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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30 04:24:05
Name Arata
Subject [일반] [친일파] 대한민국 근대사 대표 역적 1위 '을사오적'
안녕하세요, 아라타입니다.


오늘은 기분도 찝찝하고, 날씨도 꿉꿉하고, 눈꺼풀도 무겁고, 이상하게 밥맛도 없고..
늘 마음만은 해맑은 제 인생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네요...

제가 뜬금없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래 나영이 사건의 범인을 생각하다가 더 뜬금없이 친일파가 떠오르더라구요.
뭐랄까, 나쁜놈 연상작용으로 나쁜놈들이 계속 떠올랐다고나 할까요.


그런 김에 나름대로 여러분들에게 을사오적에 대한 정보도 드리고, 같이 씹어보자는 의미로 그 선두에 선 을사오적을 거론해 봅니다.







Section 1.




친일파
-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그에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 및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



즉, 친일파는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의 침력을 받은 각 나라마다 그들 침략을 선도적 발길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야합해서 같은 국민, 민족들을 기만하며
매국 행위를 일삼은 무리들이 존재했으며, 중국 역시 수많은 친일파가 일본과 손을 잡고 침략을 도왔습니다.





그럼 어디까지 친일행위라 부를 수 있으며, 어느 기준으로 친일파를 구분해야 하느냐는 것은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주장하는 지일파, 학일파, 극일파등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적극적인 친일행위 행한 자와 한일합병당시 고위 관직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지 혹은 창씨개명자, 소극적 친일행위자,
불가피한 선택에 의해 저지른 친일행위, 생존의 갈림길에서 택한 친일행위 등등은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학자와 그들 역시 결과적인
친일행위자로써 그 행위의 경중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야 한다는 학자등등으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1. 해방 후 1948년 반민특위가 지목한 친일대상자
2. 1990년 이후 임종국에 의해 발굴된 친일대상자
3. 2005년 참여정부시절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거론한 3,090명
4. 2006년 참여정부시절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거론한 106명


을 친일파로 간주합니다.
물론, 거론된 친일파의 유족들에게서는 끈임없는 반발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Section 2.


을사조약 (제2차 한일 협약)
- 1905년 11월 17일, 한국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
-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일컬으며 강제 협약이라 하여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기도 함
- 체결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임

-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무효로 선언됨

-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되는 첫번째 조건




이 조약은 고종황제의 제1차 한일 협약 무효를 위한 밀사파견이 일본에게 들통나자 일본에서 이를 빌미로 삼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2차 협약을 강요하여 체결됩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당시 일왕의 특사로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체결을 거부합니다.
이 당시 궁궐은 일본군에 의해 완벽히 봉쇄되어 고종황제는 거의 격리수용된 조치로 조약 체결을 강요받고 있었고,
무슨 짓을 해도 고종황제로부터는 서명을 받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아챈 이토 히로부미는 작전을 변경하여,
조정 대신을 상대로 회유와 협박, 강요를 번갈아가며 작전을 폅니다.

결국 이러한 회유에 어느정도 지지를 얻게된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체결당일 대신들을 궁궐(중명전)로 불러 회의를 가지게 합니다.



고종황제는 일찌감치 강요에 의한 서명을 거부할 목적으로 모든 결정권을 대신들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아마 대신들은 황제에게 다시 위임하여 황제가 최종 결정을 하게 할 모양새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죠.

회의는 5시간동안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즉, 당시에 보기에는 조약 체결 처음부터 얼씨구나~하고 오적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회의가 결론나지 않자 초조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헌병대를 이끌고 직접 궁궐 회의장으로 들어가서는,
연필과 쪽지를 들고 대신 한명한명에게 다가가 찬성과 반대를 물으면서 적었습니다.

그 때 총리대신격인 참정대신 한규설이 소리내어 통곡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계속 시끄럽게 굴거든 죽이라'고 헌병들에게 지시하고는
한규설은 헌벙에게 다른 방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1. 학부대신 이완용,
2. 군부대신 이근택,
3. 내무대신 이지용,
4. 외무대신 박제순,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적습니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부릅니다.

