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는 새로운 학교에 전학을 가게 됩니다. 이 학교는 청각장애인들만이 있는 곳으로 오로지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곳이죠. 이곳은 바깥 세상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히 지배하는 곳입니다. 일종의 신고식을 거친 후 세르게이는 트라이브라는 조직에 들어가게 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피해자였던 그는 점점 지배계층의 일원으로 입지를 바꾸어 나갑니다. 착취와 약탈만이 전부인 생활에 세르게이가 점점 적응해가던 무렵, 그 누구도 단 한번의 섹스가 이 소년을 이렇게 격렬하게 뒤흔들줄은 몰랐습니다. 세르게이 자신도요.
이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조금 낯설지도 모릅니다. 일단 수화로 진행되는데다가, 이 수화에 대한 자막이 전무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끊임없이 상황을 유추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잘한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영화의 형식은 장애인과 일반인의 위치를 완벽하게 역전시킵니다. 흔히들 장애인은 무언가가 불가능하거나 결핍된 존재로 인식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를 보며 역으로 관객들이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소리내어 말을 할 줄 모르고, 할 필요도 없는 이들의 수화를 보며 관객들은 청각 장애인들의 세상에서 소외됩니다. 관객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이따금씩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불확실할때에는 한발짝 뒤늦게 오는 인식에 충격이 배가 되기도 하구요.
역으로 버벌 랭귀지의 부재는 직관적인 이해를 더 수월하게 만듭니다. 인물들의 표정과 손짓, 몸짓은 감정을 훨씬 더 직설적으로 전달해요. 영화 속 인물들은 모든 감정 표현에 있어서 역동적입니다. 화가 나는 순간 그들의 수화는 폭이 커지고 훨씬 더 빨라집니다. 가끔씩 그들의 거친 목소리가 수화 가운데 섞이고, 이내 손찌검이 뒤따릅니다. 이 영화 안에서 감정이라는 건 섞이거나, 통하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 긴장, 증오, 집착, 이 모든 것들이 인물들 사이에서 충돌하고 작은 폭발을 일으킵니다. 허공에서 그려지는 이들의 언어는 매 순간 상대방의 눈 앞에서 공기 방울처럼, 혹은 수류탄처럼 터지는 것 같아요. 관객들은 이내 이야기의 큰 줄기를 따라가며 상황을 추리하고 인물들의 의사소통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한편으로는 소리와 글자가 그 본연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방해물이라는 것을요.
극에서 소외된 관객들은 완벽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게 됩니다. 이는 거의 모든 씬을 롱테이크샷 하나로 처리하며 인물들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촬영 방식 때문이죠. 분할되어 있지 않은 쇼트의 긴 길이 속에서 관객은 본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왜? 나 어떻게? 등 사건의 인과관계나 윤리적 측면을 고심할 틈이 없어요. 트라이브는 원래 그런 조직이고 그 안에서 돌아가는 행동원리는 그냥 그런 겁니다. 이런 카메라의 추적을 통해 관객들은 선악의 판단이 섞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목도하게 됩니다. 또한 인물들을 프레임의 한 가운데 잡아놓고 보여주는 성향이 짙기 때문에 끈질기게 들러붙는 카메라 워크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어느 정도 거리감을 가지게 됩니다. 정면에서, 혹은 배후에서, 또는 정확한 측면에서 프레임을 의식시키는 구도 때문에 관객은 트라이브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보고 있다는 걸 계속해서 의식하게 되죠.
이런 형식에 더해 영화가 담고 있는 것 역시도 철저히 본능적인 것들 뿐입니다. 수컷들은 낯선 수컷을 보는 순간 서열을 확실히 하고, 이후 이 수컷을 교육시켜 자신의 조직으로 편입시켜 위세를 더하는 식으로 재사회화를 합니다. 새로운 수컷, 세르게이는 우두머리가 누구이며, 또 그 아래의 구성원들은 누구인지, 자신은 이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눈치껏 배우고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가는 누군가를 몰래 습격해 강도짓을 하고, 또 여학생들의 매춘을 알선하는 뚜쟁이 역할을 맡게 됩니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지배욕을 차츰 학습해가는 과정은 영락없는 동물의 왕국입니다.
영화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영화라는 카피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세르게이의 감정 역시도 본능의 테두리에 갇혀 있습니다. 오히려 이는 소유욕, 혹은 수컷이 한 암컷을 가지고 주장하는 독점욕에 가깝습니다. 이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세르게이가 갖게 되는 감정의 발현은 육욕의 측면이 훨씬 진하게 나타나요. 세르게이는 방을 잘못 들어가 안나의 벌거벗은 상체를 봅니다. 이후 트라이브의 두목에게 구강성교를 해주는 안나를 보게 됩니다. 다음에는 뚜쟁이 노릇을 하면서 트럭 운전수에게 거칠게 당하는 안나를 보지요. 세르게이에게 안나를 매개로 한 섹슈얼리티의 목격은 우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트럭 운전수에게 매춘을 하는 현장은 그가 스스로 고개를 올려 쳐다보죠. (세르게이는 안나의 친구에게 그런 식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세르게이는 자신과도 관계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마침내 안나와 보일러실에서 처음으로 성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세르게이는 점점 안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매춘을 못하도록 차 안에 못나오게 하고, 나중에는 다시 한번 훔친 돈으로 안나와 관계를 가집니다.
