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꼬꼬마였던 궁민..아니 초등학교 다닐때 정확히 몇 학년이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3학년? 4학년쯤 있었던 일이다.
매주 토요일 3교시에 한번씩 H.R 시간이 있었다.
H.R...흔히들 학급회의 라고 하는데 이 시간에 하는 일은 한주간의 전달사항이라든가
건의사항이라든가 다음주 우유당번은 누구이며 뭐 주번은 누구고 대략 삼사십분동안 정해진 형식에 맞춰서
반장,부반장,총무,서기 등등이 칠판에 내용을 적으며 그럴듯하게 회의하는 뭐 그런거다.
참고로 난 해태우유를 먹고 자랐다.
근데 궁민..아니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진짜 별거 없다.
맨날 그 내용이 그 내용...그래도 평상시에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이 웬지 그 시간만큼은 크게 시끄럽지 않았던걸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언수행을 하며 반 아이들에게 강렬한 레이저빔을 쏴주셨기 떄문이랄까.
회의 순서는 대충 뭐 한주간의 목표를 설정하고 뭐 반성할 이야기나 이야기거리 있으면 이야기하고...
뭐 소풍이나 행사가 있는 날은 뭘 할지 이야기해보고 또 뭐했더라 하도 오래전..아니 그렇게 얼마 되지 않았지만
늙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항상 학급회의 마지막 부분은 뭐 건의사항 있으면 손들고 말하는 그런거였다.
뭐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건의사항 한두개는 꼭 있어야 되는데 뭔가 거창하진 않지만
그래도 반 아이들에게 전달이 필요할만한 그렇고 그런 잡다구리한 예를 들자면...
'요즘 교실 뒤쪽에 쓰레기가 많은데 쓰레기를 잘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회시간에 늦게 나오는 애들이 있는데 일찍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각 하는 친구들이 좀 있던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충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
그럼 서기가 칠판 구석에 건의사항 이라고 쓰고
'쓰레기 버리지 말자.' '조회시간 늦지말자.' '지각하지말자'
짧은 문장으로 적어둬서 한주동안 칠판 구석에 남기는거다.
그리고 다음주에 새로운 건의사항 들어오면 전 주에 적었던건 지워지고 새로운거 쓰고...
참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고 딱딱하고 이제 열살 열한살 어린애들이 회의한답시고 뭐 대단한 의견이 나오겠냐만은 난 학급회의 시간이 꽤 좋았던걸로 기억한다. 어린이들이지만 우리도 웬지 티비 드라마에 나오는 양복 뺴입은 아저씨들처럼 뭔가 진지한척 회의하는 모양새가 웬지 기분을 으쓱 하게 만들어주는 뭐 그런 기분이 있었다.
특히 학급회의를 진행하던 반장,부반장의 어울리지 않는 까슬까슬한 존댓말과 그것을 경청하고 있는 [50명]의 무리들을 보면서 웬지 기분이 묘했다.
학년이 시작되고 얼마지나지 않았던가?
뭐 여느때처럼 평범한 학급회의 시간이였다.
건의사항 시간에 여러명이 손을 들고 발표했다.
원래 학급 회의 시간에 가장 인기 있는게 바로 이 시간이다.
다른 안건이나 주제때는 사실 별로 할말 도 없고 반장,부반장의 전달사항에 가까우며 또 괜히 나섰다가 눈치보이기도 좋은데..
웬지 이 시간만큼은 얌전히 있던 아이들도 한두마디씩 끼어들기 딱 좋은 시간이다.
건의 내용도 간단해서 풀기 좋고 어린이들이 아무리 회의시간이라지만 한시간씩 입다물고 있기가 여간 지루한게 아니며
자기 이름으로 뭔가 건의사항 하나 올라가게 되면 웬지 기분이 씩 좋아지는 뭐 그런게 있었던거 같다.
하여튼 애나 어른이나...이름 올라가는거 좋아한다. 본능인가?
건의사항 2~3개 발표하고 그 중 한가지를 투표해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건의사항이 채택되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의견에 별 무리만 없다면 자기가 건의한 내용 한가지 정도는 한주동안 칠판에 적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날 건의사항 시간에 내가 손을 들고 발표했다.
'요즘 수업시간에 많이들 떠드는거 같은데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기는 내 의견을 칠판에 적었다. '조용히 하자.'
그리고 기타등등 의견이 나왔고 조용히 하자 말고 다른 건의사항이 채택되서 한 주 동안 칠판에 적혔다.
다음주 학급회의 시간 이였다.
역시 건의사항때 나는 똑같은 내용을 안건에 올렸다.
이번에도 금주의 건의사항에 채택되는데 실패했다. 아니 날개 잃은 천사는 5주동안 골든컵도 먹고 그러던데...
골든컵이 뭐냐면 가요톱텐이라고..아 그게 아니라 그냥 2주연속 내 의견이 올라가지 않으니 좀 시무룩해졌다.
다음주가 되었다.
나는 건의사항때 또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말을 좀 부드럽게 해볼까.
'수업시간에 소란스러워서 수업에 집중이 안되는데 다들 조금만 덜 떠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서기는 내 의견을 다섯글자로 요약했다.
'떠들지말자.'
아니 그게 음..내 말의 요지는 아..그래 음...뭐 그런거긴한데...
하지만 난 그때 발표할때 반장을 보지말고 선생님의 미간에 좀 더 집중했었어야 되지 않았나 작은 반성을 해본다..
