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적으로는 심리학
거시적으로는 사회학이라는 모토 아래
파시즘에 대하여 지난 2월 부터 현재 까지의 관찰을 마쳤습니다.
파시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학창시절 학교폭력의 희생자였고 사이버상에서 수년간의 집단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심리적인 부분에 집중해서 노력해왔는데,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저의 관찰글입니다.
정규교육이 중졸이라서 배움이 짧아 아는 지식이 많지 않아 주로 관찰에만 의존해서 씁니다.
파시즘적 태도는 극우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 스펙트럼에서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림으로 그려보겠다.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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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t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중도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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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리즘
내가 생각하는 모형이다.
어느 스펙트럼의 입장이든 그 입장이 강경해지면 <파시즘>을 띤다.
파시즘은 그래서 정치적 스펙트럼상 <극우>보다는
개인이 가진 입장의 강경의 정도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싶다.
중도 + 파시즘 / 우파 + 파시즘 / 진보 + 파시즘 / 모두 가능한 조합이다. 관찰을 해보면 말이다.
이런 쪽에 관심이 많다보니 ,
꽤 많은 사이트와 카페에서 일어나는 정치논쟁을 지켜본 결과
일베에서도 반 일베 성향의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파시즘>이 존재한다.
본인,
꽤나 논쟁을 즐기는 편이라 ..
2012년 대선 기간 당시 ,
모 여초카페에서 <단일화와 관련한 안철수 비판> 글을 올렸다.
엄청난 욕과 인신공격과 ' 너 일베하지? ' ' 여기 일베충 한 마리 추가요' 이런 반응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다양하다.
문제는, 어떤 한 사안에 관련하여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상대를 <반대진영>의 사람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그 때 당시 내가 계속 진보성향이라고 얘기했음에도 타 이용자들의 나에 대한 반응은 <거짓말 하지마! > 이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 그 때 그 카페 이용자들보다 내가 더 급진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저런 소리를 들었다.
양측 모두 사실 메카시즘에 빠져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내가 느낀 것이 매우 많다. 나 역시도 이전까지의 내 태도를 반성했다.
< 우상화 >
한국인들은 <영웅>을 좋아한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온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그런듯 싶다.
왕정이 무너졌으나..
장기간의 독재가 있었다. 직접 대통령을 손으로 뽑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권력이 개인보다는 지자체에 지자체보다는 중앙정부에 편중되어 있다보니
사회 안에서 시민 한 명이 가진 힘이 매우 작다.
힘이 작은 개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적으로 뭔가를 성취해나가기엔 (집을 사는 것이든, 차를 사는 것이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든) 역부족을 느낀다.
경제적 이유 사회적 이유 여러 원인이 있지만,
공통된 특징은 <사회 전반적으로 무기력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메시아>를 찾게 된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자들의 모습과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의 모습을 좀 지켜봤다.
지지자들 모두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영웅시>하는 성향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다.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메시아적 지도자>란 체제 내의 모순이라 생각한다.
정치에 있어서 한 시민이 가지는 힘이 좀 더 이양되길 바란다.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는 <대통령>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비유적 의미다. 그만큼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에 과중한 힘이 실리지 않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
영웅을 찾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한 누군가를 영웅시하게 되면 동시에 경외감이 드는데 이게 좀 더 병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우상화하게 된다.
국민의 <우상화>를 등에 업은 리더는
다수의 국민으로 부터 <장기집권>에 대한 <동의>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독재로 이어지며 권력이 이 사람에게로 집중되게 된다. 또한 민주주의 사상과는 매우 반대되는 방향이다.
< 전체주의가 강한 사회에서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인의 태도>
왜? 집단주의 전체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가 강한 사회에서의 개인은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받고 피해를 입고 있을때
이것을 사회의 국가의 혹은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위정자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스스로의 잘못으로 여기는 성향이 강한 것인가.
그리고 반면,
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강한 사회에서의 개인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을 탓하기 보다 사회와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는 성향이 강한 것인가.
나는 편의상
전자의 사회를 A 후자의 사회를 B라 칭하겠다.
(그리고 아래부터 A사회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서술하려 한다.)
집단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와 같이 개인보다는 <집단>이 특히 강조되고 중시되었던 때는
<전시 상황>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 <전시 상황 - 세계 대전을 비롯하여, 국가 간 국가의 전쟁까지 아울러>에
위 성향은 강한 특징을 보였다.
