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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3 20:58
다르게 보면 혼자 진지하게 사색하는 시간이 대단히 많이 줄어들은거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본인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이 피곤하게 짜맞혀진 일정대로 살아가야 하는거 같아요..
15/03/13 21:00
이렇게 곤잘로 이과인을 까시다니 크크크크
옛날에는 주어 생략에 불친절하게 글 쓰다가 요즘은 일때문에 하나하나 설명하고 하나하나 알려줘가면서 글을 써서 괴롭습니다. 아버지가 출근해서 돈을 버시고, 치킨집에서 돈을 쓰셔서 치킨을 사오시고, 집에서 치킨을 드시고 주무셨다하면 되는건데 아버지가 회사에서 돈을 버시고, 아버지가 상점에서 돈을 쓰시고, 아버지가 치킨집에서 치킨을 사오시고, 아버지가 집에서 치킨을 드시고 아버지가 집에서 주무셨다라고 글을 쓰려니...환장할 노릇이군요 크크크
15/03/13 21:06
문해가 뭔가 싶었네요. 특정집단 안에서 통용되는 배경지식을 문외한에게도 상식으로 강요하는 문화는 일종의 권력으로 작용하며, 때로는 그것이 눈물을 금치 못할 비극이 되기도 한다는 말씀으로 읽었는데요. 사실 글 내용은 길고 어려워서 머리에 잘 안 들어오고, 눈에 띄는 건 파우스트 살 돈이 무려 치킨을 2번 먹을 수 있는 금액이라눈 것.. ㅠㅠ
15/03/13 21:21
흥미롭네요. 요게 제일 명징하게 드러나는 게 영화 평론이라는 장르 같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저는 요새 "현학적"이라는 표현 자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정성이 훼손될 여지가 아주 많은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15/03/13 21:27
따라서 저는 이과 지식도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파이선을 쓰니까 PHP를 쓰는 사람들보다 위대합니다.
15/03/13 21:41
글쓰기의 경제성이라는 것이 삶의 복잡성에 응대하는 방식이라면 적소에 적재로 선용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글쓰기의 복잡성의 일부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 방법지상주의의 자만을 간과하다보면 반드시 폐혜가 있을테지요. 이것을 혹자는 글쓰기에 대한 일종의 [과학지상주의]라 칭하는 모양입니다만, 단순 명료한 글이 복잡하고 다양해져 가는 세계를 왜곡없이 드러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석학이나 문학, 상대주의, 다원주의, 감수성, 구체성과 일상성 등등 우리가 글에서 발견해야 될 것은 다층의 다양한 의미들이고 저는 그런 글을 독해하는 능력이 공부의 첫번째 능력이라 생각하는 편입니다.
15/03/13 23:06
동의합니다. 글이 복잡해지고 난해해지는 건 세계도 복잡해지기 때문이지, 필자들이 단순히 독자를 괴롭히고싶어서는 아니겠지요... 엄...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으아으....
근데 어려워지는 것이 필수적이 되는만큼 또 한편으로는 독자층이 점점 좁아진다는 페널티도 감수해야겠죠. 아무리 독해능력을 키워도 결국 모든 난해한 텍스트를 읽기에는 한계가 생기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어디까지 글이 복잡해져야 할까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지도의 축척이 1:1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글도 세계의 복잡성을 어느 정도 감축시켜야 할 텐데, 그렇다고 너무 단순하면 읽기는 좋지만 충분히 세계반영이 되질 않고, 너무 복잡하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고...
15/03/13 23:20
저는 단순히 글이 어렵다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커다란 착각이 텍스트에 얼마만큼의 권위를 부여하느냐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말로,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흔히 독자들이 어렵다, 난해하다 느끼는 대목이고 컨텍스트의 역동적 교차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대중성이겠지요. 텍스트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에 저도 일말 반발심을 느끼지만 반면, 컨텍스트의 복수성을 인정하는 것도 꼭 갖추어야할 덕목이지요. 이런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과 대조를 역동적으로 드러내는 글이 일반적으로 잘된 글에 속하는 것일테구요. 그러므로 이차저작의 성공여부는 이러한 패턴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텍스트를 무조건 어려운것, 케케묵은 것, 구태의연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일테지요. 돈보스꼬님 이과생인지 몰랐네요. 저도 이과대를 졸업하긴 했는데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삿된 공부가 취미입니다만... 흐흐흐
15/03/14 21:14
지난번에 올려주신 게시물을 통해서 그리 알고 있었는데 저 아래 덧글을 보고 착각했나봐요.
