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추석 연휴를 앞둔 평일이었다. 친구들과 XX역앞에서 거나하게 한잔 마시고 집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집으로 간다고는 해도 명절맞이 귀향이 아니고 그냥 하교길이다. 당시 나는 정기권을 끊어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깨질듯한 머리를 감싸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도 채 비비기 전에 동네 방앗간에 가서 찹쌀을 빻아오라는
집주인어머님의 명을받아 스뎅 소쿠리에 찹쌀을 두어되 담아 집을 나서는데..
집앞 사거리 신호등 너머로 비추는 강렬한 햇살에 내 머리속을 스쳐가는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정말 번뜩이듯이 지나갔다. 나쁜놈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이댄 순간 킬러의 머릿속에서 슉슉 지나가는 플래시백 처럼...
황급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어 번호목록을 뒤졌다. 복학한지 얼마안되어 백명이 채 안되는 목록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있다.. 있었어.. 김XX... 그 당시 내 폰엔 김씨 여자가 10명은 넘고 수진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8~9명쯤 되었지만.. 이 번호가 어제 기차를 타기 전까지는 내 폰에 없었던 번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번호를 확인하고 나니 플래시백이 몇개 더 지나갔다. 술을 그렇게 처먹고 마시고도 객차사이 칸 바닥에 앉아서 기차에서 팔던 카스를 홀짝 거렸다. 그리고.. 옆에 누군가 있었고 습관처럼 '어디까지 가세요?' 라고 물었던거 같다. 그런데.. 구체적인 대화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기차를 타다보면 뭔가 보는눈이 생긴다. 출근길 직장여성분들은 그 어떤 질문을 던져도 블로킹이 대단하다. 몸쪽 직구를 95마일로 꽂아도, 눈높이에서 무릎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커브를 던져도 배트가 나오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학생들한테는 잘 통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제 내 스터프는 80마일도 안되는 직구라서 굳이 메이저에 가보지 않고 고교생들만 상대해봐도 형편없는 공인건 누구나 다 알기 마련아니겠는가..
말문을 트기 상대적으로 쉬운 경우는 주말이나 연휴를 앞두고 귀향하는 사람들이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주저하다가도
'저는 XX까지 가요' 라는 말을 붙이면 곧잘 대답을 해준다. 어차피 곧 내릴 놈인데.. 죽은 사람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뭐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여간 요딴식으로 작업을 걸고 번호를 따던 습관이 취중에 자연스럽게 나온 모양이고 또 번호를 땄다.
고민고민하다가 점심시간이 지나고 문자를 보냈다. 그냥 의례적인 문자가 오가고 전화를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술냄새가 조금 나긴 했으나 별로 취해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굉장히 또박또박 말을 했다고 한다. 그게 내 술버릇이다. 안취한척 하려고 행동도 천천히 하고 말도 천천히 하거든..
만나기로 했다. 연휴가 지나고..그 다음 토요일인가.. 어딘가에서 만났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1호선 전철을 타고 간 인천의 어디였다. 커피숍에 들어갔고 얼굴을 마주하니 기억이 더 날거 가기도 했다. 쌍커풀이 아직 자리잡지 못했지만 귀여운 편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내 나이 ±1살 정도 였던거 같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 교회 다니세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조~~기 밑에 메이저리그 글쓰시는 분... 버스에서 만나신 분과 데이트하신다길래..
갑자기 생각나서 써봤습니다.
저주가 역레발이 되길 바라며...크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