먼저, 왜 이러한 전시 상황과 같은 특수 상황에서 <집단 , 국가 etc>를 위정자들이 강조를 하며
이것을 이용하는지에 대해 먼저 짚고 갈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개인을 한 개인으로서가 아닌
전쟁을 수행할 <군대>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 하나의 부품으로서의 <병사-개인>로서
집단의 이상과 목적 하에 움직여야 한다.
이런 집단에서 개인이 개인의 생각을 갖고 개인 행동을 하게 된다면,
개인은 전시 상황에서 군대의 목적인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나 자신의 안위, 즉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집단의 목적에서 벗어나 이탈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군대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집단이 힘을 갖고 개인이 무력한 이러한 사회와 집단 내에서의 개인은
자유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같이 집단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하고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 내에서의 개인보다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 취약할 수 밖에 없는 특징을 보인다.
자기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 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동일시하는 특성을 보인다.
위 맥락으로 ,집단의 힘이 큰 사회에서의 개인은
그렇게 결국에는
국가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며
국가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이고
국가의 안위가 곧 나의 안위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김연아가 박태환이 금메달을 수상하는 것은
국가의 승리며 곧 나의 승리이며
이러한 것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라 느낀다.
왜? A사회의 개인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 시 그것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나의 잘못으로 몰아가는가.
사회 구성원들이
나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 <집단>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
1.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과 집단을 동일시 하며 자기 정체성이 약할 것
2. 집단 앞에 개인의 힘이 무력함을 느껴서 , 한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역할 행위에 대해 학습된 무기력을 느낄 것
3. 집단이 가진 힘과 권력을 느낄 것
4. 3의 조건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수긍하고 받아들인 상태일 것
위 조건에 의해 인간은 사회 내에서의 자신보다 집단을 중시하게 된다.
내가 속한 이 단체가 <부정의>하고 <부조리>하며 <비합리>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라고 느끼는 것은
곧
내가 속한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며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이 받게 될 상처이자,
집단에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였기에 이는 곧 내가 받는 나 자신의 상처이다.
다수의 개인은 자신의 못난 부분이나 잘못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성숙하지 않고 미숙한 개인은 자신이 마주한 이러한 상황에서
현 상황을 부정하며 대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옳다는 믿음을 굳게 유지하며 그 믿음을 더욱 고집하거나
인지부조화를 느낀다.
다시 말해,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개인은
자신이 속한 그 사회는 크게 문제가 없으며 정당하다고 생각해야만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이 사회 내에서의 개인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때
속한 집단의 잘못을 찾고 비판하기 보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탓을 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그것이 그 개인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 파시즘 레토릭의 특징 >
보수 진영의 레토릭은 늘 승리했다.
그 레토릭의 기반은 <공포>였으며,
나는 올 초 부터 현재까지 군중심리와 공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을 하나씩 읽어 나갔다.
내가 공포라는 주제에 탐닉을 해왔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예전에 가졌던 가장 주된 정서 중 하나였고
올 초에 읽었던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80년대 세대를 공포세대라고 언급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80년대 독재의 종결 까지의 기나긴 시간 동안
시민들은 <공포>를 집단의식으로서 공유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피학성>을 내면화하며 피학적 심리가 동반하는 <무기력>을 공유하였다.
나는 시민들이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이 무기력을 <사회적 무기력>이라고 명명한다.
사람이 죽어 나갔다.
위정자에게 반하여 항거하는 사람들은 물론
(_반 정부라 하지 않고 반 위정자라고 하는 이유는,
위정자들은 국가에서 높은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국민들을 대신하여 일하는 위치이며 이들이 가진 권력의 주인은 위정자가 아니기 때문에,
위정자들을 국가라 할 수 없다. _)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 (_이승만의 반민특위가 그러하다_)도 죽였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빨갱이>라서 였다.
<빨갱이들이라서 살해되었다.>라는 사실은 ,
죽은 당사자가 진짜 빨갱이인가 아닌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민들에게 각인되는 사실은 <살해당한다.>는 것이 주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죽는다는 사실은 이미 그 죽임을 당한 사람이 빨갱이인가 아닌가의 사실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 채,
빨갱이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난 빨갱이가 아니다.>의 항변일 뿐이었다.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보이기 위해 개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방법은
<노골적으로 빨갱이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는 쟤들과 다르다는 구별짓기>였다.
