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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12 22:43:42
Name Neandertal
Subject [일반] 공포의 심연은 너 자신 속에 있지...
[옛 친구로부터 편지가 날아옵니다. 자신이 최근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니 좀 와달라는 내용. 친구의 집에 도착한 그는 친구의 쌍둥이 여동생을 보게 되고 곧 그 여동생은 죽습니다. 친구와 함께 친구의 여동생을 지하 묘지에 안장하고 관에 못질까지 했는데...어느 폭풍우 치는 날 밤...죽었던 여동생이 그와 그의 친구를 방문합니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던 첫 아내는 죽었고 이어 결혼한 두 번째 아내도 병으로 사망합니다. 둘째 아내의 관 옆에서 밤을 지새우는 남편...하지만 죽었던 두 번째 아내에게 생명의 기운이 돌아오는 것 같더니 어느새 첫째 아내의 모습으로 변해서 관을 걸어 나온다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고 표류하던 중 지나가던 어떤 거대한 검은 배에 오르게 되는데 그 배는 수백 년 전의 배였고 그곳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주인공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배는 결국 남으로 남으로 가다가 거대한 빙벽들이 둘러싸인 남극의 바다 한가운데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침몰하고 마는데...]

만약 지금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작가가 위의 내용을 썼다고 하면 너무 진부하다고 피디에게 퇴짜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 글들이 무려 18세기 전반에 쓰인 소설의 내용들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도덕적인 메시지나 특정한 사상의 전달 매개체로서의 소설을 거부하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공포를 날것인 채로 드러내는 데 집착했던 작가...그의 이름은 바로 [에드거 앨런 포]였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의 근원은 외부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유령이니 악령이니 하는 것들은 단지 우리 내부의 불안과 광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기루 같은 것일 뿐이다...아마 이런 명제를 가장 잘 적용시킬 수 있는 대상들이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불안정하고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러한 과거의 그림자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고 말지요. 겉으로 보이는 파국의 원인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같지만 기실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불러온 허깨비들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에드거 애런 포의 이러한 소설들은 당대에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포와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그와 무척 대비되는 작가가 바로 너새니얼 호손입니다. 호손이 쓴 단편 [큰 바위 얼굴]은 제가 학생이었을 때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었지요. 청교도적인 도덕관을 바탕으로 겸손하고 묵묵히 자기성찰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이상적인 인간관으로 제시하는 이 소설은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메시지의 도덕성과 교훈성을 인정받았지요. 이런 소설이 인정을 받던 시대에 위의 내용과 같은 소설을 써댔으니 포가 생전에 이렇다 할 평가를 받지 못한 게 오히려 당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그의 소설들은 본국인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 등에서 재평가를 받았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추리소설과 SF소설, 미스터리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작가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같은 경우 주인공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를 셜록 홈즈와 왓슨으로 바꿔놓으면 코넌 도일이 썼다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추리소설이 됩니다.