역시 내 의견은 또 떨어졌고 난 국회의원 3선 낙마한 사람마냥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하는 주전자라도 주워서 어디 바그다드 같은데 떨어지면...
현재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상한 마법사와 하하하 웃기만하는 거인들과 투닥투닥 대며 지금 현재의 시간을 엄청 그리워하고 있을텐데...
친구들은 진짜 평화로운 수업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나?
난 이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으면 웬지 말하는 주전자와 함꼐 돈데..뭐시기를 외치고 과거로 떠나면서
리키처럼 현세로 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또 외로워했을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엄마 아빠 백구가 없는 과거로 가기 싫다.
샬랄라 공주는 보고싶지만...
다음주가 되었다.
건의사항 시간에 또 손을 들었다.
내가 손을 들자마자 순간적으로 반 아이들의 '아....'하는 탄식 아니 감탄사가 들렸던것도 같았다.
환청이겠지. 그리고 난 묵묵히 지난주에 했던 말을 또 다시 반복했다.
서기는 다시 표정 변화 없이 내 말을 '조용히 하자' 로 적어냈다.
아 저게..아 그래 조용히 하자는건 맞는데 좀 더 뭐랄까 내가 말하고 싶었던건...
좀 더 학급의 평화와 정돈된 면학 분위기와 아...됐다.
내 의견은 다시한번 떨어지고 다른 친구 건의 사항이 올라갔다.
다음주가 되었다.
난 또 손을 들었다.
내 의견은 또 떨어졌다.
언제 뉴스를 봤는데 머리에 빨간띠를 두르고 역앞에 모여서 소리를 지르던 아저씨들이 생각났다.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저 아저씨들이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안들어줘서 저렇게 단체로 모여서 말하는것이라고 했던거 같다.
티비에서 그 아저씨들을 볼떄마다 웬지 어떤 마음인지 알거 같았다.
나는 그 다음주에도 손을 들었고 그 다음주에도 손을 들었다
야유섞인 반 아이들의 반응을 들으면서 초조했던 처음의 모습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난 떠들지말자, 조용히 하자라는 안건을 발표할때 이제는 약간의 웃음을 띄며 편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게 될 수 있었다.
인생 공수레 공수거지 뭐 근데 이게 어울리는 표현인가?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던 이제 학급회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여름날이였다.
난 건의사항 발표할때 가장 먼저 손을 들었고 차분하게 두달 가까이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대사들을 좔좔좔 읊어댔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도 그냥 재 또 저런다 식으로 살짝 눈치만 줬을뿐 이제는 별 반응도 없었던거 같다.
내가 발표를 하고 자리에 앉고 또 다른 추가 건의사항을 받고...
그 건의사항과 투표를 해서 난 또 다음 주를 기다리면 됐는데...
이럴수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반장이 다시한번 확인했다.
'더 추가할 건의사항 없으십니까?'
아이들은 고요했고 그렇게 칠판 귀퉁이 조그맣게 금주의 건의사항이 적히게 되었다.
'떠들지 말자'
아이들은 그 주에도 열심히 수업시간에 떠들었고 별로 달라진건 없었다.
생각은 잘 안나지만 아마 나도 신나게 떠들었겠지 뭐...
참 별거 아닌 추억인데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웬지 학급회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그땐 잘 몰랐는데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서 그때 왜 그랬는지 알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내가 그때부터 눈치가 좀 없는 놈이였구나...
10살짜리 애들한테 수업시간에 조용히 하라는게 말이 되나?
애들인데? 한반에 50명씩 있던 궁민..아니 초등학교 시절인데?
사람 사는 곳은 원래 복작복작하고 시끄러운게 오히려 정상인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왜 그렇게 눈치코치없이 야유까지 들어가면서 끝끝내 손 들고 두달동안 데모 놀이를 했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용히 하자라는 말을 꺼냈는지..
그냥 몇 십년동안 아무 생각 없겠거니 하고 칠판에 내가 쓴 의견도 좀 적히고 나중에는 오기도 생기고 그래서 그런거겠거니 했는데...
이 글을 주르르륵 적고 나니 뭔가 떠오르는게 있다.
반에 날 괴롭히던 머스마가 하나 있었는데 난 그놈이 싫었다. 또 떠들기는 어찌나 떠들던지...
근데 힘으로는 안되니 내 딴에는 머리를 굴린답시고 그랬던게 아닌가 싶다.
그래 너 인마. 조용히 좀 하라고...
이십년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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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사이사이에 조용히 하자라고 열심히 외친적이 있었죠. 효과는 몇초 안갔습니다만...
단체 체벌이 그렇게 싫었는데, 내가 백날 조용해도 다른애들이 떠든다는 이유로 반 전원이 맞는 그림이
호랑이 담임에 의해 계속 반복되다보니 어떻게든 그걸 피하고 싶어서 내성적인 제가 열심히 외쳤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도 안먹혀요 그런건... 눈앞에 호랑이가 없으면. 창문너머에 있다는걸 깨닫기라도 하지 않으면...
소시적에 반장부반장 했던 기억으로는 글쓴님과 친구들이 그래도 나름 생산적인 HR을 했네요. 초등학교 6년 동안 HR이든 전교 어린이회의든 나오는 건의사항이라고는 '공부를 열심히 하자. 청소를 열심히 하자' 정도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나마도 맨날 발표하는 몇몇 모범생들이 겨우겨우 쥐어짜내야 나오는 의견들... 나머지 아이들은 회의따위가 뭥미, 죄다 아오안이었죠.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