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정말로 참혹한 결과를 얻었지만 1983년, 삼미는 시즌 전 크나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이 감독직을 수락했으며 - 원래 작년에 감독제의가 들어왔으나 인천연고팀을 창단하는데 자신을 빼놓은 것에 분개하여 거절했습니다. - 작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임호균과 김진우가 팀에 가세했고 또다른 국가대표 정구선, 이선웅등이 합류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은 바로 재일교포 선수들의 합류.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 지금은 소프트뱅크 호크스 - , 히로시마 토요 카프에서 선수생활을 한 투수 장명부가 입단했고 유격수 이영구가 입단했습니다.
장명부, 일본이름 후쿠시 히로아키. 197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데뷔해 1973년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 1975년에 11승을 올렸고 1977년에는 히로시마 토요 카프로 트레이드되어 1978년과 1980년에 15승, 1981년에 12승을 올리며 히로시마의 1979,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 통산 91승 84패 -
하지만, 1981년 3승으로 주저앉으며 재기를 위해 노력하던 중 한국과 끈이 닿으며 한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그런데 장명부가 한국으로 와서 한 일은 조금 엉뚱했습니다. 삼미에 입단을 했으나 그가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삼성의 스프링캠프. 그곳에서 그는 배팅볼 투수를 자청하며 이만수, 장효조, 장태수, 허규옥등 내노라하는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줍니다. 하지만 단순히 배팅볼을 던진 것은 아니었고 삼성 타자들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기 위해 삼성의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준 것입니다.
어쨌든, 삼미에 입단하게 된 장명부는 기자회견장에서 "20승은 물론이고 30승까지 할 수 있다." 라고 자신감을 내비쳤고 이호헌 KBO 사무총장과 허형 삼미 구단주는 "30승은 불가능하다." 라고 난색을 표합니다. 그러자 장명부는 "정말 30승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따졌고 허형 삼미 구단주는 "30승을 한다면 보너스로 1억을 주겠다." 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합니다.
장명부에 관한 몇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장명부는 자신이 홈구장으로 쓸 도원구장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도원구장 내야 여기저기에 공을 굴려보며 경기장의 경사도를 체크합니다. 또한,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타자들의 자료를 요구했으나 그 당시에 그렇게 방대한 자료는 없었고 결국 장명부는 김진영 감독에게 자신이 원하는 시범경기에 자신을 무조건 등판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상대 타자들에게 직구만 던지며 두들겨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순히 두들겨 맞은 것이 아닌 상대 타자들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기 위해 일부러 두들겨 맞은 것입니다. 게다가 상대 타자들은 장명부가 자신들에게 두들겨 맞자 장명부에게 갖고 있던 공포심이 사라졌고 오히려 "장명부는 별것 아니다." 라는 자만심까지 자라났습니다.
또다른 재일교포 이영구는 유격수로 활약하며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유격수이자 지금도 최고의 유격수중의 한 사람으로 오르내리는 김재박과 "유일하게 맞상대할만하다." 라는 평을 듣습니다.
임호균, 이상군 - 김용수등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제구력 투수의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선수이자 고교시절 인천고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고3이던 1974년에는 대구상고와 휘문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대학시절에는 김봉연, 최동원등이 활약한 연세대와의 대결에서는 최동원과 맞상대하며 14회까지 무실점 완봉투로 결국 서스펜디드 게임을 기록하게 했고 그 다음날 이어진 경기에서도 무실점 투구를 이어가다 18회에 김봉연에게 홈런을 맞고 무너졌으나 최동원, 김시진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투수들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투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평균 자책점 "0"을 기록하며 평균 자책부문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반드시 이겨야 했던 vs 도미니카전과 마지막 경기이자 실질적인 결승이었던 vs 일본전에서도 구원등판해 무실점으로 상대타선을 틀어막으며 이기는 경기를 그대로 마무리했습니다.
김진우는 포수로 활약하며 묵직한 장타력을 과시한 선수였으며 정구선은 2루수로 활약했고 이선웅은 3루수로 활약합니다.
1983년, 삼미의 선수진은 대략 이렇습니다.