수학책은 몸에 해롭습니다. 끊는게 당연합니다. 흐흐흐
15/03/13 21:54
권위를 위해 높은 문해력을 요구하는 글쓰기를 하는 경우가 정말 저열하다고 느낍니다. 오히려 명망있는 저자의 어려운 글일 수록 어떻게든 독자가 이해시키기 위해 그 어려운 내용을 보다 쉽게 쓰려고 애를 쓰는 흔적이 꽤나 보이거든요.(그런데도 어렵다는 게 함정)
그럼 권위를 위해 높은 문해력을 강제하는 글이 어디서 많이 보이냐면, 대게의 의사과학 이야기들이 그러하고, 그런 요소를 차용한 글들이 그렇습니다. 이유야 간단하죠. 틀린 소리, 헛소리를 하는데 어떻게든 있어보여야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옳은 소리, 진실된 소리는 같은 내용이라면 얼마든지 쉽게 쓸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럴 줄 아는 것도 글쓰기의 실력이 아닐까 합니다.
15/03/13 22:23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투와 어휘 사용, 형식을 통해 미적 감흥을 전하려는 문학의 경우 읽는 상대의 문해력을 감안해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진 않죠. 물론 헤밍웨이가 있습니다만, 고작 읽기 쉽다는 이유로 헤밍웨이가 포크너보다 명망 있는 작가라고 말한다면 아마 헤밍웨이 자신이 무덤에서 웃을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는, 언급한 헤밍웨이나 카버같은 이들조차, 자기가 말하려는 바를 쉽게 이해시키려는 목적 이전에 자신의 글이 아름답길 바라는 이유에서 글을 씁니다. 같은 층위에 놓고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네요. 단지 이들이 매료된 방향에 그 '간단한 어휘'와 '명료한 문장'이 있는 것이고, 이게 하필 '읽기 쉽다'란 성질과 상통하는 것일 뿐이죠 . 문학가는 가독성을 통해 상대의 이해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를 느낀 상대가 제 발로 설득되고 이해로 목마르길 원하지요. 이때 '아름다움'을 흔히 뭉뚱그려 문학성이라 합니다. 진실된 소리를 말씀하시니, 관련하여 오스카 와일드의 한 문장을 첨부하며 참견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와일드의 이름이 모두의 진리를 단언할 순 없을지언정, 문학의 일리 정돈 담보할 수 있을 겁니다.
[the truth is rarely pure and never simple.]
15/03/13 22:56
주제 자체가 모호하고 어렵거나, 미적가치를 추구하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부분이죠. 예로 들자면 비꼬는 유머의 경우 복잡하게 꼬을수록 재미가 커지니까요. 문학이라면 쉬운 것 보다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니 명료함이라는 차선적 가치를 우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말씀대로 그들은 권위를 위해 복잡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니 오히려 그때의 복잡성은 칭송해야 마땅하죠.
하지만 그런 미적인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거나 설명이 목적인 경우라면 쉽고 간단명료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에 관해서는 오스카가 말하는 진실과 제가 생각하는 진실의 의미가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진실함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시인이셨던 저의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글쓰기가 어렵거나, 결과물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이 진실한 것인지 돌아봐라. 진실한 글은 어떤 경우라도 결국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힘이 있다."
15/03/13 23:05
헌데, 아마 공부하면서 느끼셨겠지만, 인문학의 경우 일정 시점을 넘어가면 진리과 심미 사이가 모호해지기 마련이라서요. 모르시겠다면 쿤이 포퍼를 어떤 식으로 부정했는지 떠올려보시지요. 무엇이 과학이냐를 결정하는 건 문제가 되는 이론이 얼마나 관련 학도들의 구미를 당기느냐/그렇지 않느냐(실제론 과학과 관련해 재밌는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느냐 그렇지 않느냐라고 했었죠, 아마...)라고 했죠. 같은 맥락의 이야깁니다. 아니, 되려 인문학에서 보다 심하게 나타날테죠. 때문에 헤겔이 일부러, 의식적으로 글을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주술 호응을 맞추지 않는 문법의 파괴를 통해 논제의 근거를 모호하게 흐뜨러뜨리는 적반하장의 논리'로 쓴 것이구요(뭐 맑스가 언급한 법철학에서야 이 비판이 실제로도 타당하긴 합니다만...).
