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2 SK승리. 경기가 끝나고 마이크를 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그날의 MVP를 시상하겠다는 멘트를 하자 SK의 붉은 막대풍선이 세차게 요동칩니다. 바삐 빠져나가려 통로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야유를 보내고 응원단장은 쉰 목소리로 그들을 제지하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습니다. 역시 승패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통로에 나가보니 기아 팬들이 깃발을 흔들며 고래사냥을 개사한 ‘자 떠나자 SK잡으러 최강기아 타이거즈~’ 노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같이 온 친구 여자친구에게 ‘이 사람들 이대로 3루 관중석을 향해 갈지도 모른다.’고 하자 웃음을 터뜨립니다. 저도 그 웃음을 받아 피식 웃습니다. 속으로 괜찮다 멋진 경기였다 몇 번 되뇌지만 씁쓸함은 가시질 않고, 어둑한 밤하늘에다 우승 축포를 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맴돕니다. SK팬들이 불어대는 나팔소리가 경기장 밖까지 울립니다. 친구는 듣기 싫다며 구시렁댑니다. “괜찮아 내일 이기면 돼.” 한참 후에야 제가 한 대꾸라고는 이게 전부였습니다.
2.
타이거즈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한 정육점에서 멈춰지곤 합니다. 전주에서 저희 집은 문구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블록 쯤 걸어가면 시장이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어머니가 돈 얼마와 살 물건들이 적힌 종이쪽지를 손에 쥐어주시면 아홉 살쯤(기억이 정확하지는 않군요.) 먹은 남자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장에 심부름을 갑니다. 설마 심부름하는 게 좋아서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다, 남는 돈 얼마는 군것질을 해도 좋다는 말이 좋았을 뿐이니까요. 종이쪽지가 쥐어졌다고 해서 여러 군데 들릴 일은 없습니다. 시장 어귀 자주 가는 단골 가게에만 가면 아주머니가 다 알아서 콩나물이며 두부며 한보따리 쥐어주십니다. 계산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꼭 한 가지 물목만은 다른 가게로 가야 하는데 그게 바로 정육점입니다. 정육점 가는 날만큼은 아이도 심부름 값 투정을 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고기라면 아이는 눈이 반짝거렸으니까요. 제 기억 속 타이거즈의 첫 장면은 바로 그 정육점 냉장고 위에 올려 있던 작은 칼라TV속에 담겨 있습니다. 무슨 경기였을까요? 다른 기억은 모르겠는데 분명한 것은 그 순간 ‘이건열’ 선수가 8회 말에 홈런을 쳤고, 아저씨는 기분으로 고기를 뭉텅 잘라주셨습니다. 물론 아이에겐 TV속의 승리보다 고기가 몇 배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왠지 너무 행복해보였던 아저씨의 얼굴이었습니다.
3.
야구만 하면 세 시간 넘게 TV시청권을 아버지에게 빼앗기는 걸 짜증만 내던 아이는 시간이 지나며 제가 먼저 야구를 찾아보게 되었고, 해태타이거즈라는 팀의 팬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전주에는 쌍방울레이더스라는 팀이 창단되지만, 아이는 무슨 이유에선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무조건 해태를 외치는 타이거즈 골수분자가 됩니다. 정말 그 시절엔 일부러 해태과자를 찾아가며 먹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해태과자종합선물세트면 그야말로 감지덕지였었죠. (사실 거기엔 자신와 아무런 상관없는 그저 해태가 광주라는 도시를 홈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광주에 대한 얘기를 그 무렵 듣게 되었죠.)
중 2때 서울로 전학을 오고 아이에게 타이거즈는 일종의 자존심이 됩니다. 영어시간에 발음이 이상하다며 선생님의 핀잔을 들을 때도, 아무리 정확하게 말하려 해도 사투리가 섞인다는 친구들의 놀림을 받을 때도, 아이는 버스정류장 옆 가판대에 꽂힌 스포츠신문 일면에 실린 타이거즈의 승리소식만 보면 기분이 풀리곤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오고 타이거즈는 10년 넘게 만나는 친구들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동렬이도 가고 종범이도 갔지만 타이거즈는 영원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고등학생씩이나 되어놓고도 타이거즈 유니폼만 입혀놓으면 선수들은 잘할 거라고 그리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철부지에게 실상을 너무 잔혹하게 알려주었고, 하필 그 무렵쯤 고3을 보낸 저는 재수까지 하고도 원하는 학교에는 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4.
이후 타이거즈 앞에는 ‘해태’가 아닌 ‘기아’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게 됩니다. 기아타이거즈. 뭔가 어색하고 어설프단 느낌이었지만, 일단 선수를 팔아서 팀을 운영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습니다. 초반에는 돈을 풀며 공격적으로 선수를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강타자였던 마해영과 특급 마무리였던 진필중을 한꺼번에 데려오던 해(정확한 기억은 역시 없군요.)엔 친구와 함께 얼마나 방방 뛰며 좋아했었는지 모릅니다. 해태라는 모기업을 가진 팀 팬이었다가 듣는 ‘돈아’소리는 그저 달콤할 뿐이었었죠.