그 구별짓기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해오며
공포와 혐오를 학습하며 무의식에 남아있는 아주 큰 트라우마로서 자리하게 되었다.
보수진영의 레토릭은 공포를 공유한 세대를 자극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왔다.
깊이 각인된 공포어린 트라우마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자신들이 과거에 살던 그러한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무의식은 상처받은 자신이 살던 그 때 그 시대에 강력하게 고착되도록 하였다.
인간의 해결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자신이 받은 그 트라우마의 시절에 정서적으로 고착되도록 만든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공포와 살기 위해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빨갱이 혐오는
이것이 자극되면 이전에 행해졌던 끔찍한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는 강력한 그 무엇이었다.
< 공포의 기원>
파시즘에 대해서 관찰해가면서 파시즘의 조건요소가 <공포>와 <불안>임을 보았다.
이것을 보자 마자 나는 인간 공포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또한 역시 마찬가지로 왜 특정 집단에서 유독 파시즘이 강하게 나타나는지를 (ex. 일베)
추론해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인간의 공포심의 상당부분이 죄의식과 연관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공포영화에서 주로 다뤄지는 소재는, <한>이다.
어디에서 비롯되는 한인가, 그것은 원한감정에서 오는 한이다.
원한을 품고 있는 자, 그것이 인간에게 왜 공포의 원인이 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려 한다.
1. 공포의 두 반응
인간이 공포를 느낄 때, 크게 두 가지 행동반응이 있다.
회피하거나 공격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하는 대상이 만만할 때는 공격반응이
위협을 느낄 땐 회피반응이 나타난다.
2. 공감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죄의식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사회적 영향과 교육의 영향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공감에서 기인한다.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두 부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
개인플레이 성향이 더 크고 이들끼리는 보통 집단으로 뭉치는 경우는
<이득>이 있을 때 유효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들은 모래알과 같다.
이 부류들을 제외한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윤리적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공감능력을 가진 자들이 평범한 자들이다.
(1)소시오패스와 싸이코패스 부류와
(2)평범한 사람들의 부류의 특징적인 차이는 <공감>에서 기인한다.
(1)부류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상처를 주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이들은 목적지향적이라서 타인을 도구로서 지배하려 하고 이득을 취하려 애쓸 뿐,
단순히 <언어공격>만으로 상대방을 극심한 감정적 상처 인한 공황상태에 빠뜨리게 하는데 있어서의 능력은 그렇게 좋지 못하다.
(2)부류는 타인이 어떤 점에서 아파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아픈지 입장을 바꿔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공감은 타인이 가장 아프게 느낄 부분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찾아낸다.
평범한자들이 가지는 딜레마가 이것이다.
그 공감으로 위로를 할 것인가 가장 치명적인 독설로 비수를 꽂을 것인가.
3. 죄의식
평범한 사람들은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 크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는 인간은 그리 크지 않은 죄의식을 느낀다.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 어렵지 않은 경우에는
부정 회피 투사 합리화의 방어기제의 정도는 약화되고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그 죄의식이 커질 때 일어난다.
큰 악행을 한 번 한 경우나 작은 악행의 습관화로 인한 꾸준한 누적이나 죄의식의 크기는 크다.
그것이 의식수준에서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죄의식일때,
인간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부정과 합리화와 투사기제를 주로 쓴다.
하지만 방어기제가 그 죄의식을 덮기에 역부족일 때 인간은 불안에 빠진다.
그 좋지 못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발동시키지만 그럴 수록 죄의식은 왜곡되고
방어기제 발동의 과정에서 드는 심적 소모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중잣대의 양가감정과 죄의식이 혼합되어
자아가 병들어 간다.
외면한 죄의식은 종종 악몽으로 나타나거나 특정 대상물이나 인간에 대한 공포로 전이되기도 한다.
공포영화는 주로 원한정서를 다룬다.
공포의 주체가 원한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인간은 그 공포의 주체에게서 자신이 애써 억누르고 묻어 왔던 죄의식을 자극받는다.
공포의 주체가 환경에 영향을 끼치면서 하나 둘씩 처치를 해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의 처분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4. 불안
죄의식을 방어기제로 누르는데 많은 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불안의 정도는 자신이 그 죄의식을 얼마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가의 한 지표가 된다.