15/03/13 23:24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정도 수준의 학식이 없어서;;; 말씀하신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에 있어서는 [진(眞)⊂선(善)⊂미(美)]의 관계에 대한 개인적 믿음이 있습니다.(상당히 고전적이긴 합니다만;;) 진리를 포함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내부에서 일어나건, 외부에서 들추어내건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하고요. 때때로 이를 농락하는 듯한 천재성을 다양한 예술장르에서 발견하기도 하지만, 자신에 한해서는 아직까지 이 관계를 뛰어넘는 결과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글은 언제나 똥망이 되더라고요. 그 모호함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 말씀하신 떡밥론과 헤겔의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려주신다면 더욱 좋겠고요.
15/03/13 23:36
제가 쓴 댓글을 다시 곰곰이 읽어보니, 님께서 지시하는 바를 모르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우려로 포장한 까탈을 부린 게 아닌지 되묻게 되는군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며, 공감과 존중의 의미로 말씀하신 맥락에 부합할 글토막 둘을 덧붙입니다. 제가 직접 쓰는 것보다 여러모로 나을 거 같아서요. 첫번째는 조중걸이 책을 집필하며 출판사에게 보냈다는 편지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과학은 삶에 대해 말하고 신앙은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철학은 삶과 죽음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지요. 철학이 무미건조한 전문가들의 학술적 문제에 그쳐서 안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삶과 죽음에 대해 지극히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철학적 전문용어를 매우 전투적으로 배열해서 쏘아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덧없는 현학일 뿐입니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빌어 밥벌이를 하지만 막상 철학을 죽이는 것은 그들입니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합니다만 그 이전에 이미 인문학자가 죽었고 인문적 정신이 소멸한 것입니다.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철학적 정신은 현학과 전문성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해명에의 요구, 세계의 전체성과 자신의 인식적 역량에 대한 이해에의 요구 가운데 자리 잡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삶의 전체성에 대한 이해에의 열의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허한 수사가 아닙니다. 인류는 이러한 노력 하에 스스로의 가장 높은 가치를 실현해 왔습니다.” 두번째는 김영민이 자신의 책 <공부론>에서 따왔습니다. 한국 인문학계의 병폐를 언급하며 비판하고 있지요. “내가 수없이 많은 학술행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자탄하는 것은 우리 문사들의 세계에서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만남의 현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냉혹한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와 달리, 문사들은 '(나쁜) 모방적 상호성의 메커니즘(R. 지라르) 속에서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물론 칼과 펜의 이치 사이에 놓인 어떤 심연을 모른 체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말(어휘)'로 행복해지는 세상(R. 로티)'은 커녕 각자의 실력조차 제대로 점검할 수 없는 문사들의 제도화된 학술행사와 그 곤경을 더불어 성찰하려는 것이다.”
15/03/13 23:42
절대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글들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이 부분은 정말 촌철살인이네요;;;
15/03/13 23:47
아래 검은책님께서 에디파라는 필명을 쓰시던 시절 피지알에도 전문...은 아니고 일부 생략하고 올리기도 했습니다.
https://ppt21.com../?b=8&n=55545 궁금하면 읽어보시고, 흥미를 느낀다면 김영민의 다른 책 역시 읽어보세요. 말씀하는 부분 관련해 굳이 추천 도서를 특정한다면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입니다. 절판되었지만 대학 도서관 정도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15/03/13 23:43
말 그대로 모호함입니다. 실마리를 추적하여 진리를 향하다보면 무엇이 진리의 파편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쯤에선 자신의 직관에 호소하는 무언가에게 그저 기대게 되는데 이게 심미성인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 그리고 사실 이를 두고 '해당 학자가 그저 헷갈린 것이다'라고 단언키에는 그만한 성취를 이룬 이도 없으니 다들 침묵하거나, 후학이 소리내어 비판하고 그게 유효하게 통용된다한들, 이조차 해당 비판이 지닌 타당성 때문인지 단지 학계 인사에게 흥미를 (앞서 이야기한 심미성과 같은 맥락입니다.) 자극해서인지(그도 아니면 애초에 타당성과 흥미로움이 같은 것인지...라는 게, 좀 단순화하자면, 토마스 쿤의 입장입니다.) 말하기 난감하거든요. 이걸 헤겔의 저서와 이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읽다보면 아주 잘 느낄 수 있구요. 단, 님께서 헤겔을 읽고 온전히 매혹될 때 이야기긴 합니다.