평생 인간의 광기와 공포의 근원에 집착했던 그의 작품세계가 결국은 새롭게 평가를 받게 된 것이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재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스티븐 킹 같은 작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으로 에드가 앨런 포를 꼽아도 전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에 포의 광기와 공포의 세계로 한번 빠져보는 건 어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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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생 밀수업자
14/10/12 22:44
수정 아이콘
이 사람 시도 좋은거 많죠.
Neandertal
14/10/13 08:36
수정 아이콘
[애너벨 리], [갈가마귀]가 유명하다지요?...물론 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포의 활동 영역을 세 가지로 봤을 때 (평론가, 소설가, 시인) 결과물의 성취를 따지면 시 > 소설 > 평론 이라고 하더군요...
14/10/12 22:46
수정 아이콘
첫번째 단편집이랑 세번째거랑 내용 겹치는거겠죠??
Neandertal
14/10/12 22:49
수정 아이콘
겹치는 작품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검은 고양이] [어셔 가의 몰락]같은 작품들을 빼놓을 수 없을 테니까요...
14/10/1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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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도 너를 바라본다는 사실에 주의해라.
Tristana
14/10/12 22:52
수정 아이콘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이랑 도둑맞은 편지 봤는데 재밌게 봤었네요.
swordfish-72만세
14/10/12 22:53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게 웨스트포인트 중퇴였죠. 이런 사람이 장교가 될뻔하다니...
전립선
14/10/12 22:53
수정 아이콘
삼천포입니다만 우울과 몽상 양장본 정가 3만원짜리 책이 70~80% 할인해서 팔리더군요.
요즘 출판업계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王天君
14/10/12 22:56
수정 아이콘
어디서 팔아요?
전립선
14/10/12 23:15
수정 아이콘
예스24에서 샀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몇달 지난 일이라서요.
王天君
14/10/12 22:55
수정 아이콘
그냥 두꺼운 걸로 우울과 몽상 한 권 날 잡아서 챕터별로, 혹은 작품 별로 읽으면 됩니다. 끌끌. 읽다보면 머리가 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긴 해요.
고자질쟁이 심장이 기억에 남네요. 어셔가의 몰락도 정말 좋지요. 읽고 있다보면 눈이 충혈되는 것 같아요.
마나통이밴댕이
14/10/13 00:32
수정 아이콘
비교 대상이 좀 매우 많이 가벼워진 감이 있지만...
혹시 밤 새면서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 볼 때 느낌과 비슷할까요......?
王天君
14/10/13 00:59
수정 아이콘
백귀 야행을 제가 안봐서...일본 순정(쪽에 가까운) 만화 아니던가요?
마나통이밴댕이
14/10/13 01:03
수정 아이콘
농담삼아 해 본 말입니다;;;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만, 작품이 순정답지않게 상당히 우중충해서 비오는 날 밤에 몇 시간 보다보면 정신이 멍해집니다............
王天君
14/10/13 01:05
수정 아이콘
그런 류의 작품이라면, 에드가 앨런 포에게서 전부 태어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올해기아우승이네
14/10/12 23:10
수정 아이콘
호손이라고 하면 예전에 지겹게 봤던 그게 떠오르네요.. 전화기 공장..비공식 집단..
Darwin4078
14/10/12 23:59
수정 아이콘
이거 보고 러브크래프트 전집 보시면 제대로 일듯. -0-;

솔직히 지금 관점에서 러브크래프트 단편들 보면 좀 허술하고 딱 B급 정서가 물씬 풍기는데 그게 또 잔재미가 있더라구요.
JISOOBOY
14/10/12 23:59
수정 아이콘
[리지아]는 읽은 후에 너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 작품입니다.
무섭다곤 생각해본적이 없네요. 리지아의 아름다움에 대해 나열한 묘사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열렬히 독백하는 대목은 정말이지 최고!
이치죠 호타루
14/10/13 00:08
수정 아이콘
첫 번째 게 어셔 가의 몰락이었던가요.
추리소설의 대가죠. 검은 고양이 처음 읽고 밤에 공포에 떨었던 게(원래 좀 심약하기도 합니다. 피 못 보고, 바퀴벌레 못 보고 못 잡고.) 기억에 남는데, 그렇게 괴기스러운 작품이 1840년대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14/10/13 00:24
수정 아이콘
동서추리문고의 단편집으로 읽었는데 그 거지같은 번역 속에서도 굉장히 섬뜩했어요. 전염병 얘기 나오는 짤막한 단편이 진짜 후덜덜했던 기억이 있네요.
SugarRay
14/10/13 16:01
수정 아이콘
적사병 가면일 겁니다
minimandu
14/10/13 01:25
수정 아이콘
진정한 천재죠. 훗날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당시엔 없었던 장르를 처음 시도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그만의 음산한 분위기에 빠져드는 느낌에 어린시절 그의 단편집을 이불쓰고 끝까지 정주행한 기억이 납니다.
그 이미지의 잔상들이 며칠간 머릿속을 떠나질 않더군요.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단편은 [젊름발이 개구리] 였습니다.
왕삼구
14/10/13 03:47
수정 아이콘
우울과 몽상 저 책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고 까이더군요. 사려다가 포기했습니다.
그것은알기싫다
14/10/13 05:14
수정 아이콘
근대미문학이었던가.. 학교 강의시간에 나다니엘 호손이나 에드가 앨런 포 등은 작품을 배운 기억이 있네요
몇년 지나서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미국 이민사회 초기를 배경으로 아주 어둡고 그로태스트한 작품을 배운 적이 있는데
소개하신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14/10/13 10:40
수정 아이콘
세계문학전집의 한 귀퉁이에 실려 있던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과 검은 고양이를 읽게 된 것을 계기로 포를 알게 되었죠.
어릴 때라서 작중 인물로 뒤팽이 나오길래 이거 루팡 따라한거 아냐? 라고 했었습니다 --;
Neandertal
14/10/13 10:50
수정 아이콘
포가 들었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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