죄의식으로 인한 불안을 느낄 때, 인간은 그 불안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풀게 된다.
타인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일 수도 있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며, 게임같은 취미생활에 빠지기도 한다.
가장 예후가 안좋은 경우가
그 불안을 타인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과 같이 도덕적으로 그른 방향으로 표출하는 경우이다.
사실 이것은 불안을 해결하는데 가장 일시적으로 빠르게 만족이 오는 방식이고
이 과정에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합리화가 빠르게 이뤄지기 때문에 가장 중독적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당사자를 더욱 죄의식에 가두는 꼴이 된다.
5. 파시즘과 도덕
죄의식은 부정과 합리화와 투사로 방어된다.
그 죄의식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불안은 사회를 잠식시킨다.
그 죄의식은 근원은,
자신이 타인에게 했던 잘못일 수도 있으나 ,
옆 친구에게서 우리 동네에서 우리 사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모욕하거나 잘못을 하거나 외면하고 방관하거나 그러는 과정에서도 역시 일어난다.
그것이 사회적인 대규모의 학살인 경우,
지켜보기만 할 뿐 방관하고 있는 사회 군중도 ,
어떤 소정의 혜택을 위해서 고발하는 군중도,
그 죽음을 지켜보면서 지배자의 논리에 따라
오히려 피해자들을 욕하는 군중도,
집단적으로 죄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죄의식을 무의식이 방어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극심한 공포와 방어기제는(대표적으로 부정, 합리화, 투사)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공포만 있는 파시즘은 불가능하다.
위에 언급했듯 공포 상황에서 인간은 회피하거나 공격한다.
공포와 불안을 조성한 사회에서 군중이 회피한다면 파시즘은 이뤄질 수 없다.
그래서 파시즘을 만연시키려고 하는 목적을 가진 위정자들은
대중들이 회피가 아닌 공격반응을 하도록 이끌어야만 소기의 목적을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이미 조성된 죄의식을 공격반응으로 이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대중들이 자신의 죄의식을 합리화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합리화는 이런 논리로 나타난다.
1. 폭력의 희생자들이 폭력을 당할만 해서 당한 것이라는 사회적 낙인
2. 저렇게 몹쓸 놈들을 혼쭐 내줬기에 나는 우리는 정의롭다는 허위적인 정의감
3.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폭력은 정당하다
<결론 >
그 파시즘 속에 있는 개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파시즘이 아닌 정당한 응징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원은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이며,
파시즘과 오용된 도덕 감정은 함께 갈 수 밖에 없어 진다.
파시즘은 도덕적 명분이라는 말에 의해 공고해지며, 자신들이 옳다는 정의감이 바탕되야 조건이 성립한다.
-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공포의 상황에서 먹이사슬의 아래의 부류 동물들은 집단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는데,
막상 이들도 공포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는 개인주의를 띤다.
전체주의를 띠는가 개인주의를 띠는가,
이것은 동물들의 행동 특성만 보더라도 가장 변인이 되는 것은 <공포>와 <불안>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불안정해질 수록 인간이 그것이 옳든 그르든 계급에 대한 생각을 더욱 내재화하는 경향이 있다.
주거와 일자리와 노후가 보장되어 안정된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개인들은 직업과 봉급에 따른 계급의식보다는 존중이 바탕된 동류의식을 느낀다.
서구 유럽권에서 개인주의가 확산되어 있지만,
막상 사회 내 도덕적인 문제나 여러 문제가 생길 시, 그 개인주의자들은 오히려 연대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평소에 이들이 느껴오던 가치관인 계급의식이 아닌 동류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인주의가 보장된다는 건,
집단이 개인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그 사회가 민주적이라 개인을 그리고 다른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러한 똘레랑스의 가치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안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이 내 관찰이다.
민주주의는 <안정된 사회>에서 그 기능이 순기능을 띠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다수결의 폭력"으로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개인주의는 침해된다.
결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순기능을 하면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경제적 정치적 안정으로
내가 집단 내 타 구성원에 정치가에게 기업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안정된 사회여야한다.
ps. 추가적으로
피해자의 항변은 <남탓하지마, 다 너 때문이야.>라는 모욕으로 대답이 돌아올 뿐이며,
피해자에게 지나친 <내사 - 자기탓>를 요구하게 되죠.