(물론 전 단지 위대한 석학들이 남긴 말씀을 더듬으며 어렴풋 상을 그려봤을 뿐이구요. 지금처럼 말하는 게 실은 굉장히 주제넘은 짓입니다. 자꾸 토마스 쿤을 팔아대는 건 이 부끄러움을 면피하기 위함이구요.)
15/03/14 00:01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부분은 헤겔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었군요(난독까지 했었네요;;).
다시 설명해주신 노력 감사합니다.
15/03/13 22:34
전문성의 깊이와 멋을 살리면서도 독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글은 분명 드물지만 이 두 가지 미덕이 상극 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독자를 조롱하듯 정체성과 무능력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글에서 더욱 모독을 느끼니까요. 자신의 무능력을 독자의 무능력으로 치환하고 이것을 미화하는 짓이야말로 경계해야 하겠죠. 좋은 독자라면 쉬운 글만 골라읽으며 자위하기보다는 틀린 소리, 헛소리를 구별해내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어야겠지요.
15/03/13 23:01
제 생각은 전문성과 쉬움이 여집합의 관계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의 교집합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그 교집합을 이루기 어려운 부분도 있긴 합니다. 위의 팟저님이 말씀하신 문학성 같은 면이 그러하죠.
좋은 독자의 자세에 대해서는 적극 공감합니다. 말씀하신 것에 더하면 저자나 높은문해수준의 권위에 쉬이 넘어가지 않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5/03/13 23:31
높은 문해 수준의 권위에 넘어가는 독자보다 쉬운 글만 찾아읽는 독자를 겨냥해 되도않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군요.
높은 문해 수준의 책이 잘 팔리고 그것을 독해하기 위해 머리털 뽑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라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15/03/13 23:47
하긴 어려운 책을 읽어보고 있다고 하면 '오오 쩌는데' 소리보다 '그걸 니가 왜 읽음?' 소리를 더 많이 듣긴 했죠;;; 제 생각은 어쩌다 있을지도 모를 일에 대한 기우 정도로 봐주셨음 합니다.
그리고 첫 문단에 대해 공감이 되는게, 요즘 광고 많이 때리는 '피키캐스트'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 때문에 좀 부정적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15/03/14 18:49
문학덕후를 타겟으로 삼는 비평쪽에는 일부러 어렵게 쓰는 글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스터충달님이 어려운 글에 대해 네거티브한 시선이 강한게 아닌가 싶네요.
15/03/14 21:17
저도 문학덕후라면 덕후인데 어떤 책이 그 모양일까요?
김현, 김화영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 정도 읽었는데 매우 재미있었거든요. 까뮈도 있고 사르트르도 있네요. 음... 하긴 그외에 것들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긴하네요.
15/03/13 22:51
결국 같은 언어로 된 컨텐츠 내에서도 일종의 통역사 역할을 할 전문지식인이 있어야겠지요 1차 창작자의 경우는 자신의 창의성을 100퍼센트 발휘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수준의 컨텐츠 소비자의 수분을 못(안) 맞출 수도 있습니다
이런 1차 창작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평론가 등으로 지칭되는 2차 창작자이며 기아트윈스 님께서 원문에서 지적하신 바 각 세부영역이 일반적인 상식과 적당한 수준의 논리만 가지고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해진 지금 2차 창작자(평론가, 기자, 영업직 사원,프리젠테이터?)의 역할과 중요성이 점점 더 중요해 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2차 창작자들은...허허허...1차 창작자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일반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아주 그냥 자기들을 일반 소비자와 다른 특권 계층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느낌이 들더군요
15/03/13 23:08
철학수업때 원전보다 그에 대한 비평서에서 더 깊이 알았던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이런 교두보 역할도 비평의 중요한 책무라는 생각입니다.