투수 : 장명부, 임효균, 김상기, 정성만, 김재현, 오문현, 인호봉, 감사용, 유종천
타자 : 김진우, 이영구, 양승관, 조흥운, 금광옥, 이선웅, 정구선, 김대진
투수진에 많은 투수들이 들어있으나 장명부와 임호균을 제외하면 다른 투수들은 별다른 활약이 없었습니다. 아니, 활약을 할 기회를 원천봉쇄당했습니다.
이제, 시범경기에서 마음껏 두들겨맞으며(?) 타자들을 마음껏 분석한 장명부는 정확한 제구력과 스크류볼, 폭포수 커브, 빠른 직구, 싱커, 체인지업, 슬라이더등 다양한 구질로 상대방을 요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너구리" 라고 불리며 상대방을 농락하는 심리전, 특히 때로는 빈볼까지 던지며 상대방의 페이스를 흔들어놓았고 몸쪽에 빠른볼을 붙인뒤 바깥쪽에 공을 던져 삼진을 잡는등의 플레이, 때때로 대충대충던지는듯 싶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상대방의 넋을 빼놓는 투구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상대 타자들을 분석한 결과로 상대방의 약점을 노렸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플레이는 그때그때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을 보여주게 됩니다. 특히, 아직까지도 국내 최고의 교타자로 불리는 장효조마저 장명부를 상대로는 헛방망이를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 이 해 장효조는 타율 0.369와 안타 117개를 기록해 수위타자와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
특히, "30승을 하면 1억을 주겠다." 라는 구단주의 약속으로 장명부는 30승을 올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고 선발로 나서서 완투한 다음날 또다시 구원투수등으로 나서는 일이 빈번했으며 단, 하루만 휴식하고 다시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이 해의 삼미 마운드는 "장명부 아니면 임호균" 이러한 평을 들었습니다.
임호균도 그의 제구력을 바탕으로 상대 타자들을 상대했으며 특히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공은 상대 타자들을 짜증나게 만들었습니다.
타선을 살펴본다면 김진우가 중심타선에서 대활약, 양승관도 강해진 팀의 전력을 등에 업고 활약했으며 정구선등의 타자들도 나름대로 활약했습니다.
작년에 자신들에게 전패의 악몽을 보여준 OB를 상대로도 연전연승, 삼성을 상대해도 장명부를 앞세워 압살. 전기리그내내 삼미는 돌풍을 일으키며 질주했습니다.
하지만, 전기리그 중반에 삼미에 악재가 닥치게 됩니다.
6월 1일, vs MBC전에서 8회초 삼미가 공격을 하게 됩니다. 2사 만루의 상황, 최홍석의 적시타가 터져나오며 3루주자 이영구와 2루주자 이선웅이 홈인한 상황, 하지만 MBC의 외야수 이해창이 3루로 송구해 1루주자 김진우를 잡아냅니다.
이 때, 구심은 3루에서의 태그아웃이 2루주자 이선웅의 홈인보다 빨랐다고 판단, 2루주자 이선웅의 득점을 인정치 않았고 김진영 감독은 강하게 항의합니다. 하지만, 이기역 심판위원장이 경기 속행을 지시했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김진영 감독은 이기역 심판위원장에게 발을 날렸고 결국 폭행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러한 악재가 겹친 가운데 전기리그 1위를 달리던 삼미는 전기리그 2위 해태타이거즈와 광주에서 3연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당시 해태도 선수의 양을 보강하기 위해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과 투수 주동식을 영입하며 전력이 안정화되었고 "좌효조 우종모" 라 불리며 당대 최고의 교타자 장효조와 맞상대가 가능한 김종모, 홈런왕 김봉연과 "오리궁둥이" 김성한, "대도" 김일권, "원자탄" 이상윤등이 버티며 결코 만만치 안음을 자랑한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12경기를 남긴 삼미는 5할의 승률만 유지해도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해태는 14경기중 무려 10경기를 이겨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6월 7일 : 1 vs 10으로 삼미의 패배 - 패전투수 장명부 -
6월 8일 : 0 vs 5로 삼미의 패배 - 패전투수 임호균 -
6월 9일 : 0 vs 3으로 삼미의 패배 - 패전투수 장명부 -
결국, 이 3연전에서 모두 패배한 삼미는 욱일승천하는 해태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며 전기리그 27승 23패로 2위에 머무릅니다.