지나친 내사의 요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상대방에게 가하는 과도한 투사이기도 합니다.
즉.. 가해자 입장에서 ,
지나치게 피해자의 탓을 하며 <너 때문이다. 당할만 하니 당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의 그릇됨에서 느끼는 불편한 죄책감을 벗어 던지기 위한 하나의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단 폭력은,
더욱 잔인해질 수 밖에 없죠.
괴롭힌 당사자들은 자신의 사악함과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마주하지 못하고
그 불편한 감정을 온전히 상대방에게서 더 잘못을 찾으려 하면서 더 큰 <정의감- 정당화>을 느끼며
그 폭력의 정도가 점점 악랄해집니다.
폭력과 동시에 과도한 내사( 이 모든 게 피해자인 나 때문이다)를 요구 받는 것에서 오는 인간성의 훼손이야 말로
폭력의 가장 잔인한 한 단면입니다.
왕따도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왕따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한 둘 있긴 있죠.
그러나 그것에 대해 과도한 폭력을 가하고 그것에 대한 정당화와 모종의 정의감에서 비롯되는
파시즘은 옹호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지만,
위 댓글과 같은 집단 폭력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본래 왕따가 일어났던 그 원인이 되는 싫어하는 점이 갖는 무게에 비해
더 큰 무게의 <탓>이 돌아옵니다.
실제 잘못의 크기가 1이라면, 집단폭력으로 발전하게 되면 5~7 정도가 되는 과도한 <탓>이 피해자에게 돌아갑니다.
그 <탓>이란 수 배로 부풀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은 그것이 수 배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죠. 자신들의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믿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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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파시즘을 집단주의의 산물이라고 흔히 잘못 알려져 있지만 기본적으로 파시즘이 가장 잘 나타나는 구조는
고독한 개인이 국가와 직접 맞닿는 구조입니다. 즉 더글라스에 의하면 개인적 집단성이 낮으면서 개인의 사회적 역할을 엄격하게
규정짓는 사회 구조에서 잘 나타나죠.
말씀하신 공포가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개인 빼면 국가라는 사회조직을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인의 투쟁상태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 유일한 자신이 속한 사회 조직인 국가에 모든 판단과 자유를 맡기고 거기에 복종만 하죠.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파시즘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절대자인 국가 아니면 인간은 주변 사람에게 생각보다 복종하지 않습니다.
다른인간에 대한 복종은 오로지 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죠.
우상화도 이런 이유입니다. 국가란 추상적인 존재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상징적 아이콘- 바로 독재자- 죠
이런 이유 때문에 정작 국가에 해가 되는 일도 그들은 국가의 현신인 독재자에게 이득이 된다면 적극 지지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파시즘 문제에서 공포는 복종 기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즉 공포 스러운 순간에서 자기를 지켜줄
상대가 국가 밖에 없고 그에게 모든 판단과 자유를 맡기는 대신 복종하게 됩니다.
하나 국가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한 인물로 구체화 시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의지가 국가의 의지로 치환되게 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지지하게 되는 거죠.
이게 대충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내용을 파시즘에 대입한 내용입니다.
사회학이나 이쪽에 좀더 가까운(다루는 영역이 뉴런 두개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둘이상의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에 더 가까운) 다른 분과학문영역에서 '파시즘'은 역사상 관찰된 '특정한 조건에서 발생한 정치경제적 운동'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극우적 평가(사실 극우라고 보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는 전간기~2차대전기 까지 관찰된 파시즘의 대표적인 사례인 '파시즘', '나치즘', 그리고 그와 유사한 일본제국에서의 전개에 대한 평가죠.
아무래도 저의 경우 전공이 '둘이상의 개인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사회학이다보니 파시즘의 미시적인 기초로서의 공포보다 '파시즘'의 (정치)경제적인 기초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부연해보면, 인간이라는 종의 개체들은 (예외는 있지만) 상당히 높은 비중으로 '도덕적인 감정'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이 도덕적인 감정과 결부되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 구성 양상은 내적조건 뿐 아니라 외적조건의 영향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죄의식'같은 경우 '당연시 되는 것'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일이며, '공감을 위한 신경활동' 자체가 외적조건에 의한 강한 되먹임을 받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의 죄의식은 '상당한 수준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당연함'을 위해 활동하지 못한것에 죄의식을 가지지만, 다른 누군가는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해도 죄의식을 가지지 않습니다. 실례로 나쁜조건에서 영아살해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장애아' 등을 죽이는 일은 특별한 죄의식을 야기하지 않습니다(애착형성이 이루어진다면 죄의식이나 강한 슬픔등이 나타날 수 있지만, 해당하는 사회에서 영아살해는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으로 '애착형성'에 필요한 기간보다 이른 시기에 수행됩니다).
