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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3/07 13:01:31
Name 6년째도피중
Subject [일반] [역사] 조선노비사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어지간하면 조선사에 대해서는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국사가 한국사라는 이름을 새로이 달았지만 여전히 언론과 정치권이 기대하는 것은 한국사가 아닌 국사라고 생각하기에, 기본적으로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고대사는 조금 버텨보다가 귀를 막고 도망칩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게시판들 다니면서 여러 분들이 말씀해주시는 신분제에 대한 고민들을 함께 이것저것 공부하다보니 댓글마다 다들 "그럼 우리는?" 이라는 질문을 하더군요. "그 우리는?" 이라는 질문이 당연한 귀결이라면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것인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전 조선이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왜 거기서 그게 나오냐고 묻고 싶지만 말입니다.
과거는 다른 나라다....라는 개념을 꽤 좋아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하면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각이어야 하는게 아닌가해요.



잡설은 각설하고
여하튼 그러다가.... 그래서 조선노비사에 대해 이런 저런 게시물과 책들을 읽다가 
멍하니 몇 가지 생각들을 하다 
문득 조선노비사의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전에 대략 알고있던 바로는 이렇습니다.


- 고려시대에 이미 노비인구비율이 상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 조선 전기는 양인과 천민구조로 파악하고 후기(신분제 붕괴시기)는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한다.

- 공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나뉜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뉜다.

- 공노비는 조선의 각종 행정을 담당하는 무상노동력이었다. 이들의 비중이 커지면서 조선의 공공서비스는 질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다.

- 기록으로는 공노비가 훨씬 세세하게 기록되어있어 공노비의 부담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사노비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 사적착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선상노비가 되면 진짜 고생한다. 

- 성종시대 대규모 추쇄(도망노예를 잡는 일)가 조선 노비인구를 파악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한명회의 발언으로 미루어 노비 인구가 더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공노비와 사노비의 구분 이상으로 경거노비와 외거(서울 밖)노비의 개념차이도 크다.

- 공노비의 해방은 인권문제, 정치적 배경과는 큰 상관이 없다.

- 영조가 일천즉천을 금지시킨 일이 노비제도 자체를 크게 흔들어놓아 결국 공노비 해방으로 이어졌다. 

- 머슴과 솔거노비는 하는 일이 비슷해도 그 대우는 분명 달랐다.

- 노비 인구를 상당히 높게보는 입장이 존재했으나 차마 말을 못하다가, 제임스 팔레라는 '서양 외국인'이 개입되면서 여태까지의 반대급부로 아예 '노예제 국가인가?' 라는 질문까지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좀 더 고민하기 시작하니 여기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 노비 인구는 유동적으로 변했는데 조선이 가장 체계적으로 잘 움직이던 시기, 소위 전성기라는 시절이 노비인구가 가장 많고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되던 시기가 된다.

- 이 전성기, 특히 태종과 세종시기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많았던 시기이다. 이 위민의 대상에서 천민과 노비들 역시 빠지지 않았다.  

- 사실 일천즉천은 일찌감치 종언을 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태종의 뜻이라 여겨지던 종부법 시행을 꺾고 다시 일천즉천의 기준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세종시대이다.

- 대규모 노비인구 확보와 천민복지(?) 정책 사이에서 묘한 상관관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 조선은 저세율 국가다. 저세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행정에 드는 비용을 극도로 줄일 수 밖에 없다. 임금에게 있어서도 수령에게 있어서도 공노비는 필요불가결한 인력이 아니었을까. 

- 공노비 폐지 이후 각종 행정서비스를 누가 어떻게 맡았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 비용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조달한단 말인가? 

- 노비제 폐지 이후 지방 양반가의 향촌 지배력은 더욱 강해졌을것인가, 약해졌을것인가?

- 조선 초기 노비인구 확보는 권문세족과 사찰탄압에서 시작되었다. 즉 주기적인 불교탄압과 동시에 외거노비에 대한 유지통제를 강화하는 일이 관건이었는데, 위정자들은 노비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노비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불교를 덜 탄압하고, 수령이 지방민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로 인식하는 일이 많았다. 그 고민의 결과 중 하나가 오가작통법이다.