후기리그에서는 MBC에서 백인천을 영입하는등 전력을 보강하려 했으나 백인천의 가정문제로 인한 구속, 팀 타선의 침묵, 맥이 풀린 팀 분위기는 결국 후기리그에서도 25승 24패 1무로 MBC에 뒤진 2위에 머무르게 합니다.
종합순위는 52승 47패 1무로 3위. 하지만, 이 때는 전기리그 1위와 후기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때라 의미가 없는 성적이었습니다.
주요 선수들의 성적을 살펴보겠습니다.
타자
조흥운 : 80경기 출장, 타율 0.236, 280타석 254타수, 60안타, 0홈런, 24득점, 11도루
이영구 : 100경기 출장, 타율 0.277, 418타석 368타수, 102안타, 5홈런, 36타점
양승관 : 85경기 출장, 타율 0.302, 312타석 278타수, 84안타, 9홈런, 30타점
김진우 : 99경기 출장, 타율 0.253, 424타석 364타수, 92안타, 15홈런, 49타점
정구선 : 97경기 출장, 타율 0.256, 404타석 356타수, 91안타, 15홈런, 35타점
이선웅 : 81경기 출장, 타율 0.223, 311타석 287타수, 64안타, 5홈런, 28타점
김대진 : 94경기 출장, 타율 0.277, 363타석 311타수, 86안타, 2홈런, 42득점
금광옥 : 59경기 출장, 타율 0.222, 214타석 194타수, 43안타, 2홈런, 13타점
투수
장명부 : 60등판, 44선발, 427.1이닝, ERA : 2.34, 30승(28선발승, 2구원승) 16패 6세이브, 220K
임호균 : 35등판, 29선발, 234.2이닝, ERA : 3.03, 12승(11선발승, 1구원승) 15패 2세이브, 86K
400이닝 - 30승 투수 장명부와 200이닝 - 10승 투수 임호균을 제외하면 다른 투수들이 별다른 활약이 없었기에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장명부는 30승을 달성하며 시즌 후 삼미구단에게 1억을 요구했으나 삼미구단은 문서화된 조항이 아니라며 거부합니다. 배신당했다고 느낀 장명부가 크게 반발하자 결국 허형 삼미 구단주가 장명부에게 개인의 돈 몇천만원을 주면서 간신히 장명부를 달랩니다.
그나저나 장명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새긴 이 기록들은.......
주요부문 순위를 알아보겠습니다.
타자
홈런 : 김진우(6위), 정구선(6위), 양승관(13위)
타점 : 김진우(11위), 이영구(20위)
타율 : 양승관(6위), 이영구(16위), 김대진(17위)
도루 : 조흥운(12위)
득점 : 이영구(11위), 김진우(17위), 정구선(20위)
투수
다승 : 장명부(1위), 임호균(6위)
탈삼진 : 장명부(1위), 임호균(5위)
평균 자책점 : 장명부(2위), 임호균(13위)
세이브 : 장명부(3위), 임호균(14위)
이제 각 팀에게 거둔 상대전적을 알아보겠습니다.
vs 해태 : 9승 11패, vs MBC : 6승 14패, vs 삼성 : 14승 5패 1무, vs OB : 12승 8패, vs 롯데 : 11승 9패
도합 52승 47패 1무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MBC에게 약했고 삼성에게 강했습니다. 이것은 장명부가 MBC에게 약했고 삼성에게 강했기 때문입니다. - 특히 장명부는 김재박에게 약한면을 보였습니다. -
팀 성적을 확인해보겠습니다.
득점 : 346(6위), 실점 : 372(5위), ERA : 3.04(2위), 타율 : 0.245(5위), 홈런 : 62개(4위), 도루 : 36개(6위)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모든 기록은 아이스탯(www.istat.co.kr)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