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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06 03:18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가 아니라 고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인용하시려고 하셨던게 아닌가 합니다.
09/10/06 04:07
유유히님께서 작성해주신 매뉴얼을 모두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철철 넘치는 상대방이 '흐음.. 재미있는 생각이긴 한데, 넌 왜 그렇게 생각하는것이지?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줄래?' 라고 나오면 시투더망인가요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굉장히 집착했던 주제들이네요. 결론은 전혀 못내고 끝냈지만 말이죠.
09/10/06 05:49
OrBef2님// 결론을 내실 수 있다면, 반세기 후의 전세계의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오베프님의 이름은 저주의 이름이 되겠지요...
09/10/06 07:53
흠... 까뮈가 이야기한 자살의 의미는 좀 다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르트르식 실존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살 또한 선택의 일부이다, 라는 말이 들어맞겠지만, 그보다 까뮈는 자살이라는 현상 자체, '우리는 어째서 자살을 하는가'에 주목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그런 주류 실존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작가 스스로가 거부감을 나타낸 바 있구요. 철학자라기보다는 예술가였던 그의 뉘앙스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삶의 선택 중 일부라고는 보지 않는 듯 싶습니다. 그가 종종 '죽어야만 한다'라는 말을 종종 쓸 때가 있지만, 그것은 앞서 말씀하신 명제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삶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위한 자발적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싶고, '자살'이라는 현상 자체는 다르게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한 죽음]을 위한 노트 일부를 보면, '자기 스스로를 죽이지 않는 한 삶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죠. 이 말은 자살이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단순히 실존적 선택 중 하나로 두었다면 그만큼 주목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또한 어디에서 봤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살이란 물로 가득 찬 컵 위에 물 한방울이 떨어져 그 물이 넘치는 것이다' 와 비슷한 말도 했던 것 같습니다(결혼에서였는지... 시지프스에서였는지... 노트에서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 _-). 자살이 어떤 확고한 정신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한 구절이 몇 개 있기도 하고... 무튼 한마디 말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싶습니다.
그런데 까뮈 자살설은 처음 들어 봅니다. 당시 미셀 갈리마르의 승용차에 동승하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그렇다면 까뮈가 직접 운전을 했다는 것인지... 어쨌든, '자살은 살인의 일종인가?' 같은 말을 꺼내기 위해 까뮈의 자살론을 꺼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상대가 '지식이 철철 흘러 넘치는 교양인'이라면 더더욱... (문득 기억나서 첨언하자면, 본문에서는 '부조리를 이길 수 없을 때 자살을 선택한다'라고 하셨지만, 이미 자살이라는 것이 까뮈의 부조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거나, - 적어도, 까뮈가 말하는 자살이 부조리에서의 도피, 혹은 시지프의 무한유희를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 혹은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무튼... 까뮈 자살설에 대한 정보나 좀 가르쳐주셨으면... 저는 자살설이라기에 순간 발터 벤야민을 떠올렸지 뭡니까. 크크크) (09년 10월 06일 17시 46분에 내용 추가하였습니다)
09/10/06 08:36
信主SUNNY님// 낄낄 그렇군요.
그나저나 까뮈는 제가 담배를 배우게 된 주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쁜 사람입니다. 까뮈씨가 담배 피우는 사진들을 보면 거의 장동건 수준이었죠. 어린 마음에 너무 멋있었다능..
09/10/06 08:44
1번에 대해 말하자면..인간의 본성은 생존본능 아닐까요..
죽이지 않으면 죽임당하는 상황에서 죽이는 선택을 하는 것도, 살아있기 위해 다른 동식물을 잡아먹는 것도 결국 생존을 위한 것이죠. 악은 단순히 자신만의 생존본능 및 욕망에 충실하는 것이고, 선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라 봅니다. 싸우기만 하는 것보다는 다투지 않고 서로 도우는게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즉 선은 또다른 생존방법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09/10/06 08:51
Gidol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렇게만 보고나면, 사회에 법이 있는 것은 좋고 남들이 법을 지키는 것도 좋은데, 굳이 내가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는 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점이 생기더군요. 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냥 멍청하게 살기로 작정했지만 말입니다.
09/10/06 09:26
1번의 경우는, '지식이 철철 흘러 넘치는 교양인'이라면 어떤 것을 선하다고 보는가, 어떤 것을 악하다고 보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영도님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해당 예시만 해도(작가분이 이를 진짜로 주장하시는지, 혹은 극중 인물의 궤변으로 여기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반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당 상황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해당 상황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과연 악인가? 이런 말도 가능하니까요. 오히려 그런 상황들을 거치면서 '누군가를 죽여서 사는 것보다, 모두가 같이 살아남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을 해 낸 것은 과연 효율적 판단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어떤 본능에 의한 것인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구요.
소위 '능력자'들에게 대처하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좀 의뭉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잘 먹히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뭔가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쉽게 뒤통수를 얻어맞거든요. 그냥 해당 주제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논점들을 조금씩 언급하는 것이 '아, 이 사람이 좀 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는 능력자들이라면 잘 모르면서 쉽게 규정하는 행태의 폭력성을 지양하기 마련이구요. OrBef2님// 저도 그래서 담배 피울 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 _-
09/10/06 10:12
1번은 사실좀괜찮은밑힌자님 말처럼 "어떤 것을 선하다고 보는가, 어떤 것을 악하다고 보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에 대한 정립이 안 되어있는 상황에서 '성선설', '성악설' 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게 순자나 맹자를 가르칠 때는 의미가 있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는 '아블리슈'와 '카나리토'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죠.