특히 이완용을 비롯해 이 오적의 마음속에는 이토가 따라가면서 찬성반대를 적기전부터 일본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법무대신 이하영은 불가였던 자신의 의견을 바로 뒤집고 그 후로 오히려 오적보다 더 활발하게 찬성하였으나,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오적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이 을사오적은 이 때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전반에 걸쳐 그 후로도 아주 악한 짓을 저지르며 지위를 이용해 갖가지 협약과 합의를 체결합니다.
이 중 이완용은 총리대신역으로써 기유각서(사법부, 교도행정권 전권 이양)을 체결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완용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을 일제에 완전히 편입시켜 버립니다.
우리들이 현재 '경술국치'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이 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니 가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외무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곤스케간의 협약서명을 진행합니다.
물론 한국내에서는 이 조약의 불합리성에 대한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이 있었으나 일제군부에 의해 억압되었습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한국에는 통독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됩니다.
왜 안중근 의사께서 이놈을 그리 죽이려 했는지 100%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죠.



고종은 이 조약의 부당성을 외국으로 알리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영국으로 전달된 고종의 친서입니다.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등이 있으나 당시 '밀서'의 효력은 국제적으로 약했습니다.


이 늑약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무효임을 확인 받았습니다.






Section 3.




을사오적
- 매국노의 대명사
- 1905년 을사조약을 찬성한 5인의 대신
- 숱한 암살에 시달리나 끈질기게 살아남음

1. 학부대신 이완용
2. 군부대신 이근택
3. 내무대신 이지용
4. 외무대신 박제순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1> 이완용


- 1858년 경기도 광주 출생
- 이린 시절 가난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친구였던 이호준 고위관리의 양자로 들어가 호위호식하며 출세길을 보장받음
- 25세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 순종을 가르치며 사제관계를 맺기도 함
- 그 후 온갖 공직을 겸하며 미국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친미주의 개화파가 됨
- 그러나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미국보다 러시아를 택하고 친러파로 변신함
- 이 때 외부대신등을 역임하며 고종황제로부터 신임을 얻게됨
- 이 때까지는 이완용도 일제와 친일파관료에 맞서 대항하던 대한독립주장관료들 중 한 명으로 제2대 독립협회장이 됨
- 그러나 러시아가 각종 이권 이양을 요구면서 독립협회와 갈등을 맺자 중재자역할을 하다가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함
- 그 후 관직에서 좌천되어 전북 관찰사로 부임하지만, 직무태만 공금횡령등으로 독립협회에서조차 제명당함
- 이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칩거함
-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기회로 삼아 관직에 복귀하면서 친일파로 변신함
- 이 후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 때 오적 중 대장격으로 찬성을 하며 매국노의 대명사로 등극함
- 1907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며 친일행동의 절정기를 보냄
-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이 후 일진회 회장이었던 송병준과 함께 고종에게 찾아가 책임을 추궁하며 양위할 것을 강력히 권유함
- 이와 동시에 대한민국 군대 해산을 주장함
- 또한 매일같이 일본제국 육군대장인 하세가와에게 찾아가 항일의병퇴치에 대해 의견을 교환함
- 마침 그의 집은 민중에 의해 불타버림
- 그리고 벨기에 황제 추도식이 있던 명동성당에 가다가 이재명에게 칼을 맞았으나 가까스로 살아남
-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날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주도함
-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공언하고 이토를 죽인 안중근 의사를 아주 맹렬히 비난함
-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음
- 1912년 조선인의 일제식민지화를 공식적으로 주장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냄
- 1919년 고종황제 승하에 따른 독살설 배후 중 한명으로 강력히 지목됨
- 당시 3.1운동 진압방법을 편지로 작성해 일본으로 수차례 보냄
- 1920년 일본에 의해 3.1운동 진압의 공로로 후작으로 승급함
- 그 후 계속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며 온갖 친일단체 고문으로 역임함
- 1924년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직위를 받으며 조선인 중 유일하게 부자귀족이 됨
- 1926년 68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함
- 장례도 고종황제 못지않게 일본인들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됨
- 전북 익산에 묻혔으나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되어 그의 후손들에 의해 유골이 화장되고 묘는 사라짐
-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손자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함
- 손자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고 1962년 일본으로 밀행해 귀화함
-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직계후손은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


그는 권력을 이용한 축재로 막대한 재산을 모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손꼽히기도 했으며,
당대 최고로 인정받을 정도의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독립문의 현판을 쓰는 등 독립문설립에 앞장섰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