- 조선 승려들은 전반적으로 비구승의 비율이 더 높았음에도 어찌된 것이 그 수가 줄지 않았다. 상당수의 외부유입을 통해 조선불교의 명맥을 이어간 것이다. 이들은 기존 출신이 양반가였든, 일반 평민이었든, 또는 노비였든간에 원칙적으로 전부 제로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유민, 도적떼가 다를 바 없었다.
즉, 사찰과 사찰세력을 결국 완전히 토벌하지 못한 것도 신분제 시스템을 붕괴시킨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 양반과 양인의 관계가 혼란스럽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체 양반이란 무엇이고 상놈은 무엇인가에 대해 극히 혼란스러워지는데 그 경계가 되는 중간층위들이 극도로 모호해진 탓이다. 당대에도 이미 어느 촌락의 지방민이 과연 일반양인인지 외거노비들인지 혼란스러워했다. 물론 보는 나도 생각하는 것을 슬슬 포기하기 시작했다.

- 조선 중기 이후 대표적인 사회현상 중 하나가 '계'인데 이 계가 소속구성원의 신분에 따라 '상계'와 '하계'로 나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본디 하나의 '계'만이 존재하던 것이 '상계'와 '하계'로 구분되었으며 이것이 지방 인적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상계에서 신참자들을 받아들였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다시 혼란에 빠진다. '양반'이 되기 위한 기준이 계속 추가가 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계'는 지역사회에서 일종의 신분보증역할까지 해주는 셈인데...

- 일천즉천이 없어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대규모 노비 소유자보다 10인 이하 소규모 노비 소유자. 일명 서민양반들이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게 이 사람들 정말 현대 중소기업 사장들의 마인드랑 정말 많이 닮았다. 그리고 노비도 가족 맞다. 가족을 어떻게 사고파냐고 할 수 있겠는데 '개나 고양이'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급하면 사고 팔아도 되는 '식구'가 있다.

- 노비들이 노비신분을 벗어나려고 한 가장 큰 목적은 결국 세금문제다. 그 중에서도 군역을 포함한 요역 전반. 그런데 이 고민은 양인평민들도 똑같았다는 것이 문제다. <-- 표현 수정하였습니다.

-양반이 되지 못한 평민(혹은 양인)이 아니라.... 양반가가 되지 못한 양인가문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가문>개인 이라는 관계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적용시키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다보니 접근에서도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개인이 업적으로 양인신분을 획득하면 자연히 그 식솔들도 양인신분이 된다.
 <-- 이건 제가 잘못알았습니다. 단지 호주가 양인이 되면 그 집 식솔들이 양인의 식솔이 되는 겁니다. 50대 남자 노비가 양인으로 면천하였어도 이미 성인이 된 30대 두 아들이 자동으로 양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단 대부분의 노비들이 자식들에게도 곧바로 단계적으로 면천을 시켜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 과거에는 식솔들을 '구(口)'의 단위로 계산했다. 그러니까 여자도 '구'고 아이도 '구'고 노비도 '구'고 그 집 소도 '구'다. 애초에 '식구'의 개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주제에 주인과 노비들, 머슴들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건 너무 주제넘는 짓이 아니었나. 이 '구'.... '먹는다'는 것의 개념. '밥먹었냐?' 부터 물어보는 옛정서에 너무 둔감했다. 현대의 인권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눈이 멀어, 전날에 매타작을 당했어도 꽉꽉 눌러담은 머슴밥 한 사발이면 사과가 되던 그 시기의 정서에 대해 너무 외면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 생각나는게 이 정도 입니다. 
뭔가 더 나가야 하는데 딱 멈춰버리고 글도 못쓰고 있었어요.
덕택에 이렇게 난잡한 고민들을 늘어놔버리고 말았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pgr의 다른 분들처럼 멋지게 정리한 역사글을 한 번 써보고 싶네요. ㅜ.ㅜ 
역사글 올리시는 분들 존경스럽습니다.


사실 관계도 뭔가 문제가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따위 안찾고 그냥 두들겼으므로...

