서 오해하신건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읽어도 그렇게 쓴 내용은 없고, 또한 다시한번 가.를 통해서 언급드렸는데. ^^) 이시기의 흐름은 당쟁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미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노론이 전성기를 맞아서 일당독재가 판을 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죠.

정조에 대한 평가가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내용은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그 시대에 정조가 했던 최선의 노력에 대한 평가는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전 남인등용+6경 강독으로의 등등 변화을 통한 왕권강화시도는 당쟁의 '판'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고 여깁니다. 노론의 세력이 워낙 전성기였기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말았으나. 예를 들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과 같은 '가능성'조차 평가절하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아닌 성공을 하였다면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죠.


위에서 언급된 합법성 문제에 대한 것은 오해에 오해를 불렀네요. 첫번째, Valentian님이(^^) 해피엔드님의 문장을 오해했습니다. 두번째, 첫번째에서 오해가 불러오니 두번째에서 오해가 나오는게 당연한거겠죠. 다만, '일제강점기동안 쌀생산량이 늘었으니 일본의 은혜다.... 맞지 않나요?' 라는 문장은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명백히 틀린 것입니다. 이것을 두가지의 구분으로 나눠서 해석하는 것은 법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도 장황하게 말하겠습니다. 일제의 쌀 관련 정책에 관한 농민의 피해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토지조사사업(소유권 지주에게+소작인의 경작권 폐기)과 이후의 산미증식계획이 연타석으로 홈런을 칩니다. 홈런을 맞은 롯데는..이 아니라 일반 대다수의 농민들은 몰락을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쌀생산량이 증가한 것이 일본의 은혜라는 해석에 분개한 것입니다. 해피엔드님께서도 말하듯이, 조선후기사회는 색다른변화가 줄줄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중 하나로 근대상업사회의 맹아를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조선후기사회 스스로도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일본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만 해피엔드님의 "그 분배구조와 생산방식의 합법성과 국민국가로서의 국민의 최대행복을 목적으로 기여하였는지 등이 정밀하게 판별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문장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맞다고 여기니 더이상 할말이 필요없겠죠.

근현대사 부분은 제가 미흡한 부분이라 좋은글 올려주시리라 믿으며 잘 읽겠습니다. ^^
그리고 질문
1.고대사 부분 - 지드래곤의 컨트롤C컨트롤V신공을 이용해서 해피엔드님의 글을 그대로 복사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동맹국이라곤 하나도 없었죠. 뭐,그러면 다른 소국들은 동맹을 맺어줄 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그런거라고 볼 수 있겠죠?천만에요, 소위 한사군중 낙랑군을 제외하곤 토착세력에게 임명장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퇴출되었으니 그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죠." 이 부분에 관련해서, 그당시 고조선의 동맹국이 없었다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다시 읽어보셔도 다 쓰신것같다면 어쩔수없는거죠. 흐흐

2.역시나 지드래곤신공. "그러나 '향촌자치조직사회'의 자율성이 경직되는 그 순간, 중앙정부의 효율적 통제는 먹혀들지 못했고,이것은 과거제도를 포함한 관리선발제도의 문제 등이 문제였죠. " 이 부분은 제가 모르는 내용이라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그것보다 고마운게 없겠죠. 정확하게는, 조선 후기에 향촌자치조직사회의 자율성이 경직화 된다는 말의 의미. 그리고 관리선발제도의 문제의 의미. 를 말합니다.
happyend
09/10/0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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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an님// 답변이 늦었습니다.(여러가지 사정상)
고조선의 동맹국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묻는 것인가요? 아, 그것은
1,고조선이 순망치한을 미리 염려해서 주변 동맹국을 육성하여 방패막이로 삼지 못한 전략적 선택의 문제(이것은 상업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일지도 모르겠습니다.그리스 도시국가나 가야와 주변 해안소국들의 경우처럼,강대국이 사방에 포진해 있어도 스스로 고립되어 버리는 것이-이점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므로,더 논지를 펼치지 않겠습니다.)
2.주변 소국들의 '고조선 고립화정책'의 희생양...이 쪽에 무게를 두고 말씀드린 것입니다.고조선이 멸망을 바라는 세력들이 너무 많았고, 이점이 한나라의 한심한 공격에도 스스로 무너지게 했던 이유죠.
3,주변소국들의 군사적 상황?...이것에 대해서는 고구려국(고구려의 모태가 되는 5개의 소국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이 이미 연나라 망명제철귀족들을 통해서 무기 자립화에 성공하고 있었죠.고조선이 제철독점권을 쥐고 있었고,고구려는 북방의 혼란속에서 스스로 살아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으니까요.고조선의 변방에 존재했던 고구려국들은 이미 서기 200년전부터 독립적인 소국으로 분화되어갔고,이들중 강성한 소국들이 점차 주변 소국들을 통합해가고 있었으니, 만일에 고조선의 중심부(평양의 위씨 왕가)에서 이들과의 전략적 동맹관계를 일찍부터 형성했다면, 역사는 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 않나? 이런 뜻입니다.

