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비아는 어떤 동네인가?
이탈리아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와 리비아는 개전 당시 이탈리아령이었습니다.
이 나라를 이렇게 지도를 펼치고 보면 마름모 형태의 비교적 큰 나라입니다만
정작 실제적으로는 해변에 위치한 트리폴리 ~ 토브룩으로 이어지는 도시들이 그나마 이동할 수 있는 도로가 있었고
그 외의 영토는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이건 현재도 그렇습니다. 리비아 내륙은 석유매장지이긴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가만히 잘 유지하고 있는 자국의 영토를 더욱 넓히고자 하는 야욕으로
리비아에 대규모 군대를 보낸 것은 1편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대규모 군대가 와서 본 것이라고는, 끝없는 사막, 계속 몰아치는 모래폭풍, 사막기후 특유의 일교차,
자원이고 뭐고 아무것도 건질게 없는 황량한 대지, 모든 것을 항구에서 보급받아야 하는 아무것도 없는 땅 그 자체였던 겁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의 주요 지도. 처음에는 리비아는 이탈리아 / 이집트는 영국령이었습니다. 처.음.에.는)
[2] 진격! 이탈리아군!
결국 두체의 독촉 내지는, 직위해제가 두려운 그라치아니 원수의 명령으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이집트로 진격합니다.
이 때의 이탈리아군의 규모는 10개사단 총 병력 25만명. 방어자인 영국은 3만 6천명. 더군다나 영국병력은 현지인 내지는 식민지군이 다수 섞인 혼성군이었습니다. 보병 전력만 해도 거의 7배 가량 차이가 나는데다가, 다른 전력도 이탈리아가 꿇릴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영국은 한창 독일에게 얻어맞는 중이라 지원조차 빵빵하게 주는게 불가능했습니다.
어찌보면 무솔리니는 영리하게도, 영국이 신경을 쏟을 틈이 없는 이 때 이집트를 치는게 유리할거라고 판단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리한 전력, 유리한 개전 시기. 이탈리아군은 그렇게 질 수 없는 조건으로 이집트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개전 9월 13일. 그리고 개전 사흘 뒤인 9월 16일에 이탈리아는 시디 바라니를 점령합니다. (지도에서 찾아보세요~)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그대로 시디 바라니에서 돈좌되어 버립니다.
이 알 수 없는 이탈리아군의 행보는 무솔리니도 당황시켰지만, 맞수인 영국군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웨이벌 대장과 오코너 중장이 이끄는 영국군은 전력의 열세를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이탈리아군을 이집트 안으로 끌어들인 뒤,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이탈리아군이 한계를 느꼈을 즈음에 반격을 하고자 했고, 이탈리아군의 순조로운 진격은 영국의 작전이었습니다.
다만, 저렇게나 빠르게 이탈리아군이 주저앉아버릴 줄은 몰랐던거죠.
이는 이탈리아군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막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 바로 보급입니다. 어떠한 물자도 자체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사막에서, 양측의 군대는 오로지 본국에서 오는 해상수송에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지만 규모가 훨씬 큰 이탈리아군이 필요한 물자도 훨씬 많았습니다.
여기에 아직도 구태의연한 보급방식과, 몰타섬을 두고 영국과 이탈리아의 격전, 지중해에서 어슬렁거리는 영해군의 존재 때문에 이탈리아의 보급은 고작 바다 건너임에도 불구하고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사령관인 그라치아니 원수가 영국군을 두려워했습니다.
무능함으로 현대에 유명해지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군 원수가 자국의 군대가 어떤 꼬라지인지 아주 몰랐을리는 없습니다.
가라고 해서 오긴 왔지만, 그라치아니는 영국군을 시원하게 밀어내고 이기리라는 기대 자체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어떻게든 영국 본토에서 결말이 나겠지~ 정도의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요.
시디 바라니를 점령한 이탈리아군은 시디 바라니 남쪽으로 진지들을 편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이탈리아군이 시디 바라니에서 더 나아갈 마음이 없다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이탈리아군이 사막전에 무지했음을 나타냅니다.
허허벌판인 사막에서는 진지편성 만으로는 도저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우회할 기동로도 많고, 방어해야 할 구역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퍼질러앉아 버린 이탈리아군의 방어태세를 살펴보던 웨이벌 대장은 매의 눈으로 이탈리아군의 허점을 찾아냅니다.
시디 바라니 남쪽에 니베이와, 빌 라비아 진지 사이에 20km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찾아낸 것이죠.
영국군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틈새를 돌파해서 시디 바라니 서쪽의 부크부크 (역시 지도에 있지요?)를 타격하여 이탈리아군의
후방을 어지럽히고 보급을 방해해서 '괴롭히겠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에는 컴퍼스라는 이름이 붙어졌는데요. 처음에 이 작전에 할당된 시간은 단 5일이었습니다. 본격적인 반격이 아니라 소규모 습격이었으니 이 정도의 시한만으로 충분했다 여긴 것이죠.
그리고.......
1940년 12월 9일. 영국군의 반격인 컴퍼스 작전이 시작됩니다.
다음화에서 컴퍼스 작전으로 넘어가지요.
ps. 컴퍼스 작전의 날짜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탈리아군은 3일만에 시디 바라니에 도착해놓고 거기서 3개월동안 퍼질러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