묵혀놓고 한 달 동안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이대로 가만 놔두면 머릿속에서 썩을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올려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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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07 14:57
수정 아이콘
흥미로운 주제네요 책에서 보던거와는 다른 느낌이라서 신선합니다 다음도 언능 써주세요
15/03/07 15:14
수정 아이콘
흥미있게 잘 봤습니다! 다음 글 보고싶어요!
진나라
15/03/07 15:18
수정 아이콘
예전에 배운거라 기억이 좀 헷갈립니다만.. 군역에 대한 압박은 노비들보다는 일반백성들이 심했을겁니다. 노비는 권리가 없는대신 의무도 없기에 세금도 안 내죠. 오히려 일반 평민들이 조세나, 소작료, 군역,공납 등 세금의 압박이 심했습니다. 후기에 사실상 세금 면제인 양반관리가 되려고 애썼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신분제동요가 일어나면서 양반의 수가 늘고 평민의 수가 줄어들자 국방력도 약해지고 세금을 낼 인구가 적어져서 국가재정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정조는 공노비를 해방하여 세수와 군역 대상자를 확보하여 국가재정과 국방력을 높이려고 했으나 실행 직전에 타계하시고 순조1년에 공노비 해방이 이뤄진걸로 기억합니다.
6년째도피중
15/03/07 15:37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분명 일반백성들의 군역부담이 매우 컸겠지요.
그런데 정확한 출처를 기억은 못합니다만 다른 자료에서 후기에 이르면 노비들이라고 꼭 군역의 책임을 지지않는건 아니라는 글을 또 본게 화근이었어요. 일단 넷출처는 아닙니다.
군역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군량미를 나르고 성을 쌓고 물건을 정비하는 각종 요역에 종사하는 게 많아졌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노비들이 같이 부담을 졌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런 부분에서 단속이 잘되었을 조선 전기조차도 서울에 거주하는 노비들 중 재산가진 이들을 일부 전력으로 차출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량인이 되었지요.)

물론 예외적인 사항이 아니냐고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고민입니다. 좀 더 자세히 파야 할 부분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그 차출의 이유라는 것이 '그들(신량인들)은 재물을 갖고있어 빠른 시간에 전력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재물이요.
즉 바꿔말하면 그들을 전력에 쓰지 못하는 이유는 '재물'이 없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공노비 한정입니다만 선상에 투입된 노비가 그러했으니 납공이라고 다를리는 없지 않나라는 고민입니다. 이 쪽에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건데(제주 한정입니다만 정찰 및 경비에 여자들이 대신 투입된 사례도 있고요) 지금 정확히 정리가 안되었습니다만, 분명 노비들도 군역을 지게하겠다는 의도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서 두당 뭘 거두겠다는 의욕까지 실패한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산을 가진 노비들, 특히 외거노비들의 경우 이 인력들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안하고 놔둘 지방관아가 아니란 말이지요. 외거노비들 중에도 주인집은 서울이지만 노비소재지는 경상도라는 식으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요. 분명 어떤 경과로 군역에 해당하는 요역을 뽑아낸 기억이 있는데... 명확한 내용은 기회가 닿으면 차후에 보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별개로 확실히 저 문장은 좀 고쳐야 겠군요. 모든 노비가 군역이 고민이었다는 식으로 해석되겠어요. 말씀 감사합니다.
부분에 집중하다가 전체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것 같네요. ㅜ.ㅜ
루크레티아
15/03/07 16:48
수정 아이콘
1. 세종시기에 일천즉천을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은 세종이 왕권 강화에 태종만큼은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인학대의 전문가인 세종이었지만, 그건 그냥 부려먹는 수단일 뿐, 부려먹어서 찍소리도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죠. 아버지가 강력한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세종은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긴 했지만, 애시당초 태종처럼 강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이 아니었던지라 신하들 말을 어느 정도는 들어줬습니다. 종부법에서 종모법으로의 변화도 결국엔 이러나 저러나 쨍쨍대는 신하들 말을 들어준 것이죠.