이런 부분에서 세르게이의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좀 의심이 듭니다. 동시에, 이것이 사랑이라 불리는 것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죠. 세르게이는 사랑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문명 사회의 인간이 할 법한 기교는 전혀 보여주질 못해요. 세르게이는 오직 육체적으로 안나를 탐합니다. 기차에서 앵벌이를 하던 중 몰래 훔친 지갑을 안나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관계를 가지며, 또 관계가 끝나면 안나의 얼굴을 마주보며 정성스레 몸을 쓰다듬어요. 분명 이건 원숭이도 할 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이 있습니다. 속삭임 대신 어루만지는 것이야말로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된 표현법일지도 모르죠.
영화는 세르게이가 속한 현실의 책임을 마냥 이들에게만 돌리지 않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어른들의 욕망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트라이브가 매춘을 하는 고객은 트럭 운전수들, 즉 어른입니다. 그리고 이런 트라이브의 조직적 행동을 뒤에서 돕는 대머리 교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에는 이들의 행동을 방관만 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트라이브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행동을 제지받지 않습니다. 요는 얼마나 성공적으로, 깔끔하게 맡은 일을 해치우느냐 하는 것 뿐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안나의 낙태 시술 장면입니다. 필시 경험 말고는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는 한 아주머니가, 자기 집 화장실에서, 가스렌지로 달궈 소독한 기기들을 가지고 안나의 자궁을 벌려 이것 저것을 쑤셔넣으며 안나 뱃속의 태아를 제거합니다. 이 아주머니는 돈을 받았으니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이 세계에서 트라이브의 조직원들은 고객 아니면 판매자로밖에 존재하질 않지요. 그 누구도 이들에게 애정이나 관심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의 결말, 소리없는 이들은 가장 세고 무거운 충격을 서로에게 안깁니다. 안나는 이탈리아 여권을 발급받는 데 성공하지만 질투에 미친 세르게이가 여권을 갈갈이 찢어놓습니다. 어렵사리 만든 여권을 수포로 만든 행위에 화가 난 트라이브는 세르게이를 물고문하고 뒤통수를 병으로 후려갈겨 피바다를 만들어놓지요. 한밤중에 몰래 기숙사로 들어간 세르게이는 트라이브 조직원들의 방을 차례로 들어가 무거운 서랍장으로 자는 아이들의 머리를 으깨어죽입니다. 아마 이 아이들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누군가의 인기척을 소리로 느끼고 반항하거나 도망쳤을 겁니다. 그러나 소리를 잃은 세계에서는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아무리 크게 나도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소리를 듣지도, 지르지도 못한 채 세르게이가 내리는 철퇴를 아이들은 자는 얼굴로 곱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소리가 사라진 세상 속 고요함과 원초적 세상의 폭력을 가장 극대화시키며 끝을 냅니다.
언어가 발명되기 이전의 삶이 필시 저랬을까요.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중받는 것은 힘이고, 그 힘으로 인간들은 서로 빼앗고, 복종시키려고만 듭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이 이끌리고, 억누르지 못한 애달픔은 분노가 되어 많은 것을 산산히 부숴놓습니다. 분명, 이 영화는 야만적입니다. 그리고 말이 감추고 있는 껍데기를 벗겨 진실을 보여줍니다. 전 말하고 사는 우리가 트라이브의 그들과 그렇게 다르다고 보지 못하겠습니다. 오히려, 말 하는 우리가 대신 잃어버린 것만을 고민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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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잘봤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위치가 역전된다는 생각은 안해봤는데 과연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하지만 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네요. 영화가 인간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을 보여준다는 건 동의하지만 언어가 없기 때문(또는 수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수화도 발성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법과 규칙이 있는 훌륭한 인간의 언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도 듣고 말하기만 못할 뿐이지 글을 통해 비청각장애인과 같은 언어를 습득하고요. 심지어 어떤 청각장애인들은 구화법과 발성 및 발화하는 법을 배워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죠.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욕망에만 충실한 행동을 한 이유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크라이나의 불안정안 사회적 환경과 그 학교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언급하시지는 않았지만 언어가 발명되기 전의 비문명화된 삶을 발성 언어 대신에 수화를 하는 집단의 삶과 비교하시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비청각장애인들이 일반적으로 수화하는 모습을 보고 언어 체계가 없는 동물들의 커뮤니케이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의문이 드네요. 그저 이해를 못할 뿐이지, 그게 더 원시적인(동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령 화가 나서 수화의 동작이 커지는 것과 비청각장애인이 큰 소리로 소리지르는 것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동물들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일까요. 그리고 말로 의사소통을 사람들도 항상 몸짓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보조합니다.
아마 고대 인류는 손짓이나 몸짓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면서 사냥도 하고 가족도 꾸리고 그랬겠죠. 영화 속에서의 청각 장애인들이 그렇게 그려진다는 것이지, 수화나 청각 장애인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게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화가 난 인물이 격렬하게 수화를 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새들이 구애하거나 싸움을 펼칠 때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모습이 연상되었어요.
전 수화나 청각 장애인이 원래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동물적이라는 말을 한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