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은 술을 마실 수 없다. 원래는 술을 부어라마셔라 하던 녀석이지만 위에 구멍이 뚫리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할 정도가 되고 나서야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즐기지 않을 뿐이다. 술은 마실 수 있다. 주량은 그리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니지만, 주량을 넘어서도 술을 마신 것 가지고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을 의지는 있다. 하지만 나는, 술을 찾아서 마시기 싫어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과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호프집에서 만났다. 뭔가 부조리하다.
“이 집 닭이 그렇게 맛있다고.”
“닭 먹으러 호프집에 오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다.”
“과연 그럴까?”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벨을 눌렀다.
“여기 치킨 한 마리하고 콜라 두 병 주세요.”
“다른 건 안 필요하시고요?”
“일단 먹어보고요.”
주문 받는 사람의 표정은 아무래도 남자 둘이 앉아 술도 안 시키다니 별꼴이야. 하는 것 같았다.
“You sir. 그거 자격지심이야”
그 녀석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 말로 번역할 때의 뉘앙스가 ‘너님’쯤 되는 – 하지만 실제 의미는 인터넷의 그 말과 많이 다른 것 같다 – ‘You sir’라는 말, 그 말을 유독 나를 부를 때에만 인칭대명사처럼 쓰는 그 녀석이 마치 독심술이라도 쓴 양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뭐야. 내 머릿속이라도 읽은 거냐.”
“그런 건 안 읽어도 눈에 다 보여.”
그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벨을 눌러 누군가를 불렀다.
“아가씨, 여기 소주잔 하나.”
“네~~”
술도 안 먹는데 소주잔을 가져다 달라는 건 그 녀석의 버릇이다. 한때 그 녀석과 나는 치킨에 어떤 술이 어울리느냐를 놓고 술자리에 갈 때마다 논쟁을 벌였고 그 녀석은 치킨에 소주를 외치는 소수파였다. 결국 두 번 다시 술을 마실 수 없게 된 뒤에도 그 녀석은 무슨 자리만 생기면, 자기 앞에 소주잔을 달라고 했다. 특히 닭이 있는 자리에서는 매 번.
‘뭐. 개인의 취향이려니……’
뜨끈한 치킨이 나왔다. 목이 두 개도 아니었고 다리가 세 개도 아니었으며 날개가 한 개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을 것은 다 있는 치킨. 취향은 여기에서도 너무나 확연히 갈린다.
“You Sir. 지금도 다리엔 손도 안 대?”
“다리가 싫은 게 아니라, 가슴살 다 먹으면 이미 다리는 다 없어져 있을 뿐이다.”
“그 말은 토씨와 쉼표 하나도 안 틀리고 되풀이하네.”
치킨들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뼈가 쌓여갈 때쯤. 또 하나의 닭다리를 입에 넣더니 신기하게 살점 하나 안 남기고 발라먹은 그 녀석은 대뜸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젠 뭐 해서 먹고 살려고. You sir?”
“모르겠다.”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You sir.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나도 이번엔 전혀 대비를 할 재간이 없었거든…… 좀 막막하다.”
“이건 뭐…… 회사에서 사업 접는다면서 FA가 되었다고 할 땐 언제고…… 고작 몇 주 만에 이렇게 망가진 거야?”
“이미 망가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사실 차려 입고 나온 행색만 봐도 답은 뻔했다. 면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모자 푹 눌러쓰고 나온 나. 깨끗하게 셔츠 다려 입고 머리까지 뺀질뺀질하게 손질하고 나온 그 녀석. 개인의 취향이긴 한데 누가 멀쩡한 사람이고 누가 망가진 사람인지는 뻔하지 않나. 열에 아홉은 내가 아닌 그 녀석을 고를 게 뻔했다.
“망가졌다고 말하지 마. You sir나 나나 다 같이 2군에서 평타 찍는 수준이야. 무슨 말이 그래?”
“또 그 이야기냐. 너는 2군에서 2할 8푼 치는 타자. 나는 2군에서 방어율 3, 4점대 오가는 땜빵 투수. 같은 2군끼리 조금 잘 나가 보이고 말고가 뭐 어떻다는 이야기냐. 그 이야기??”
“우와. 기억력 하나는 녹슬지 않았네. You sir.”
두 조각 남은 치킨 중 한 조각을 덥썩 물어 뜯더니 그 녀석은 나에게 말했다.
“그런 좋은 머리 썩히면서,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죽을 상 짓지 마. You sir.”
“별것도 아닌 거……??”
“3, 4점대 방어율이면 어때. 저기 지금 나오는 투수 함 봐봐. 방어율 8점대?? 패전처리지만 시합엔 나오잖아.”
눈을 들어 TV를 보니 마침 야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그 녀석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도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도 아니었고, 그저 한 팀이 아주 비오는 날에 먼지 날릴 정도로 탈탈 털리고 있는 일방적인 경기에서 방어율이 거의 9점대에 가까운 한 투수가 마치 도살장에 올라가는 소처럼 마운드에 오르고 있었다.
“잘 들어, You sir. 방어율이 3점대 4점대 수준이면, 그건 조금 불편한 거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그렇지만……”
“그렇지만……??”
“공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를 쓰려고 하는 곳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어.”
주위의 공기가 아주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2군에서 2할 8푼 치는 타자'의 한방이 이렇게 매서울 줄이야.
“You sir. 공을 던지라고.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와서 공을 던질 생각 안 하는데 누가 써주겠어?”
그 녀석은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고, 나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하나 남은 치킨에 손을 뻗었다. 반쯤 감긴 눈이 번쩍 뜨이는 듯 했다. 마치 크림빵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가 손에 크림이 묻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빵을 먹었을 때처럼. 나는 그 치킨을 뼈가 씹히는지 살이 씹히는지 모를 정도로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아무 것도 없는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벨을 눌렀다.
“여기 치킨 한 마리 추가요.”
“You sir. 제정신이야?? 벌써 세 마리째 추가 주문하는 거라고.”
“공 던질 기운이 생기려면 먹어야 할 거 아냐.”
“……단순하기는. 누가 공돌이 출신 아니랄까봐……”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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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다 잘 될 거에요
세상만사 다 나한테 비정한 것 같아도 자신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늦더라도 의미있는 한 방을 날릴 수 있습니다
김제동 씨가 취준생들한테 항상 하는 말 중에 자존감(또는 자기애)을 잃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한테 필요한 말이지만 xian님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