2. 노비제 폐지 이후에도 향촌 유력자들의 지배력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일제시대 당시에도 진즉에 사라진 노비의 틀은 머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간직되고 있었고, 만약 6.25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지금의 일본 부라쿠민처럼 노비 출신 사람들에 대한 [글러먹은]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3. 조선 후기의 소작농들은 거의 지주가의 사노비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양반가, 서원, 부농층의 대규모 토지 소유가 정착된 조선 후기에는 말로만 노비 숫자가 줄었다 뿐이지 일반 양인의 생활이 노비나 다름 없었죠. 양인의 생활이나 노비의 생활이나 거기서 거기니 당연히 모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6년째도피중
15/03/07 19:22
수정 아이콘
1. 제가 알기로 태종 - 세종 전기에 각 관청부서마다 토지와 노비의 재배속과 조정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으로 압니다. 애초에 세종이라고 이 부분에만 예외를 만드는 것이 이상한 것이 임금이면 누구나 상벌을 내리는게 가장 큰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상벌의 대표가 바로 토지와 노비 아니겠습니까? 각 부의 예산과 인력을 편성하던 와중에도 세종은 노비인력을 귀히 여겼습니다. 분명 노비라하여 험하게 다루지 못하게 하였으나 노비가 국가기간이며 장기적으로도 사용해야 할 인력으로 여겼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일단 상당수의 공업 기술자들이 노비출신들이며, 세종조의 각 위업마다 그 인력의 차출에 있어 백성들의 역을 지우는대신, 되도록이면 각 사(司)로부터 노비를 차출하여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2. 현재 알려진 향촌유력자들의 계보를 추적하는데 있어 한국전쟁도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일차적으로는 조선멸망이 더 크다고 봅니다. 즉 20세기 초반의 향촌유력자의 대부분은 기존의 계나 향약의 일원들이 아닌, 일제의 등장으로 대두된 부일인사들이 대부분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요. 노비제가 붕괴되고 향촌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과연 고공(머슴)을 통한 인력재지배가 가능하였는가, 거기에 일제에 의한 통치가 이어지면서 기존의 양반지배권력이 승계될 수 있었는가도 고민인거죠.
아직 자료를 상세히 찾아보지못해 모르는 것일수도 있으나, 실제로 상하계로 세분화되고 지역인사를 다 통제했다는 19세기 중엽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이전만큼 확고한 지역통제를 보여주는 계의 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제의 지배가 확고해지면서 계가 지역 남성들을 통제한다기 보다 해도좋고 말아도 좋은... 말그대로의 계모임으로 변화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기존의 양반들의 향촌지배력은 어느 시점에서 분명히 힘을 잃었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말씀대로 노비 -> 고공으로 돌아가는 인력통제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만, 공노비 ->양인으로 변화한 케이스나, 사노비 -> 양인 (이전 주인이 여전히 영향력 행사)의 케이스는 각기 다른 통제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나 생각도 들고요.

3. 분명 자영농과 소작농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라졌지요. 조선 개국인물들이 생각한 양인은 '자영농'을 근간으로 하는데 소작농의 비중이 계속 늘어나버리니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였겠구요.
다만.... 정리해서 글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찌되었든 어떤 결론이나 과정에 관한 맥을 짚어야하는데 '혼란스러움'이라고만 해놓으면 애써 탐구하는 의미가 없잖겠습니까? 그 어떤 혼돈의 카오스(...)라도 그 속에는 어떤 맥이 있겠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 자료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뭔가 있기는 할겁니다. 실은 공부가 부족해서 문제입니다. 다들 한국사 한국사 하길래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가고 있는데 역시나 힘드네요. ㅜ.ㅜ