2.조선후기 향촌자치조직사회의 자율성이 경직
-이것이 숙종-영조-정조대 왕권강화과정에서 '산림'의 무력화로 인해 나타난 소위 '탕평책의 그림자'입니다.
산림의 존재는 유럽의 교황과 같아서 일사분란한 조직으로서의 장점도 있습니다. 도덕적 권력이니까요. 법률이 미비하거나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해 대부분의 민형사적 충돌(특별히 민사적 충돌)이 향촌자치조직의 여론에 좌우되었던 조선후기 산림의 붕괴는 도덕적 구심을 제거함으로써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이란 나라를 뿌리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산림이 무력화되면서 중앙의 '공론정치'가 사실상 폐지되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요,(영조)이에 따라 노론들이 권력유지장치였던 '여론'이란 무기가 사라지면서, 왕이 공론을 주도해나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정조)
그러나, 반대로 중앙집권은 강력하지 못했고, 조선의 중앙집권적 권력기구는 파견직 수령들에 의존해야 했고,따라서 그들의 능력에 좌우될 수 밖에 없게 된거죠.조선을 받치던 두개의 기둥중 하나인 산림체계가 무너지면서.
수령들의 경우는 이전 댓글에도 말씀드렸듯이 행정실무능력이 제로에 가까웠고, 따라서 향촌을 다스리려면 실무면에서는 아전들에 의존해야 하고, 마을의 공론을 이끌어내려면 향촌자치조직에 의존해야 합니다. 전자는 아전들에 의해 '삼정의 문란'이 자행되도록 놔두며 조선사회의 근간을 뿌리 채 뒤흔들어놓게 했고, 후자의 경우는 '서원,유향소,사당,사우'등등으로 결집한 양반세력들-이들의 경우도 급속한 계급분화속에서 힘의 쏠림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대부분은 3가지 세금의무의 면제소로 전락하였고,그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유지에 기생하게 됩니다-과 결탁하여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린 향촌자치조직사회에 대한 간섭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중앙집권기능이 마비되게 합니다.
더이상 향촌자치조직은 피가 돌지 않는 딱딱한 권력으로 변질한 것입니다.

관리선발제도의 의미는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중국에서도 이미 첫 과거시행국가였던 당나라말기에 이미 과거를 통한 관리선발제도의 문제점은 드러났습니다.그러나 동양적 전통에서 다른 어떤 대안이 없었던 것이지요.

관리는 행정적 기능과 향촌사회의 견제기능을 동시에 가져야 했습니다.그런데 행정적 기능을 위해서는 전문학교가 필요했지만 과거시험제도의 소과 대과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성균관의 존재자체가 코메디화하고 있었죠.성균관에서 '법률'강의보다 '도덕과 윤리'강의가 더 많았으니까요.'사서'는 법률을 해체하여 법윤리과목으로 치환한 것이고,육경은 분서갱유의 논란속에 사로잡혀 '역사'강의만 남았을 뿐 대부분은 치열한 사건현장이나 분화하는 사회속에서 발생하는 민법적 다툼의 해결과는 전혀 무관한 강의였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자세히 밝혔습니다.자신이 왜 지금으로 보면 관리지침서,행동규율이랄 수 있는 목민심서를 지었고, 왜 흠흠신서와 경세유표를 지어야 했는지...)

영정조시대의 그림자는 그래서 짙고 어둡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적어도 농민들에게는....(영정조시대의 시대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상이고요,더 토론을 하고 싶다면 쪽지로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럼,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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