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하면 할수록, 오늘 친구들에게 뭐하냐고 물어보면 볼수록 더 비참해진다. 어떻게 된 게 오늘 여자를 안 만나는 자식들이 하나도 없는 걸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런 좋은 날씨에 집 안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만큼 우울한 일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떡한다.”
그래서 다짜고짜 홀로 나와 버렸다. 어디를 갈지 누구를 만날지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우울을 만끽하기 싫어서, 나를 반듯하게 비추는 거울들이 싫어서 뛰쳐나와 버렸을 뿐이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마땅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닌 낙동강 오리알.
“하아.”
봄볕은 정말이지 따뜻하고 좋지만, 그래서 나를 더 한숨 쉬게 하고 우울하게 한다.
어차피 갈 곳도 없는데 혼자 추억 팔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3년 동안 다녔던 고등학교로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천천히 걸어도 20분도 채 안 걸린다. 모교를 가는 길에는 듬성듬성 벚꽃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면 따로 벚꽃 놀이를 갈 필요 없이 등굣길이 벚꽃 놀이였겠구나 싶다. 하, 어차피 여자 친구 따위 사귀어 본적도 없지만.
기다란 벚꽃 터널을 지나고 나면 딱딱한 교문이 곧 바로 날 맞이한다. 과거에는 참 갑갑하고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 같았던 교문이 이제 보니 참 작고 그립게 느껴졌다. 교문 너머 운동장에서는 주말을 맞아 조기 축구회의 경기가 치러지고 있었다.
“이거 들어가도 되나?”
생각해보니 집에서 이렇게 모교가 가까운데 딱히 다시 찾아와 본적도 없었다. 하긴 내게 고등학교 내내 딱히 좋은 추억이라 할 만한 게 있었던가? 남들 다 하는 연애질 한 번 못해보고 닭장 안의 닭처럼 밤 어수룩까지 야자를 일과처럼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그런 닭장이 조금은 그리워져 멈칫한 발걸음을 떼었다.
벌써 졸업한 지 오 년차인데 학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뭔가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감회가 들었다. 약간의 감격과 우울함이 동시에 차올랐다.
슬쩍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학년마다 썼던 교실을 더듬거리며 찾아갔다. 그러다 문득 2학년 3반의 교실에서 멈춰 섰다. 그나마 내 고등학교 기억 중에서 가장 좋은 기억이 바로 이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수영.
그래 그 아이의 이름은 한수영이었다. 그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 고등학교 최고의 ‘아이돌’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하얄 수 있을까 싶었던 피부에 커다랗고 맑은 눈. 교복으로도 확 태나던 여성스러운 옷맵시.
하지만 단순히 그녀가 예쁘기만 해서 아이돌소리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축제 때 마다 보여주던 춤, 노래, 연주 등의 다양한 끼야 말로 그녀를 진정한 학교의 아이돌로 만들었다.
그런 그녀와 잠시나마 같은 반에서 짝꿍까지 하게 된 고2는 싫어 하려해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녀가 주변 아이들에게 더 인기 있었던 이유는 나같이 크게 존재감 없던 녀석들에게도 다정하게 잘 대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녕 석현아? 하고 인사해주던 그녀의 목소리와 웃는 표정이 아른거린다.
“피식.”
스스로 생각해도 참 찌질하고 지지리 궁상이지만, 그녀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무렵 이 학교의 모든 남학생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물론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거나 학교 이외에서의 만남을 갔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티도 안나는 짝사랑.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딱히 아쉽거나 슬프진 않았었다.
그녀는 단지 좋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등학교 일 년을 설레게 만들어줬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나 따위가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사람을 좋아했다니. 스스로 상상해도 둘이 이뤄지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저어.. 저기..”
궁상맞게 창 너머 교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 톡톡 건드렸다. 일요일 이 시간에 대체 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혹시 이 학교 다니지 않았어요?”
고개를 돌려 어깨를 두드린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헉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분명 시간이 지나 예전의 풋풋하던 여고생의 얼굴은 아니지만, 이제는 성숙미까지 더해져 더 예뻐진 것 같은 얼굴. 아련한 고2때의 동경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던 우리 학교의 아이돌. 나이에 따라 얼굴은 조금 달라졌지만, 나는 그녀가 분명히 한수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몰래 힐끔 훔쳐보던 얼굴이었으니까.
“아.. 네.”
뭔가 내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숨이 차오르고 당황해버려서 인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대답마저 똑바로 하지 못하고 웅얼웅얼 얼버무린다.
“혹시 너 석현이야?”
그녀는 혹시란 말과 함께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은 질끈 감겼다. 정말 최악, 최악이다. 설마 나를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묘하게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최악의 좌절감이 엄습해왔다.
고등학교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내 비참하고 비루한 꼴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최소한 옷이라도 똑바로 입는 건데.
“어? 어어...”
병신 머저리 같은 새끼. 이럴 땐 말이라도 좀 눈이라도 제대로 마주보고 당당하게 말하란 말이다.
“와! 반갑다. 어떻게 여기서 딱 만나지? 혹시 나 기억나?”
“어? 어어. 한수영.”
당연히 난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우리와 같은 학년의 아이들 중 너를 기억못하는 애는 없을 걸?
“와 대박이다. 벌써 오년 전인데 기억하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박수를 탁 쳤다. 그런 그녀의 눈을 나는 더욱 마주할 수가 없어 자꾸만 시선을 내리깐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
“어? 아.. 그래.”
결국 그녀를 똑바로 마주볼 용기가 나질 않아 내 할 말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빠르게 걷던 걸음은 어느새 비참한 뜀박질로 변해있었다.
병신. 구석현. 넌 정말 머저리 병신이다. 찌질이도 이런 상 찌질이가 있냐.
미친 듯이 차오르는 자괴감을 털어 내듯 달리고 걷다보니 어느새 시내였다. 시내 한 복판 벤치에 앉아 다시금 사색에 잠긴다. 한참을 그렇게 괴로움에 몸부림 치고 있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하아아.”
긴 한숨을 토해보지만 가슴의 갑갑함은 단 일도 줄어들지 않는다.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턴다. 병신 짓을 할 거면 차라리 집에 가서 하는 게 낫겠지.
“하하. 내가 역시 제대로 본 게 맞군.”
그때였다. 한껏 멋스러운 차림에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내가 내게 말을 건 것은.
“헉헉. 사장님 좀 같이.... 후아... 가요.”
사내에 이어 정말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자가 옆으로 다가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뀌고 싶으시죠?” “네?”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네?”
아마 이 사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면 헛소리로 치부하고 그냥 무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와 맞물려 이 멋진 사내가 하는 말은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허허, 거참. 말 귀가 어두우시네. 달라지고 싶은 거 아닙니까? 고객님?”
사내는 어느새 기다란 망원경을 꺼내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가까이 있는 물체를 보는데 망원경은 필요 없다. 그러나 그 망원경이 나에겐 지금 현미경처럼 느껴진다. 지금 이 남자는 내 안을 꿰뚫어 보고 있다.
이 정체모를 잡상인 같은 남자의 말이 왜인지 모르게 나를 울컥하게 만들고, 믿고 싶게끔 만들어 크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