말씀 감사합니다. 님의 댓글을 읽다보니 확실히 제 주제에 너무 무리한 걸 건드렸다는 생각이 더욱 드네요. ^^
루크레티아
15/03/07 22:45
수정 아이콘
원래 역사 공부라는게 다 그런거죠...
뭐 하나 좀 제대로 하려고 하면 사료는 없고, 이상한 내용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는데 정리하려니 교차검증 단계에서 엇갈리고....
멘탈은 우주로 날아가고...
15/03/08 01:49
수정 아이콘
예전 대학원 수업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조선시대 노비제같이 잔인한건 없다시더군요. 아무리 아비가 같은 형제더라도 적자냐 서자냐 얼자냐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진다면서요. 나중엔 적자 동생이 얼자 형을 노비로 부려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분제가 우선인 사회였니 당연한 문제였겠지요.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노비들의 사회도 조금씩 보입니다. 가끔 호구에 賤囗秩(천구질)이라 쓰고 노비를 죽 나열해놓는데 그 중 외거노비들 중에 나이가 100살이 넘는 노비들이있습니다. 진짜 그 노비가 그 나이처럼 산게 아니고 하도 멀리에 거주를 하므로 나이계산만 하고 그렇게 적어둔겁니다.(예로 제가 실제로 본 호구에선 주인은 담양에 있었는데 외거노비는 창원지역에도 있었습니다)나중에 그 노비 후손들을 찾으면 자기 소유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백살이던 백오십살이던 그냥 주구장창 기록합니다.(이백살까지 나와있는 것은 사료로 제가 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노비가 타지에 살던, 도망을 갔던 소유권은 계속 확실히 주장했습니다. 상기하셨던 자기가 양인인지 외거노비인지 구별못한 그 사람도 자신의 증조부나 조부가 누군가의 호적에 자신 소유의 외거노비로 계속 적혀있었을 겁니다.
6년째도피중
15/03/08 09:48
수정 아이콘
그 분이 말씀하신 뜻은 조선시대(의 사회제도 중) 노비제같이 잔인한건 없다는 말씀이셨겠지요? 당대인들도 어느정도 인정한 바이지요.
요새 호구단자에 대한 논문과 연구서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요근래 조선사회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도 이것들 덕분이겠지요. 말씀하신 내용은 신기하네요. 확실히 말씀대로일것 같습니다. 주인가문이 몰락하고 한동안 경황이 없어 신공을 못받다가 뒤늦게 찾으러가면 이들 외거노비들이 우린 그런사람 모른다며 수금하러 온 주인집 사람을 두들겨 쫓아내는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happyend
15/03/08 09:45
수정 아이콘
고려시대에는 농장안의 노비가 일반 백성보다 대우가 좋았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식솔의 개념엔 노비가 포함되었는지 약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고요. 탐관오리인데도 우리나라 향약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이가 있는데, 추측컨대 백성들을 이롭게 하기 보다는 자기들 농장내 노비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6년째도피중
15/03/08 09:58
수정 아이콘
즉 주인의 품안이 더 안전한가 혹 그렇지 않은가가 '보호'냐 '속박'이냐를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식솔은 시대를 막론하고 대부분 노비, 머슴들도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집 밥을 먹는 사람들"은 전부 식솔이니까요.

음... 바꿔 생각하면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애초에 저 관계는 '아버지의 보호'라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개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까. 향약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까놓고 지배층 말입죠)들이 어린... 어리석은 이들도 서로 돕고 살 수 있게 방안을 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요새 식으로는 집에서 아이들 엄마가 벽에다 '엄마와의 약속!'하고 적어놓는 거랑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무조건 부모(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을 갖도록 하는거죠.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래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져버렸다는 방증같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고려 말에도 여전히 흥했던 풍수지리라는 것도 산속에 틀어박혀도 먹고살며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것이니만큼 확실히 말씀하신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될 것 같습니다.
6년째도피중
15/03/08 10:07
수정 아이콘
마지막에 완전히 틀린 부분이 있어 수정하였습니다. 아유... 창피하네요.
나이트해머
15/03/08 12:41
수정 아이콘
1. 고려시대의 노비 비율은 확실히 조선시대보다는 적었습니다. 하지만, 천민 비율은 조선시대보다 확실히 높았습니다.
우리가 노비 = 천민으로 간주하는 건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에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노비는 어디까지나 전체 천민 계층 중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양인으로 올릴 수 있는건 올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최대한 노비로 통폐합시켰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비해 높아진 노비 비율과 낮아진 전체 천민 비율을 보유한 국가가 됩니다.