하지만 그 무렵 기아는 뭔가 변해 있었습니다. 정말 누군가의 말대로 마스코트가 점점 순한 그림으로 변해가는 탓인가 싶을 만큼. 선수들이 돈맛을 보더니 헝그리정신이 부족해서 그런다는 얘기는 팬들 사이에 떠도는 일종의 정설이었습니다. 왜 겉모습은 그럴싸하고 위압적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오합지졸에 가까운 적에게 쓰는 한국어 관용구가 하필 ‘종이호랑이’인 건지를 한탄하며 살아야 했죠. 그야말로 그 시절 타이거즈는 종이호랑이였습니다. 팬들은 하나같이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난 해태 팬, 난 타이거즈 팬이지 기아 팬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팬들은 몰라도 전 그랬습니다. 난 타이거즈 팬이야.
5.
하여간 잠실 직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승률이 그야말로 막장입니다. 베이징 금메달리스트이자 한국 최고 우완인 윤석민이 아무리 강속구를 뿌려도, 타이거즈의 역사 이종범이 돌아와 수없이 커트를 날려도 제 잠실 직관 승률을 높여주지 못하는군요. 담부턴 절대 큰 경기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봅니다. ^^;;;
하지만 오랜만의 직관티켓을 고이 접어 지갑에 넣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7회 말에 이대진이 마운드에 뚜벅뚜벅 올라갈 때, 8회 초에 최희섭이 적시타를 날릴 때, 아니 모든 아웃카운트 순간과 실점 상황의 순간들마다 저는 잠깐씩 주변사람들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예전 어릴 적 정육점 아저씨가 지은 미소를 찾아 볼 수 있더군요.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제게 물었습니다. 져서 싫어? 짜증나?
아닙니다. 지금 전 이대진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가 삼진을 잡을 때의 전율이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세게 느껴져 잠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최고 구속이 139밖에 찍히지 않지만, 이번 경기 마운드에 오른 그 어떤 투수의 볼보다 빠르게 느껴진 그 볼이 가슴팍에 박힌 탓일까요.
솔직히 결과는 진 것이 확실하지만, 그래서 친구들과 뒤풀이 와중에도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돌아오던 길 내내 든 느낌은 이것입니다. 그래 졌어, 하지만 패배한 것 같지는 않아. 제 기억에 이것이 타이거즈였습니다. 지더라도 패배한 것 같지 않은 팀. 부족해서 넘어질지라도 아예 무너진 것 같지 않은 팀. 제 기억 속 타이거즈는 그런 팀이었습니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의 자존심과 자랑, 괜히 어깨를 펴게 만들고, 삶의 소소한 기쁨을 주는 그런 팀 말입니다. 김수영의 ‘풀’이란 시에서처럼 여려서 넘어지지만 기필코 다시 일어나는.
타이거즈는 이미 돌아와 있었습니다. 다른 어디도 아닌 경기장에 모여 있었던, 그리고 TV와 여러 매체들을 통해 마음을 졸이며 경기를 보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말입니다. 이제 기아라는 이름을 앞에 단 타이거즈를 보면서 사람들은 참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랬으리라 믿습니다.
6.
이미 오늘이 되었군요. 프로야구 2009 시즌은 오늘 경기로 정말 마지막입니다. 기아타이거즈의 팬으로써 마지막 경기에 무엇을 부탁하는 말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까 고민했다가 다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되었습니다. 적어도 제겐 타이거즈가 돌아온 것으로 충분합니다. 어쩌면 질 수도 있지만, 그건 다 이 못난 팬이 더 기대하지 못하고, 더 기다리지 못한 탓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지더라도 절대 선수여러분의 땀이 부족해서 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아타이거즈의 팬으로써 땀을 더 흘리지 못한 제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전 정말 이번시즌은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혹시 선수여러분에게 승리가 꼭 필요하다면 잠깐만 숨을 죽이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면 됩니다. 혹시 승리의 이유를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고막을 때리는 응원소리를 따라 잠깐만 시선을 뒤로 돌리시면 됩니다. 혹시 승리하기에 여러분의 땀과 눈물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시면 거기엔 저처럼 나이롱이 아닌 진정한 타이거즈의 팬들이 땀과 눈물을 보태고 있음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꼭 단 한 가지 부탁을 하자면, 결코 어떠한 결과에도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사냥꾼의 총탄과 올무, 사냥개의 이빨과 발톱에 가죽이 찢어지고 살갗이 드러나고 온 몸이 피로 물들어 새빨간 핏덩이가 되어갈지라도 호랑이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는 법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포효하라 타이거즈!
7.
감사합니다. 타이거즈 선수 여러분이 있어 2009년 너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땀흘려준 8개 구단 선수 모든 분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너무 팬심에 입각한 글이라 다른 팀 팬 여러분들께 불편을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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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잠실 갈때마다 이겼고 집에서 티비로 본 잠실 경기는 모두 졌습니다.페넌트레이스 승부처 단군매치나 이번 한국시리즈5차전까지 올시즌만 기아 잠실직관만 7-8경기갔었는데 전부 이겼죠..당연히 6차전은 못갔고..
참 불안한것이 오늘은 못갑니다..어제 6차전 끝나고 그렇게 인터넷 중고표를 뒤졌으나 결국 얻지못하였고 집에서 보게되었습니다.
이기겠죠..ㅠㅠ
Zakk Wylde님//제가 늘 궁금한게 Zakk Wylde님 회원정보 코멘트에 타이거즈팬 목록이 늘 있지않습니까?그중 고비님 이라는 사람이 바로 저죠?저인것같은데 오타로 고비라고 적혀있는것같아서요..pgr에서 아무리 고비 라는 타이거즈팬 찾아봐도 도통 보이질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