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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10 16:53
근대 상황이 저리 막장인대 백전노장 최영은 왜 우왕대리고 몽진을 안갔을까요 이괄도 거의 2주만에 한양찍었는대 인조는 떠나버리고 없었는대 말이죠
14/03/10 17:00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우왕이 서경에서 개경으로 이동할 당시, 이미 그 주변까지 위화도에서 온 군대가 도달한 상황이었습니다. 개경을 버렸다 해도 남쪽으로 이동하기도 전에 따라잡혔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동속도였습니다. 우왕의 경우 인조 등과는 달리 처음부터 수도에서 이동한것이 아니라, 서경에서 수도로 이동하던 상황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14/03/10 17:08
실제 기록으로는 남쪽으로 몽진은 커녕 개경에 입성하는 것 조차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우왕은 5월 28일에 지름길을 달려 이튼달이 되는 와중에 개경에 입성했는데, 이 당시에서조차도 워낙 급하게 도주하는 통에 우왕 주변에 겨우 50여명이 같이 따라올 수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였는데도 불과 이틀 정도 사이에 원정군이 개경에 도착했으니, 설사 도주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저항 세력을 뭉치게 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14/03/10 17:04
선조급 도주스킬이 있다해도...남부에서 끌어올 병력이 없을거같다 뭐 이거죠...(부산에서 한양까지 20일만에 작살났는데 이미 날라버린...선조수준의 도망능력은...수준급 아닙니까?)
14/03/10 17:00
조선은 인조 말고 다른 변수가 없는데 (있다면 소현세자 정도? 오자마자 독살됫죠) 고려는 이미 그무렵에 우왕보다 이성계의 명망이 더 두터웠던 것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왜군보다 이순신을 더 싫어한 이유랑 비슷하다고 봅니다.
14/03/10 16:58
요즘 정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원정군에 최영을 대장군으로 보냈으면 역사가 어떻게 됫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우왕은 알고보면 이인임이 아버지가 아니라 최영이 아버지인듯...그리고 생각보다 멍청한 왕은 절대 아니구요. 드라마에선 멍청하게 나오지만...단지 힘이 없었을뿐이라고 변호하고 싶네요.
14/03/10 17:18
당연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드라마나 역사에는 우왕을 너무 멍청이로 묘사하고 있다보니...나름대로 변을 했습니다. 멍청하기보단 힘이 없었노라라고...그리고 설마 우왕이 정말 신돈의 아들이었을까요. 승자의 논리일 뿐이죠.
14/03/10 17:29
여기 댓글에서 본 건데, 실제로는 우왕이 이인임의 여노비에 꽂혀서 이인임 집에 들락날락 거리자 이인임이 아예 집을 내줬고, 감동한 우왕이 그 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다더군요.;;
14/03/10 17:39
원명교체기를 생각하면 일단 우왕의 뻘짓거리임에는 틀림없으나 보낸다면 둘다 가는게 맞지 않았나 싶어서요 구지 이성계를 남겼다면 반란이 오히려 어렵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최영이 휘몰고 돌아오면 이성계는 사형 크리이니까요
14/03/10 18:15
최영을 자기 곁에 냅두면 원정군총사령관임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지 않게 한건 본인 신변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괜히 최영의 딸과 결혼해서 장인어른으로 삼은 게 아니었는데.......역사는..... 크...결국 그 한수가 최악의 한수가 되어버렸죠
14/03/10 17:22
일단 직업군인에 가까운 주력군은 이성계에 다 딸려보냈을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각 군현의 병사들이야 대개 원래 농민이었을테니 요동 치라고 보낸 병사들과 질적 차이가 엄청 컸을 겁니다. 남쪽으로 어떻게 피난간다고 해도 이미 왜구 때문에 피폐해져있기도 하고 고려가 조선만큼 중앙의 지방 지배가 강한 나라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근왕 한다고 의병 끌어모아 왕에게 달려올 사대부들의 나라가 아니니...
14/03/10 17:40
궁금한건데 저렇게까지 무리하게 원정을 간 이유는 뭔가요??
당시 이성계 충성심은 전혀 의심받지 않았던 건가요? 최영이 마치 홍명보 '내가 대신 군대간다' 이런 식으로 보증했나요?
14/03/10 17:41
원정군의 분위기는 출정 할 당시부터 최영이 장수들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으려고 했을 정도로 뒤숭숭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성계 한 사람의 의지로 5만 군대가 방향을 바꿨다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여타 무장들도 원정에 대하여 회의적인 편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 합니다.
14/03/10 17:42
반란인걸 각오하고서도 그런 강행군을 수행한 장졸들을 생각하면 이성계 세력 뿐 아니라 고려군 내에 전반적으로 이성계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군요...
14/03/10 17:52
하시바 히데요시의 쥬고쿠 대반전은 대략 180km 를 9일만에 [걸어서] 회군한 속도였는데,(단순 거리로 따지기 뭐한 대부분 일본 지형이 그렇지만, 진군하기 별로 좋지 않은 길입니다.) 대략 1일 20km 진군속도였죠.