2. 조선시대에 양인 개개인보다 가문을 중시했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조선 전기, 정부레벨에서는 대가족적(가문 중심)인 사회구조를 핵가족 수준의 개별 가구 중심으로 바꾸고자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이건 세조~성종시기에 호구측정 기준을 대가족에서 개별 가구으로 바꾸어 버리는 데에 이르죠. 그리고 이 결과, 대가족 내부의 사적 예속 하에 있었던 인구들이 공적으로 드러나게 되죠. 그리고 이러한 개별 가구 위주의 사회를 추구할때 노비의 숫자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며, 비율도 성종시기에 절정에 달합니다. 즉 '노비라고 명시되지만 않았을 뿐 강력한 예속성과 경제구조에 속한 자들' 이 노비로 포함되고 있는 겁니다. 이시기에 새롭게 파악되는 인구를 노비로 분류하냐 아니냐는 이영훈 교수의 추론에 따르면 경제적 능력과 구조였다더군요. 가문 중심적 사회구조의 파괴는 조선전기의 분할상속 전통도 크게 한몫 했고. 물론 가문 중심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반발도 있어서, 조선후기로 접어들면 재산 분할을 막고자 종갓집에 모든 재산을 몰빵 상속하는 종가지주제가 등장하고, 족보에 등장하는 '중시조'도 이런 식의 가문 통합(사실상 다른 가문들이 '중시조'를 통해 한 가문인 것처럼 뭉치는)의 일환이라 합니다만...

3. 여말선초를 기점으로 기존의 권력집단이 공식적으로 누리던 권리가 대부분 박탈당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던 것이 노비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고려말 권문세족들은 노비 말고도 자기에게 예속된 방대한 소작 농민들, 대규모 사병군 등등 매우 넓은 인적 지배 능력을 갖췄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대부분 상실하고 노비만이 남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 노비 = 고려시대의 노비, 사병, 소작농, 기타등등 인신적 지배집단의 통합 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자신이 지배층이라는 걸 나타내는 신분적 상징물이라는 의미까지 가지게 됩니다. 즉 노비를 산다는 건 '우리 집안은 이제 지배층입니다' 고 노비를 판다는 건 '우리 집안 완전히 가세가 기울었네요...' 는 의미를 갖게 되는 거죠. 물론 조선은 신분제적으로 매우 유동적인 사회구조를 갖추었기에(미야지마 히로시의 '나의 한국사 공부'에 따르면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유동적인 건 중국, 가장 고착화되서 변동의 여지가 전혀 없는 신분질서를 지닌건 일본. 조선은 그 중간정도) 출세하는 집안과 몰락하는 집안은 언제나 발생했고, 따라서 노비 '시장'과 '가격' 이 발생하기까지 합니다만, 이건 단순히 물건으로서 사고 팔기보다는 '지배층으로서의 권리와 상징'를 사고 판다고 봐야 맞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16세기에 노비 숫자를 늘리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도 노비를 많이 거느릴수록 '우리 집안은 이렇게 잘나가는 집안이다'는 걸 과시하려는 의도가 상당부분 섞였다고 봐야겠죠. 16세기 훈구파들은 노비제를 조선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고유의 제도라면서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짐작하다시피 1, 2 등의 이유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카테고리 '노비' 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3. 으로 인해 조선전기 지배층(이걸 조선의 독자성이라고 옹호한 훈구파라던가)에게 옹호되고요. 노비제의 붕괴가 17세기 부터라는 점은 주목할만한 점이지요. 물론,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순식간에 동질적인 집단이 된 것도 아니고. 다양성이 너무 폭발해서 골머리가 아플 지경. 이걸 하나로 묶어서 파악하려 드시니 당연히 길을 잃을 수밖엔 없지요 뭐.

또한 노비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점은 이들이 자신의 신분을 겉으로 드러내는 특징적인 그런게 전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즉 숨으면 찾을 방법이 전혀 없지요. 조선후기 노비제의 붕괴에 이는 크게 기여했습니다. 양반들이 자기집안 문서 들고 찾으러 와 봐야 성공하는 게 용한 거고. 정부레벨에서 찾아도 못찾는 노비가 수만명인데 뭐 어쩌겠습니까.(공안에 올라와 있는 공노비가 19만명인데 실제론 2만 9천밖엔 없으니까 잡아와서 그동안 밀린 신공을 바치게 하자는 이유로 효종 6년부터 8년까지 대대적인 노비 추쇄를 벌였지만 추쇄에 성공한 노비는 2만명도 채 안되는 거라던가...) 뭐 양반지주층이야 자기들이 정해놓은 지대도 소작농들에게 제대로 못걷는 케이스가 허다해서... 양반 가문 기록을 훓어보니 소작농들에게 제대로 정해놓은 만큼 지대를 받아낸 해가 별로 없다고. 매년 지대를 덜 내려고 하는 소작농들에게 결국 밀려버리는 년도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양반들이 기록만 가지고 먼곳에 있는 자신의 노비를 찾아간다고 해서 목적을 달성하기가 참 쉽지가 않죠.