2번에서 데카르트는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분명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까지 포함합니다.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와 같은 것이 그런 것이죠. 데카르트가 이르려는 확신이 존재에 대한 확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반론이 가능하지만, 데카르트의 의심에 그 반론은 이미 포함되어 있죠. 이는 그가 단지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는 것이 목적 내지 해결책이라고 보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데카르트가 이르려고 했던 것은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사유가 여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는 말을 다시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이 과정들 모두 '사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죠.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한들 사유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언어적 전환이 이루어진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의심이라는 과정은 사유의 부분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데카르트의 방식이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표현되는 저 말에서 핵심적인 건 '나는 존재한다'가 아닙니다. 그건 단지 '나는 생각한다'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데에서 나오는 귀결일 뿐이죠. 만약 존재없이 사유가 가능하다면 존재가 귀결될 수 없지만, 그런 극한적인 의심을 하기 까지는 상상력이 부족한지도 모르겠네요. 현대 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나는 생각한다'를 입증하는 데카르트의 방식은 '생각한다'가 어떠한 주어를 필요로 한다는 문법적(언어적) 특성에 기반한 것이지 실질적 증명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차피 데카르트가 실질적인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긴 하지만, 단순히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데카르트 이후 인식론이 근대 철학(특히 대륙 철학)의 핵심적인 요소가 된 데에는 저 두 가지 중 '나는 생각한다'에 더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버클리의 논의는 그 자신은 언어에 대한 논의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사실상 언어에 대한 논의이며, 언어적 차원에서 볼 때 쉽게 논파됩니다. 버클리는 단지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만큼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 존재에 대한 지각 능력을 '신'에게 돌렸는데, 이 신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보편 개념', '보편 언어'와 같습니다. '신이 지각하므로 존재하는 것 =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죠. 극단적 경험론이 극단적 관념론으로 뒤집어지는 순간입니다. 버클리의 시대에는 언어는 어디까지나 관념의 부속물로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것이 '관념론' 수준에서 논의되었지만,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이는 '존재' 또한 언어적 표현이며, '무엇이 존재하는가'는 우리가 존재라는 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의존한다는 점을 명확히 할 때 분명해진다는 식의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를 훌륭하게 전개하고 있는 사람이 콰인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페가수스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종류의 것이죠. 그는 유명한 '존재론적 개입'의 개념을 통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건 우리가 그것이 어떠한 경우에 존재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것(특정한 존재론)에 달려있다고 주장합니다. 존재란 '존재론'에 의지한다는 것이죠.(복잡한 문제니 논의는 다음에) 이러한 논의는 존재에 대한 머리 속 문제를 언어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만합니다. 확실히 현대 철학(그리고 콰인 역시)에서 존재의 문제는 과학에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은 존재 일반을 다룰 뿐이고, 존재가 갖는 각종 차원들(존재론들의 차원들)만을 다룰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버클리식 논의를 세련되게 전개한 사람이 후설입니다. 후설 또한 내 의식에 들어온 것만을 존재의 재료로 삼지만, 버클리와 달리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의 존재 근거를 엉뚱하게 '신'에게 돌리거나, 극단적으로 '내가 아는 것만 존재한다'는 식으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신이 아니라)을 상정하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그 무엇(상호 주관적 세계)을 상정하고 있죠. 막무가내로 신을 상정해서 '막말'에 자리를 내 준 버클리와 달리 그는 사회적 언어라는 좀 더 그럴 듯한 대상을 상정한 셈입니다. 물론 그는 의식에 머물러 언어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후속 연구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었죠.
09/10/06 10:15
저도 전공이 철학이라 관심있게 봤습니다. 뭐, 저 문제들은 언제 고민해도 머리가 아픈것이죠.ㅠ
하나의 화두를 더 던지자면, 감관을 통한 현상과 원상의 관계에 관한 건데요, 이건 그리스시대부터 하이데거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쟁이 되는 철학계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나 할까요.. 좋은 것과 좋음 그 자체로 동굴의 비유, 선분의 비유, 태양의 비유같은 것들 많이 들어보셨을겁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안의 수인들이 어쩌고 한마디 해주면.. 좀 유식해보이려나요^^;;
09/10/06 12:34
사실좀괜찮은밑힌자님// Ms. Anscombe님//
말씀대로 데카르트등 많은 철학자들의 대한 해석이 약간은 다른 길로 빠지는 감이 있습니다. 물론 한가지 해석만이 존재한다는 법은 아니지만 매뉴얼이면 일반론적으로 가는게 맞다고 보기에. 읽다보니 참 좋은 글이지만 아쉬워서 첨언하려 했으나 먼저 더 좋게들 써주셔서 굳이 더할 필요가 없을듯.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던 -중세시대등에 대한 생략이 아쉽긴 했지만-저번 미술 매뉴얼과 달리 이번 철학 매뉴얼은 정말 교양인들을 만나면 오히려 조금 위험할듯 싶네요
09/10/06 12:54
저도 철학을 전공합니다.
주어진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식이라면 끝도 없을겁니다. 억지로 답을 내려 한다면 그저 철학적 논쟁이 상대를 말빨로 압도하고 승리로 가져간다는 승부욕으로 변질시키는 게 다죠. 철학은 답이 없습니다. 공과대의 학생들처럼, 수학문제처럼, 답이 없습니다. 그저 밑도 끝도 없는 학문이죠.(다른 학문을 폄하하는게 아닙니다;) 단지 답에 연연하지 않는 열린 마음으로 사색을 즐기고, 근본적인 떡밥(본문처럼)에 평생을 두고 생각하는게 진짜 철학일 수 있죠.
09/10/07 09:58
아는 척 하기의 기본은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밑밥 다 드러나거든요. 마치 나는 너희들이 논의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라는 표정으로 지켜 보다가 자신의 발언 때 겸손하면서도 현학적인 대답으로 있어 보이면 되는 겁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평상시 조용하고 진지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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