평균 1일 16km 였다는 중근대 시대의 평균 진군속도에 비교하면 무진장 빠른것이기도 한 이 회군으로 일본전국의 패권을 이어 받았죠. (제 개인적으로는 회군 속도보다는 회군을 결정하고 실행을 한 결단력이 더 빛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대략갸 230km 이고, 이걸 19일 걸렸다는건, 1일 12km 속도면 느리다고 할 수는 없는 속도입니다. 그런데 회군할때는.. 사냥까지 하면서 [천천히] 회군했다는 속도는?? 대략 400km를 9일만에 주파! 정말 후덜덜한 진군 속도군요.
14/03/10 18:01
애초에 위화도에서 이미 역성 혁명은 설득이 끝났다는걸로 보입니다. 그냥 정벌 못하겟으니 돌아오겠소라는 수준이 아니죠.
그러고 보면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조 수양대군을 보면 결의를 하면 시행이 신속하다라는 공통점이 있네요. 피는 못속이나봅니다.
14/03/10 18:03
원리원칙의 최영과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합작하여 벌린 뻘짓이죠. 물론 성공했다면 우왕의 입지가...원명교체기와 내부 단속을 너무 우습게 본 댓가이긴 합니다.
14/03/10 18:21
조선 고종 때 간도에 관리 보내면서 집적?대는 것도 그렇고 이 경우도 그렇고
말년에 남의 땅 욕심 내는 거보다는 내치부터 잘 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14/03/11 09:42
그당시 군부를 이성계가 장악했다고 보는게 맞는것 일까요? 궁금하군요,,,
쉽게말해 이성계가 5만의 군대를 조직적으로 움직일수 있는 힘을 가졌는지가 핵심이겠군요,,,
14/03/11 10:45
제가 아는 지식에서 군부는 최영이 오랫동안 장악했고 당시 포지션만 봐도 이성계는 뛰어난 무장이자 최영의 조력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구지 말하면 이순신이 이성계고 권율이 최영이다 정도로 보시면 더 맞을 듯 합니다.
단지 최영은 구 고려를 옹호하는 입장이고 이성계는 신진 사대부들의 추대를 받던 입장이다보니 명을 치는게 옳지 않다는 대세에 힘입어 거꾸로 역성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죠.
14/03/11 11:14
답변 감사합니다.
계속되는 궁금증이 그렇다면.. 이성계가 이끈 5만에 병력중에는 최영을 따르는 충복들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 충복들이 이끄는 병력도 적어도 2만~3만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완전 개인생각 ..추측)해 봅니다. (좋은 지식 있음 알려주십시요.) 그리고 그 충복들은 이성계를 감시하는 역활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 당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권력다툼은 분명 존재 하고 있는상황에서..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 군부핵심 '이성계'에게 고려군대 핵심전력을 준 상황도 이해가 떨어지고 만약 주었을 때.. '권문세족'들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잇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한 것인지? 알고잇는 지식이 부족하여 물어봅니다.
14/03/11 12:50
그건 사실 더 복잡한데 이인임 등이 거의 고려의 마지막 권문세족이라고 봤을때 우왕이 왕권 강화를 위하여 전부 참형에 처하고 재산을 적몰한 시점부터는 이미 신진 사대부들이 전면에 대세로 나섰습니다.
군부는 이미 전공이 많은 이성계 일파가 다수였고, 우왕 입장에서는 왕권 강화를 성공리에 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판한 것이 신진 사대부들이 기존의 고려의 문벌 귀족에 환멸이 나 있던 상황이었죠. 원명 교체기라는 것도 신진사대부에게 힘을 실어주었구요. 거기서 우직한 무장인 최영이 결정적인 오판을 한게 본인처럼 다수의 무장들이 고려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구요. 아마 이번~다음달에 걸쳐서 위화도 화군이 정도전에서 방영될텐데 그 복잡한 심리 내면을 어찌 그려낼지가 기대됩니다.
14/03/11 13:07
답변 감사합니다.
참으로 복잡한 상황이군요.. 신진사대부들의 성장이 왕권의 강화와 관련되었다면. 그 성과는 어느정도 있었다고 (가정)하고.,, 그당시 신진사대부 '친명정책' vs 권문세족 '친원정책' 사이에서 마지막 순간 결정을 내려야 했던 '우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키운 '신진사대부'의 정책을 선택하지 않고 '권문세족'의 정책을 결정한것이... 그 때 당시 두집단의 최대 권력다툼에서 '신진사대부'가 밀려난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것인가요?
14/03/11 13:16
그 반대죠. 공민왕 이후로 이미 친원은 대세에서 밀려났구요. 우왕은 남은 난신적자를 처분한다는 명분으로 이인임 염흥방 등의 재산을 적몰하죠.
오히려 신진사대부에 기대려고 했던건 우왕입니다. 단지 신진사대부가 이미 고려라는 나라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시점이고 왕권 교체에 대한 희망을 원명교체기를 통해 가속화한 것이죠. 성리학의 나라...정도전부터 당대 석학이라면 당연히 한족의 성리학을 꿈꿔왔고 그 이상의 실현을 이성계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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