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남는 한 야구 선수가 있다. 한창 야구라는 스포츠에 멋모르고 미쳐있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해 롯데 자이언츠는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를 극적인 승리로 장식하며 한국 시리즈라는 꿈의 무대에 진출했고 (비록 우승의 문턱에서는 좌절을 맛봤지만...) 그 극적인 명승부의 여러 장면 중 한 장면에 그 선수가 있었다. 등번호는 20번, 포지션은 포수였고 이름은 임수혁이었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극적인 동점 홈런을 넘기고 연신 환호에 차있던 그 선수의 얼굴과 함께 기뻐하는 동료 팀원들, 그리고 프론트에서 초조하게 장면을 지켜보다 일순간 연신 환호에 가득찬 감독 이하 코치진까지... 그 당시에는 멋모르고 다들 좋아하기에 나도 따라 좋아헸는데 그것이 프로야구 역사상 전설의 명승부로 후세까지 길이 남을줄이야...
주전 자리까지는 꿰차지 못한 백업 전문요원 이었기에 이듬해인 '00년 시즌이 한창 시작이던 4월 어느 즈음, 스포츠 뉴스 헤드라인에 난 그의 소식도 그가 경기에서 극적인 활약을 한 내용일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롯데 자이언츠 임수혁 선수, 경기 도중 쓰러져...'
상황인 즉슨, 경기 중 1루 주자로 나가있던 임 선수가 2루로 전력질주 한 후 잠시 뒤, 갑자기 극도의 흥분 상태를 보이며 쓰러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간단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만한 요원이 전무했고,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응급 처치에 일가견이 있는 동료 선수가 혁대와 바지를 모두 풀어제끼고 그저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 뿐...
현장에는 응급하게 출동하지도 못한 응급차가 그를 병원으로 후송해 갔고, 경기는 속개됐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더이상 재개되지 못하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너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절망적인 판정. 식물인간.
상태가 호전되리라는 희망적인 목소리도 점차 사그라 들어가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가고 있었다. 이따금 동료 선수들의 '임수혁 선수 돕기 기금 마련 일일 호프', 성금 쾌척과 같은 훈훈한 선행이 들려오곤 했지만 이미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철모르던 그의 자식들은 어느덧 중학교를 다닐만큼 훌쩍 커버렸고 그라운드에는 이미 그와 같이 선수 생활은 했던 선수들보다도 그와 같이 경기를 하지 않은 신인들의 등장이 줄을 이었다. 그의 투병 사실도, 그의 존재조차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10년 남짓 지난 2010년 2월 7일, 그는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저 편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후에야 나는 그 비보를 어느 TV 프로그램 한 켠에 난 조용한 자막으로 접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 태어나고 20년 남짓 살아오면서 TV를 보며 일순간 정신이 '멍'해진 적이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접했을 때고 나머지 한 번이 故 임수혁 선수의 부음을 접한 지금.
'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특유의 웃음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줄 알았는데...'
슬픔보다 나의 감정에 앞선 것은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가득 매운 절망이었다.
언제였나, 그의 특집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에서 인상 깊게 들은 구절이 있다.
"임수혁 선수, 그는 아직 그가 쓰러진 잠실 야구장 2루 베이스에 서서, 언젠가는 홈 베이스로 홈인하는 그 날을 병상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랬던 그가 이제 더이상은 2루 베이스에서 초조하게 상대팀의 빈틈을 노려보며 홈 베이스로 쇄도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더 이상은 고통의 나날속에 하루하루를 보낼 필요가 없는 평온한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10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부음을 접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먼 곳에서 묵묵히 그의 죽음을 추모해 드릴 수 밖에 없을 뿐...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롯데 자이언츠라는 님을 열성적으로 사랑하는 야구 광팬임을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롯데를, 그리고 임수혁 선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력함 그 자체였다.
스포츠에 영구결번에라는 것이 있다. 걸출한 기록과 대단한 활약을 남긴, 한마디로 슈퍼스타들에게만 허락된 명예로운 권위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OB(현 두산)의 박철순 선수를 비롯하여 한국 프로야구에도 영구 결번을 달고 있는 선수가 몇 명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나는 그 한자리에, '20'번이라는 숫자가 당당히 오르기를 원한다. 물론 실력면이나 활약면에서, 故 임수혁 선수의 기록은 영구결번이라는 지위에 오르기에는 하찮고 보잘것 없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면, 프로야구 관중 500만 시대에 진정한 프로야구 선수의 여건 보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한다면 꼭 그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백넘버 '20'이 영구결번의 한 자리에 오르기를 나는 원한다.
이번 휴가 나가면 故 임수혁 선수의 추모자리에 꼭 참석하겠다. 누구와 함께 가든, 어느 자리를 가던간에 꼭 추모의 뜻을 전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롯데 팬의 도리가 아닌가 한다.
p.s. 이 글에 쓴 기록과 사실은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제 기억력에 의존해서 쓴 글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부분에 관하여 어떠한 태클도 걸어주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