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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3 14:15
근 10년간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은 입장에서 참 많은 도움이 되고 즐겁게 읽었습니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황제를 위하여를 살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안 살 수가 없군요. 박상륭은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읽다가 쌌고(아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국내에서 읽다 싼 독자수 컨테스트 투탑 아닐까 싶습니다)..
이문열은. 개인적으로 '문재는 있으나 사람이 아쉽다'는 세간의 평가에 완전히 반대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어낸 삶과 역사를 하나의 완성물로 꿰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리고 글쓰기 자체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으나) 그것이 '문학'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실패'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본문과 아래 노벨문학상 덧글의 팟저님에게 거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차라리 그가 사상가 혹은 정치가였더라면 조갑제 급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조갑제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인재와 문재는 그래도 수준급이라고 생각하는지라). 황석영은 방향이 조금 다른 이문열의 우화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 본문에서 빠진 작가 중에 주목하고 싶은 작가는 성석제와 김훈, 조세희입니다. 성석제는 제가 글을 읽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제 마음속의 국내 작가 Top5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영도가 있었고 백민석이 있었고 서정인이 있었고 김승옥이 있었고 김훈이 있었고 막 아무나 들어갔다 빠졌다 하는 조악한 리스트지만, 성석제는 빠진 적이 없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성석제를 좋아합니다. '이야기의 구축'. 그래요. 소설은 결국 이야기죠. 모옌과 위화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피로 얼룩진 중국 근현대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도, 그들이 정의로운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을 쓸 수 있는 작가였기 때문이지요. 기초적인 '이야기의 완결성'을 만들어내는 차원에서, 성석제만한 작가를 국내에서 찾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찾자면 김영하나 정유정 정도가 꼽히는 느낌이나, 김영하는 도저히 취향이 아니고 정유정은 몇권 선물만 받아 놓고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은지라 씁 할 말이 없네요. 둘째로, 성석제는 소위 '한국 현대 소설'과 '한국 토속 소설'의 경계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정말 귀중한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국내 문학상 단편 수상집 등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두 개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문체가 도드리자는 작가가 없다.' 그리고 '지나치게 도시적이거나 지나치게 토속적이다.'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군의 작품은 지나치게 도시적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문제겠지요. 한국 자체의 도시 집중도가 그러하니. 그리고 중간 중간에,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표현들과 소재들로 이루어진 토속적 소설 몇 개가 있습니다. 두 개의 소재군을 한 작품 내에서는 바라지도 않으니 여러 작품에서라도 자연스럽게 쓰는 작가를 찾기란 힘이 드는 이야기지만, 성석제는 이걸 해내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여행의 이야기와 논두렁 건달의 이야기와 도시 회사원의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 있는 '한국적' 작가. - 김훈은 칼의 노래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하죠. 무기력한 실존주의자로서의 이순신이라니, 사실 접근 방식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괴작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이기에 플롯 구성 면에서 꽤 많은 이득을 얻기는 했겠으나, 그와 상관없이 정말 단단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주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이상 읽은 몇 안되는 한국 소설입니다. 