15/03/13 23:15
예 비단 충달님만 아니라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문학 철학 사회학적 전문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좋은 2차 창작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전보다 더 꼬아버리는 2차 창작물이 의외로 많더군요 그런 2차 창작물을 접할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15/03/14 05:41
마지막 내용과 반대되는 게 얼마 전 듀나의 트윗(https://ppt21.com../?b=26&n=54741)이겠네요. 좀 경박하긴 하지만 저는 듀나의 말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인식론이나 윤리학같은 다양한 철학 분파들의 이슈들을 인지과학을 필두로 과학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의 테마들도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행해지는 게 당연해졌고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가져오는 성과 앞에서 제가 알고 있었던 철학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기만 합니다. 데카르트나 러셀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수학도 과학도 공부해야하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철학도들은 대개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이 과학과 점점 밀접해져가는 현 상황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쓴 분이 말씀하신 이과인이 문과인에게 갖는 감정을 저는 이과인에게 갖고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저는 이학적 지식이나 인문학적 지식이나 똑같은 전문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공학/이학은 수학기호로, 인문학은 일상언어로 사유할 뿐이죠. 나름 전문적인 텍스트임에도 인터넷에 게시했을 때는 인문학적 사유나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상언어 대하듯 하다보니 맥락을 놓치기도 하고 개념을 적당한 선에서 파악하기도 합니다. 이해가 안되면 비판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일상 언어에서 사용됨직한 방법으로 글을 쓰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수학기호로만 글을 늘어놓으면 알 수 있게 써달라고 말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쉬운 글/어려운 글 논쟁을 야기하는 글은 이런 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려워도 개념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선명한 논리를 사용하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피드백을 하다보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대부분 스킵하고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다는 것뿐이죠. 문제는 인문학적 개념(혹은 다른 학문의 전문적인 개념)을 불명확한 방식으로 쓰면서 의미를 애매한 논리 속에 감추는 글들 아닐까 싶습니다. 아예 개념이나 논리가 틀렸으면 이야기가 쉬운데, 애매하게 나오면 지적하기도 어렵습니다. 막연히 어려워 보이는 글이 되죠. 그러면서 독자가 이해를 못하면 독자 탓을 합니다. 그럴 때면 조금 화가 납니다. 얼마 전에는 들뢰즈나 레비나스를 이용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을 봤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 사람이 사용하는 개념에 대해 물어보니 자기도 이해하지 못해서 난해하게 말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신선한 시도일 순 있겠습니다만, 자기 언어로 말하면 더 설득력 있었을 텐데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이런 글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나마 인문학만 조금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해서만 말해보면 일단 (1)인문학이 일상 언어를 통해 사유하는 만큼 개념어와 진짜 일상 언어와의 경계가 모호해서 접근성이 쉽다는 것과 (2)비평가들이 무분별하게 구조주의나 정신분석 같은 걸 사용해서 그게 무슨 삶의 정수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3) 그만큼 어떤 사람들은 말과 글에 나타나는 인문학적 개념의 빈도를 글쓴 분이 말하신 것처럼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의 지표로 여긴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문학이 가지고 있다는 문화자본은 허구인 것 같아서 결과적으로는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는 정체모를 것이 되어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라서 써보긴 했는데 본문이랑 연관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네요..
15/03/14 18:40
비평가들의 무분별한 정신분석 사용에 크게 동의합니다. 툭 하면 라캉, 라캉, 라캉이죠. 너도 라깡 나도 라깡. 이 소설을 비평하는데 라깡의 개념어가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그래야 너가 못알아먹고 지레겁먹을테니 라캉. 약간 매너리즘에 빠지는 듯 하면 들뢰즈로 갔다가 다시 라깡.
15/03/14 19:39
대중적 인식도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이면 라깡과 들뢰즈, 조금 더 알면 구조주의로 대표되며 영화도 영화비평도 그걸 포함해야하고, 그걸 찾고 독해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끼며, 그게 바로 고급문화라는 시선들 말입니다. 얼마전 문제가 되었던 글에서도 그런 덧글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비평의 도구로서의 인문학적 개념은 그냥 뜰채일 뿐인데, 워낙 자주 사용하다보니 작품 안에 원래 그런 개념이 있었다는 식으로 작품을 제한된 방식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평가들이 정말 감수성이 풍부하다면 만들어진 뜰채로 기계적으로 평론하지말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통해 의미를 포착해야겠죠. 뭐 이것도 누구나 하는 뻔한 소리긴한데.. 상황이 바뀌질 않으니 했던 말만 또 하게 되네요.
