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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5/06/17 20:02:58 |
Name |
황금동불장갑 |
File #1 |
KakaoTalk_20150617_195953355.jpg (97.6 KB), Download : 74 |
Subject |
[일반] 약국단상#4 덕후와 함께 사자성어를 배워보자. |
멀리서 중동에서 넘어온 반갑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놈 때문인가..
메르스로 인해 거리는, 아주 그냥 내 정수리 마냥 휑하니 비어있고...
약국에서 손님을 받아야하는 내 마음 역시 로스팅을 과하게 한 아메리카노 마냥 씁쓸한 그런 날이었다.
한적한 토요일 오후, 귀에 거슬리게 윙윙대는 모기 한 쌍을 전자 모기채로 튀기면서,
나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아마도)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저 곤충 두 마리를
잔인하게 튀겨버릴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고민하며 잠시 감상에 잠겨있을 무렵이었다.
"끼이익-"
반가운 소리.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경첩들이 반가운듯 부대끼며 신음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학수고대 [鶴首苦待]
"저어-기...약국 안에 프라모델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아, 이런!! 손님은 아니구나...
실망감이 뇌를 거쳐 가슴으로 파고들 새도 없이 그의 범상치 않은 옷차림이 먼저 내 망막에 맺힌다.
대한민국 국민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고등학교 시절 복고와 빈티지의 상징인 삼선 슬리퍼.
6월 작렬하는 태양 아래이긴 하지만, 해수욕장도 개장하지 않은 이 때, 패션 얼리어답터만이 소화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흰색 백양 러닝,
패션 고자인 나로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메이커, 가격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재가
1938년 듀폰사의 월리스 흄 캐러더스가 발명한 폴리아미드 재질의 가늘고 긴 실, 아마도 나이론이라고 불리던, 그런 트레이닝 반바지를 골반에 반쯤 걸치고
그 귀인은 유유자적히 약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우주세기에 대해 아십니까?"
기초적인 질문이다. 섣불리 대답했다간 내 지식의 얕음을 파악하고 나를 업신 여길지 몰라.
그저 그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염화미소 [拈華微笑]
그 순간 그는 부처님이었고, 나는 그의 제자 마하가섭이었다.
더이상의 질문이 필요치 않았다.
문답무용 [問答無用]
"약국에 PG 는 없습니까?"
나의 덕력을 한 질문으로 파악하려는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이 어수선한 곳에 그러한 물건이 있을 순 없지요. 프라탑 안에 세 개, 데톨프 안에 두 개 있습니다.
"약사 분께서는 상당히 게으르시군요. 그걸..어찌.... 그렇게...."
내 대답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고수다. 프라탑이 무엇인지, 데톨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그의 덕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공격을 날린다.
"PG 스트라잌 건담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게 현재 반다이 PG 기술의 정수이지요...사출 기술이 이전에 비해 진일보하여..."
앗차!! 어리둥절한 내 표정이 읽혔나보다. 전투력을 측정하다 터져버린 프리더의 스카우터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고,
그는 말을 잇다가 약간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을 멈춘다.
내가 졌다. 반다이의 기술력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어.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에게 검은 봉지 하나를 내민다.
"오다가다 봤는데, 건프라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기부를 하려고 합니다. 집이 좁아 전시할 공간이 없네요. 좋은 곳에 써 주십시오."
건프라가 그만큼 많다는 뜻인지, 집이 그만큼 좁다는 뜻인지, 자랑인지, 한탄인지의 경계에서 나는 갈피를 못잡는 길잃은 어린양 마냥 헤메고 있었다.
검은 봉지에서 꺼낸 건담은 반짝한 금맥기와 코팅된 검은 색이 잘 어우러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마츠미나 군요..."
"아껴주십시오."
한마디를 남기고 그가 돌아서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도색은.. 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대갈일성(大喝一聲)
됐다. 역전이야.
"먹선은 펜으로 넣으셨네요, 튀어나온 부분없이 정성스레 잘 넣으셨습니다. 그려."
마무리다. 패널라인 에나멜도 쓰지 않는 상대에게 무시당할 뻔 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럴.. 수... 약국에 도색품은 보이지 않는데? 도색을 하시나요?"
대경실색(大驚失色)
적지않게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약간의 경외감이...랄까??
"외장을 보지 말고 프레임을 보셨어야죠. 하긴 도색품은 대부분 집에 있긴 하죠. 어린 개구장이 손님들 때문에.. 하핫!!"
당황한 기부자께서 자리를 뜨시고 9회말 투아웃에 일어난 대역전극에 한껏 들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두 개의 시선이 느껴진다.
약국 직원 선생님과 토요일이면 바쁜 나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달려오는 알바생의 시선, 바로 그것이었다.
덕후 간의 치열한 수싸움에서 벗어나, 어느덧 발가벗겨진 채 현실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그저 어색히 웃으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져볼 뿐이었다.
"그래도 제가 오타쿠 같아 보이진 않죠??"
입꼬리가 [ㅡ] 자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요지부동 [搖之不動]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답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불립문자 [不立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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