하지만 한국적이지 않죠. 소재는 지극히 한국적이나, 감상은 지극히 보편적입니다. 아, 중간 중간 그 나이대의 남자 작가들 특유의 K저씨 감상이 켜켜히 있어 약간 아쉽기는 한 느낌이지만. 물론 더 아쉬운 것들은 김훈의 에세이집이겠죠. 문재가 어쩌고 사람이 어쩌고 하는 문장에 가장 적합한 작가는 이문열이 아닌 김훈이지 싶습니다. 아, 추가로 아쉬운 것. 칼의 노래 이후의 작품들이 자꾸 자기-복제적인 느낌으로 가는 느낌입니다. 언젠가 '자기완결적 실존주의/탐미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는 결국 딱 한 권의 작품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생각의 기반을 만들어준 작가가 김훈과 미시마 유키오였습니다. 아쉬움은 잠깐 접어두고 김훈 한번만 더 빨고 끝낼까요. 김훈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시죠.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이런 문장으로 소설을 쓰다니. 반칙입니다. - 조세희. 장편소설은 하나 뿐이고 그 외에도 작품이 없으며 그 후에도 작품이 없습니다만. 현대 한국 문학에서 단 한 사람의 소설가를 뽑으라면 성석제지만, '단 한권의 소설'을 뽑아야 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난장이아 쏘아올린 작은 공>을 꼽으렵니다. 200쇄를 돌파한 소설이죠. '사회적 소설'을 넘어 문학적으로 소설 자체의 위대함이 압도하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교과서에서 빼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에 있는 소설이라 잘 안 읽게 되는 경향이 있고, 교과서에 있는 소설을 다시 보게 되는 주 메커니즘은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을 우연히 보고 '어 교과서에 그것도 실은 좋은 거 아냐?'하고 다시 보는 경우인데 조세희는 다른 작품이 없엉...개인적으로 재평가할 리퍼런스가 없엉... 현실과 환상의 교차. 지독한 리얼리즘 속의 실존주의 혹은 실존주의의 지독한 구체화. 눈 앞의 꽃잎과 저 멀리 마을의 거리감. 대극적인 서사와 발상과 사상과 이미지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그리고 담담하고 편안하며 씁쓸하고 짭짤하게 그려낸 작품을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노벨문학상이 '현재 생존한 작가 중 최근 대표작이 있는 작가'로 제한되는 대신 '현재 생존중인 작가'로 제한된다면, 당연히 한국 최고의 노벨문학상 후보는 조세희라고 생각합니다.
14/10/13 14:53
성의있는 답변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저도 잘 읽었어요. 헌데 정작 손 놓으셨다는 10년간 발표된 건 우주피스와 누나 뿐이라 헥스밤님께서 받으셨다는 도움이 한편 송구스럽네요.
난쏘공이야 저도 공감하구요. 김훈의 경우 보통 한국 작가들이 취약하기 마련인 구성미에서 워낙 강점을 보이죠(이 부분이 단점인 대표적인 작가가 이승우라고 봅니다). 앞뒤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화장>과 한강의 <몽고반점>을 대조해보니 아주 잘 드러나더군요. 형상화하려는 주제/이미지의 명징성이며 미감은 분명 한강의 몽고반점이 낫고 보다 면밀히 파고 들어 구체화도 잘 되는데 중간중간 뻘스러운 장면이 아무래도 거슬립니다. 화장은 그런 게 없죠. 다만 언급한대로, 칼의 노래면 몰라도 그 이후의 작품군에선 플롯을 통해 주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부분에 있어 아쉬움이 남지 않나 싶어요. 그러고보면 김진규의 달을 먹다를 보며 비슷한 아쉬움이 들었죠. 사장은 기가 막힌데 그뿐이구나. 물론 김진규는 전체적인 소설 구성의 짜임새에 있어 군데군데 허술한 부분이 눈에 띄었기에 마냥 김훈을 떠올리긴 무리가 있었습니다만. 한편 읽으며 감탄했던 건 사장만 수준 높아도 소설의 격이 이렇게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구나, 랄까요. 자칫하다간 흔해빠진 고전 비극의 조선 버전이 될 것이, 어쨌건 읽는 것만으로 직관적인 즐거움을 전해주더군요 성석제 취향이시면, 본문에도 나와 있는데, 하일지 누나 한 번 읽어보세요. 그 흔한 사투리 없이도 지방색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보면서 배꼽을 잡으실 겁니다. 허삼관 매혈기보다 잘 썼어요. 음, 뭐 본문에서 지시한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만
14/10/13 15:52
아 좋습니다. 박상륭 글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좋네요.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한 연구에서 품배 품배 가 들어가는 노래가 나중에 자진모리 장단 휘모리에서 다시 등장할 때 가, 가버렷... 했답니다. 이후에 촛불승 까지는 어떻게 잘 버티었는데요. 씨름부터는 조금 불만이 많았네요. 막판에 너무 급했다는 대 동감합니다.
이문열은 개인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너무 좋아하는 편이라 저도 저 넷 중에선 제일 좋아하는 작가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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