따라서 '죄책감' 자체가 특정한 맥락에서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파시즘'과 같은 극단주의의 성패에 '사회구조적 조건'들이 주는 영향이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공포'와 같은 생리적기제가 주는 영향보다 클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상적인 파시즘의 경우 '사회'내에서 서로 '비등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사이의 갈등을 주요한 조건으로 하며, 불안정한 사회라고 해도 해당하는 종류의 조건이 없다면 '공포'는 '파시즘'이 아니라 다른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죄의식과 공포에 대해서 이 책 저 책을 보면서 대충 가지게 된 견해라면, 이것은 결국 '이렇게 행동하면 무리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 라는 공포가 내면화된 것이 죄의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이 밝혀질 상황이 되면 죄의식을 새삼 강렬하게 진심으로 느끼는 경우를 왕왕 보지요. 해묵은 죄가 밝혀질 상황이 되면 새삼스럽게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 왜 체포가 임박하니까 새삼 죄의식을 느끼는 지 웃기기도 하지만, 이게 퍼포먼스가 아니라 진심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무리 본능' 의 일종인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죄의식과 공포, 더 나아가서 폭력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아닌가 싶....
제가 들어있는 분과학문에서는 '파시즘의 미시적인 기초'하고 사회적 실제로서의 '파시즘'을 나누어 보니까요.
전자는 말씀하신 바와 같은 '죄의식', '공포', '폭력'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이 공유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요인과 상호작용하는) 생리적인 기제에 가깝다면, 후자는 (해당 기제에 기초하여) '특정한 조건'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사회현상'으로 봅니다.
따라서 전자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구성원 의사의 '편향'은 '파시즘'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극단주의'나 '구조적 폭력'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으로 보고, 그러한 '양상'을 '파시즘'이라고 호명하지 않습니다.
전간기~2차대전기동안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나치즘에 대한 연구는 '좌우갈등'을 주요한 '파시즘'의 대두조건으로 보니까요.
파시즘은 '자발적참여'요소를 가짐과 동시에 '동원에 기초한 사회운동'으로서의 성격도 보이는데,
집단적응집성이 낮은 '개인'이 자발적 참여를 수행하는 동기가 되거나 사회운동에 해당 개인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충분할 정도의 위협'을 제공할 수 있는 분열선이 필요하고, 전간기에 양국에서 나타난 '좌우갈등'이 그 '분열선'으로 기능했다는 해석이죠.
다른 조건에서는 공포/죄악감/분노와 같은 심리적 기제에 기초한 '편향'이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당장 현대중동, 미국 등에서 관찰되는 '근본주의'라는 양상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위에서 (도덕적)감정에 기초한 편향이 드러나는 한 사례죠.
최소한의 근거제시도 없이 파시즘을 전제주의 보수진영과 동일시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우파와 파시즘을 구분해 놓은 자신의 그래프를 반박하고 있네요
보수주의는 굉장히 나쁘고 리버럴 진보진영은 찬양에 가깝게 설명을 하고 계시는데 근거가 빈약하고 논리적 연결성도 부족합니다
파시즘에 대한 글이라고 한다면 어느정도 납득이 될수도 있겠지만 공포, 불안, 폭력성, 개인의 가치에 대한 것을 보수진영과 엮는 시도에서 큰 실수를 하신 것 같구요(이런 실수는 PGR에선 안보이겠죠??)
파시즘은 모든 강경한 입장에서 나타난다고 하는건 리버럴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매도하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예를 들어도 극도로 강경한 입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종교인이나, 의료계, 노동조합등이 있을텐데 그런 분야마저 파시즘이라고 하신다면 글자체가 모욕의 성격을 띄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리버럴이 강경한 입장을 띄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또 리버럴이란 용어도 글내에서 명확히 정의되지 않아서 반박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리버럴의 장점으로 예를 든 집단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다와 타인에 대한 존중도 경찰의 무력진압이나 다수의 폭력에 밀린 소수파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