상황상 좀 더 이것저것 이야기하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일단 기억하는 대로 이야기해 봤습니다.
6년째도피중
15/03/09 09:26
수정 아이콘
1. 확실히 고려시대의 천민비율과 연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사실 고려야말로 엄격한 신분제 국가이고 조선은 신분제 국가가 아닌 걸로 출발했다고 봐야겠죠? 말씀대로 개념상 양인이 아니면 모두 노비라는 형태로 이원화시킨 개념이다보니 다양한 형태의 천민들이 모두 다 노비로 취급되어 뒤죽박죽이 되긴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그렇게 이해한다면... 따라야하지 않겠습니까? ㅜ.ㅜ "노비와 기타 등등 계층에 대하여"라고 할수는 없으니...
신량역천의 개념에 대해 너무도 늦게 알아서(이거 공부하기 전에는 솔직히 광대, 기녀, 승려 등을 일컽는 줄 알았습니다.;;;;;)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2. 말씀하시는 내용은 조선 전기의 개념같군요. 변명하자면 이거 관련해서 주로 조선후기의 호구단자 및 각종 계원표 등을 분석한 2차사료들을 읽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시기적으로 대부분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전반적인 조선의 사회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쪽에서 느낀 바를 그냥 두들겼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조선 전기를 홀라당 넘겨버렸군요. 허허. 전기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때까지 흥미가 유지되느냐가 관건입니다만 ^^

3. 아주 예전에 신분구조와 토지매매는 서로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은 상업이 발달하는 와중에도 토지매매는 극도로 경직된 사회였고 조선은 전,후기 통틀어 항상 활발하게 토지매매가 일어났다는 것 말이지요.
제가 노비매매에 대해 가장 먼저 접한 책이 '무관 노상추의 일기'(정조, 순조 시대)이다보니 생긴 일종의 편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책에는 노상추가 과거 공부가 길어지자 노비와 전답을 계속 팔아치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노비들을 통한 산출에도 고민이 많고, 노비가 도망치자 주변 양반들과의 지역연대를 활용하여 직접 추노해서 잡아내기도 하고요. 물론 이후 무관으로 출세한 후로 다시 많은 노비와 전답을 사들입니다만.... 여하튼 이 쪽에서 접근한 느낌으로는 명문세도가들 입장에서야 노비가 확실히 '과시용'이라는 측면도 분명 있었을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재산으로서의 가치, 투자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비시장에 대해서는 확실히 후기의 것을 기준으로 생각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글을 보고 세종-성종 연간에 노비시장이 존재했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말씀대로의 것일 가능성이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 이 차이는 아무래도 조선 전기가 노비의 양과 질이 비교적 풍부했던 시대였던 탓이 아닐까요?

효종의 노비추쇄에 관해서는 노비추쇄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기보다 효종대의 공공인적통제 네트워크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증명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 전기 성종의 노비추쇄 역시 효종의 노비추쇄에 못지 않은 대대적인 사업이었고 이 쪽은 30만여 노비의 추쇄를 달성했습니다. 효종이 적어도 10만의 실공노비를 잡지 않겠나 예상한 것도 지난날의 추쇄사업이 이러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이 시점에 대대적인 노비추쇄가 이뤄졌다는 사실부터가 기존 노비수급 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증명일지 모릅니다. 한명회는 이것도 국가사정에 비해 모자란 수치라고 강변했지요. (성종 170권, 15년(1484 갑진 / 명 성화(成化) 20년) 9월 18일(임인) 1번째기사 ...... 예전에 한명회가 왜 그리 욕을 쳐먹나 생각했는데 기사를 읽어보니 백성들 입장에서 확실히 욕먹어도 쌉니다. 오가작통법의 아버지더군요.)

생각해보면 당시에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가 있던것도 아니고 주인네 입장에서도 밀린 신공받는 일이 보통은 아니었을 것 같군요.
지금것도 타이핑 하다보니 '서민양반' , '귀족노비'의 구도로 뭘 만들면 재미있는 블랙코미디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한 말씀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이런 이야기 자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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