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S모대학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퍼온 글 입니다.
불펌의 의도는 없으며, 단지 글의 내용을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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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려웠습니다. 아니,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눈비비며 일어나 티비 리모컨을 찾고, 인터넷 아이콘을 눌러 포털사이트를 들어갔던 모든 이들의 심경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를 지지했거나 그를 반대했거나, 그를 사랑했거나, 그를 증오했거나,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그것도 투신에 의한 서거 소식을 들으며 모든이들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피어올랐던 감정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고, 그 죽음의 수단이 더욱더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도 당연합니다. 투신이라는 낱말이 전직 대통령, 그것도 평생 비주류의 길만 걸어온 그의 인생 앞에 가당키나 한 단어일까요. 하지만 정말로 그는 투신하여 30m 밑, 자신의 집앞에 놓여진 바위 앞에서 향년 63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거두었습니다. 지금 이순간,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당황스럽고, 낯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안타까워 하는 사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좌절하고 안타까워하고, 울음을 멈출 줄 모릅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전경버스들에게 에워쌈을 당하면서까지 피어오르는 향불의 연기가, 봉하마을에서 울려퍼졌던 수천명의 울음소리가. 인터넷을 지배하는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들이 이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전 까지만 하더라도, 그 동정과 연민의 감정은 그를 향해 뻗어있지는 않았습니다. 검찰에서 흘러나오는 억대 시계에 대한 행방을 가지고 봉하마을에 가면 주울 수 있다는 농담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졌고,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대통령이 되고, 5년동안 국가를 운영해왔던 '원동력'이 바로 그 '도덕성' 이었다는 점에서 사태는 심각했습니다. 사상 세번째의 전직대통령 소환조사를 앞두면서 그는 국민들에게 더이상 자신은 여태까지 자신이 대표해 온 가치들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버리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한 인물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알리는 슬픈 징소리였지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한 인물의 죽음앞에서 쉽사리 교정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걸까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을 버리라고' 말했던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앞에 일어나는 추모와 애도의 물결은 쉽사리 설명될 수 있는 그러니까 한 개인에 대한 인정에 의해 일어나는 추모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를 버렸습니다. 대선에서 버렸고, 총선에서 버렸습니다. 그의 도덕성이 지하로 추락해 내려갔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해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끈' 마저도 사정없이 잘라냈습니다. 그랬던 우리들이 지금 왜 그를 추모하고 있는건가요. 단순히 한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죽은자에 대한 선한 의지로? 현직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실망감이 변환되어서? 이 이유들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그를 향해 내고 있는 그 목소리들의 모든 원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의 죽음으로 촉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별명은 '바보'였습니다. 지역주의, 기득권타파, 족벌언론과의 싸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꺼려하는 '전깃줄위의 참새' 신세를 그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불의라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히 나서서 싸워나갔고, 부조리한 것들은 과감히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대통령이 되기전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미련했고, 그래서 언제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보였고, 우리는 그에게 힘을 몰아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통령이 되었지요.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5년동안 그는 무던히도(?) 국민들 속을 썩여댔습니다. 대통령 직을 걸고 내기를 벌였고, 탄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뜬금없는 대연정 제안과 한미FTA같은 지지자들을 속터지게 만드는 정책들도 계속 추진했지요. 여기서 그것들에 대한 호불호나 개인적인 평가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이유'들이 그가 대통령이 되어간 기간동안 차츰 '퇴색되어 보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를 바보라고 불렀고, 고졸 출신의 별 볼일 없었던 낙선의원, 인권변호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의'의 가치를 우리가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 정의롭고 올곧은 자들이 떳떳한 나라. 이 당연한 명제를 그는 실천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를 믿었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는 '그'가 있었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워 차마 밖으로 내밀지 못하던, 양심, 정의의 가치가 그때 '그'를 만나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만 시도로 끝나고자 했을 때,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의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때, 그 가치를 이야기하던 '그'에 대한 비난은 피할 수 없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결국 정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실망하고 그를 버렸던 것은 우리안의 '그'가 더이상 '양심, 정의, 신념'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치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현 정권의 무능이, 현 정권의 독선이 그 가치의 부활을 알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의 퇴임 이후, 우리는 우리안에 죽어버린 '그'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숨어있던 것 뿐이었다고 말입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꺼내어 다시 실천할 동력과 의지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촛불 이후 우리는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생명의 단절'에 의한 슬픔 뿐만이 아니라. 더이상 일구어 낼 수 없는 우리 내부의 '그'를 위해 추모하고 있다고 봐야하는 건 아닌걸까요. 우리안의 '그' 이름으로 상징되었던, 그가 우리에게 더이상 자신의 이름이 그 가치로 대표될 수 없다고 하였던 그 가치들을 현실화 시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추모였던 건 아닐까요. 다시, 그의 이름이 그런 가치의 상징이 되었기에, 우리는 그를 추모하는 건 아닐까요.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그의 죽음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몇달간 검찰의 언론플레이와 언론들의 경마장식 중계는 그를 사지로 내몰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을 빼앗아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버리라고' 한 것도 그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의 죽음이 비극적으로 끝났을 때, 양심, 정의, 신념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시 '그'를 마음속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심과 정의, 그리고 신념과 동의어로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그 자신을 버리라 충고했지만, 그가 정작 버려진 이후. 우리는 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이제 노무현이 있으니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