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25가 일어날 때 3살 아기였다.
전쟁통에 마을에 있는 땅굴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신다.
그 이후로 삶은 다른 전후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반에 70명이 되는 학생들과 같이 초등학교를 보내셨고, 당시 초등학교 졸업식은 곧 사회로 나가는 것을 뜻했다.
아버지 말씀을 빌리자면 '목숨을 부지한 것과 사회로 나가야 될 상황' 때문에 졸업식은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초졸이다.
초졸의 아버지는 노름하시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14살 가장이 되셨고, 아래로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둘을 키웠다.
14살 가장이 되어 가장 처음 얻으신 일은 아마도 나뭇꾼일 거다. 나무를 베어다가 가져오면 장에 내다 판다.
새벽 4시면 세수를 하시고 나무를 베러 나가신다. 중간중간 참을 드시고 16시간 일을 하셨다고 한다.
저녁 8시까지 나무를 베어오셨고, 노름하시는 할아버지는 노름돈도 없고, 술값도 없기에 소를 끌고 나무를 팔러 나가신다.
그렇게 아버지의 노력으로 집안의 돈은 조금씩 쌓여갔고, 라디오, TV 그리고 여러 비싼 농기계도 사셨다.
그렇게 이젠 농기계도 빌려주면서 돈을 받고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이 났다.
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5살쯤 되었을 무렵, 가스불을 가지고 장난치다 집에 불이 났고,
집을 빙 둘러서 마른 장작을 둘러두었던 우리집은 활활 불탔다.
아버지는 그때 맨발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셨었고, 집에 돌아왔을 땐 신을 신발조차 없었다.
모든게 불탔고, 아버지는 3일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고, 잠도 오지않았고, 죽을거 같았다고 하셨다.
14살 부터 수년간 매일 일해오셨던 모든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는 어찌보면 심심하다.
아버지는 서울로 가셔서 공장에서 일을 하시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무책임하게 사셨고,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와 함께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가 버는 돈의 대부분을 고향으로 보냈지만,
저축하라고 준돈, 옷입히라고 준돈, 먹이라고 보낸 돈 모두 한 푼도 남지 않고 다 쓰여진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가 보내준 돈으론 턱없이 모잘러."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버지의 동생들은 그래도 제대로 살게 되었다.
야학을 하면서 일하고 공부해서 학교를 나가서 기술로, 먹고 살게 되었다.
아버지의 동생들은 평범한 어른이 되었고, 집도 꾸리고 잘 살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잘 사셨다.
워낙 손기술이 좋으셨고, 고생을 많이 해보셨기에 공장을 나와 목수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30대 초반 나이에 대목이 되어 인부 200명을 관리하셨다. 초졸이라 건축학을 아시진 모르지만,
공사장에서 목수로 30년 동안 일을 하시면서 아버지의 자녀 4명 역시 잘 키우셨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집은 가난하다.
가끔 생각해본다. 우리 아버지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여전히 가난한걸까.
부자가 된 사람들은 무엇을 했길래 부자가 된 것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이제는 작아진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