15/03/14 23:32
대중적 인식의 궤가 들뢰즈와 라캉을 왔다갔다하는 비평가들과 함께 할거라는 생각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솔직히 전혀 관심이 없다가 대부분이고 좋은 비평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살아남기 마련입니다. 비평은 창작에 비해 저열한 짓인 것은 다시 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입니다만, 창작에 준하는 비평이라면 가라타니 고진과 김현, 그리고 까뮈도 있습니다. 왜 인문학자들은 제대로된 자정능력을 그들의 텃밭안에서 기르지않고 시스템을 좇을 뿐인지 의문입니다. 대중의 시선은 핑계일 뿐이고 저는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자기들만의 리그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스스로 무너지고 있지요. 조한혜정과 김영민의 저작들이 그 생생한 증언을 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15/03/15 00:42
대중이라는 단어가 문제라면..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 상당수가 그렇다고 말하면 될까요? 저도 정신분석이나 구조주의로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비슷한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잘 모르겠지만) 근 10년 이내에 대안철학공동체나 출판물의 동향을 보면 충분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땅에서 우리말로 사유한다는 것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전 학계에 적을 둔 사람이 아니고 국내학계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어서 자정능력과 시스템에 대해 말할 형편은 못됩니다. 졸업하고나서도 계속 스스로를 철학도라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철학과 흔히 쓰이는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많이 다른 것 같아 언제나 곤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한국철학계에서는 종종 좋은 책이 계속 쓰여지고 번역되는 것 같은데 말씀하신 걸 보면 다른 분야는 그렇지도 않나보네요.
15/03/15 06:17
이 논의가 처음부터 어떤 저작을 지목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상정한 인문학 관련 서적의 평균치가 서로 다른 듯합니다.
저는 사상과 추상의 매정한 반복이 비평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단 저열한 행위일 뿐이며 이것은 결국, 수학공식에 맞추어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런 책들은 아예 들춰보지도 않고 언급할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아이리스 머독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결국 소설이야말로 헤겔 이후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산물이다.]라고요. 아마도 제가 소설을 첫번째로 치는 것은 제가 이야기 굶주린 아이같은 탓도 있지만, 머독의 저 말처럼 삶의 세세한 흐름이 일양적인 잣대로 재단되는 것에 커다란 거부감을 느끼는 제 성정 탓일 겁니다. 삶의 구체적 일상은 모두 무시하고 수입해온 기계로 작위적인 환원의 의식을 치르는 것은 저나 은님처럼 전혀 인문학과 관련된 이햬관계가 없는 독자를 조롱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멍석이 깔린 김에, 은님을 만나 반가운 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낸 것이 은님에게 딴지를 건 것처럼 되어 버렸네요. 용서하세요.
15/03/15 10:27
같은 인문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방점을 찍는 곳이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제대로 이해한 게 맞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령 검은책님은 세계의 겹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인문학을, 팟저님은 언어의 피안을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문학을 염두에 두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문학을 좇고있고요.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 현상을 비판하는 지점도 다르고 덕분에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참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15/03/14 22:17
말씀하신 바에 십분 동의합니다.
저 역시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철학 전공 학점만 100학점 이상 이수한 철덕이었습니다만, 철학은 이제 실증적(positive)인 부분은 그냥 잘난 제자(과학)에 할양하고 사학과랑 손잡고 지성사의 길로 가든지 아니면 종교와 손잡고 정신수양으로 가든지 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게 제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상 교수님들이 실제 연구하는 것들을 보면 사실 대다수의 경우 지성사논문이기도 하지요.
15/03/15 01:28
(1)글쓴분이나 팟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텍스트를 파고들던가
(2)언어의 피안을 중시한다면 신비주의나 종교 문학과 함께 가고, (3)언어의 차안을 중시한다면 자존심 버리고 과학이랑 같이 가야겠죠. 어떤 형태가 될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3번이 가장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철학사적 지식도 필요하겠고 비주류철학의 가치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지만, 로고스로 포착할 수 없어보이는 것조차도 결국은 과학이 해명해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진리를 향해 노젓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philosopher라는 사람들이 뒷짐지고 방관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그런데 따지고보면 이미 과학자들이 철학자인 세상일지도 모르겠네요. 데닛과 같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15/03/14 22:12
쩌는 댓글이 많아서 전 본의 아니게 피드백 없는 글쓴이가 되었답니다.
그냥 애나 보면서 댓글이나 감상하는... 그나저나 김 모 군의 문제는 마의 산이냐 파우스트냐가 아니지 않았을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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