<2> 이근택


- 1865년 충북 충주 무인집안에서 태어남
-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날마다 신선한 생선을 진상한 공으로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공직에 발탁됨
- 1884년 무과에 합격해 병조참판까지의 관리로 있다가 1897년 정부전복혐의로 제주도로 귀양감
- 1885년 돌아와 관직에 복귀한 후 관리로 지냄
- 1905년 군부대신에 복직하다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을사오적이 됨
- 당시 독립투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일컬어 '5귀'라 불렀음
- 이근택은 을사오적 중 가장 교활하고 악랄한 놈이라 소문이 나있었음
-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협조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를 받음
-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 역시 일본으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음
- 조선총독부 중추관 고문으로 임명되며 일제시대동안 일가 전체가 아주 부유한 생활을 누림
- 그 후 1919년 사망함
-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근택과 동생 이근상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림
- 2006년 이근택은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 아들 이창호와 함께 친일자명단에 선정됨
- 2005년까지 이근택의 후손들은 선대 친일 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5차례 소송을 냄



이근택은 친일활동으로 얻은 부유한 재산으로 당시 아주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용인민속촌내 99칸 기와집이 일제시대 이근택의 집이라고 합니다.
또한 아주 악랄하고 교활하여 양지 음지를 가리지않고 독립투사를 억압하며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지용과 함께 도박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즉, 나라판 돈으로 도박에 심취한 셈이죠.




<3> 이지용


- 1870년 전북 완산에서 태어남
-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오촌조카가 됨
- 1887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고 1901년 주일공사를 지냄
- 1903년부터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씀
-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를 주도함
- 그 후 법무대신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므로써 을사오적이 됨
-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 후 민중의 비판과 위협이 거세지자 눈에 띄게 친일활동을 자제함
- 1910년 한일병합조약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작위를 받음
- 그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됨
- 경술국치 후 도박에 빠져 가사를 탕진하고 1928년 사망함


- 아내 이옥경은 1906년 친일여성단체 한일부인회를 청설하고 친일활동을 했으며 일본인 간부들과 숱한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음
- 이옥경은 본래 홍씨 였으나 서양식 교육을 받은 후 서양을 따라 성을 남편의 이씨로 바꾸어 버림






<4> 박제순


- 1858년 경기도 용인 상도촌에서 태어남
- 1883년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가 됨
- 이런 시절부터 김윤식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 이유로 그의 지도하에 청나라와의 외교상 업무를 주로 담당함
-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충청감사로써 농민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움
- 이 때 "새야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이 박이 박제순을 일컬음
- 1898년 외부대신이 될때까지 중요한 관직에 두루두루 역임을 하여 화려한 경력을 가짐
- 본래 유순하고 온건한 성격을 가진 박제순은 부지불식간에 친일파의 거두가 되어버림
- 을사조약 체결당시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입장을 수 분만에 "에라 모르겠다"로 바꾸어버리고 찬성을 함
- 즉, 이완용과 닮았으나 이완용이 가진 자신만의 강한 소신과 철학은 없었음
- 1905년 전권대신으로 을사조약을 주도하여 체결하고 을사오적이 됨
- 그 후 이완용 내각이 설립될 때까지 총리대신으로 내각을 이끌었음
- 1909년에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협조함
- 그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음
- 그러나 강한 반일항전으로 인해 목숨에 위협을 느끼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음
- 그러나 그 후 계속해서 친일활동을 한 결과 상속자 박부양과 함께 당시 아주 부유한 생활을 했음
- 상속자 박부양은 10대의 나이에 일본으로부터 자작작위를 받고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음
- 1916년 사망함


[박제순 어록]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 이토의 을사조약 요구에 목숨 걸고 반대하겠다는 비장한 뜻을 보이며

"본 협약안에 대해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 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 비장한 결의는 온데 간데 없고 막상 이토 위협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박제순.
  이에 이토는 고종의 "명령"이 있으면 조약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 박제순이 도장을 찍게 만든다.

"내가 가장 감격한 바는… 위로는 천황폐하로부터 일반 문무백관, 아래로는 서민 제군이 모두 충심으로 신부한 우리들을 대함에
극히 간독함이라. 이러한 이상에는 금후 일선 양민 간의 친화는 오래되지 않아서 이룰 것이오,
수년을 지난지 않아 일선이 일단이 될 것은 우리들이 확신하는 바로다."
- 일본 시찰을 다녀 온 뒤 일본인들의 거짓 친절에 감격해서  
(블로그 지식닷컴 참조)







<5> 권중현


- 1854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남
- 일찍부터 일본어를 습득하여 일본 정계 사정에 정통하였으며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통으로 인정받음
- 1883년 부산감리서 서기관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관직의 길을 걸음
- 1888년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선 일본의 문물에 크게 감명을 받아 일본에 감화되기 시작함
- 1892년 주일 공사에 재직 중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 및 항해에 관한 조약도 체결함
- 1894년부터 일본의 신임이 두터운 이른바 왜당으로 알려져 고위 관직을 두루 겸함
- 1899년 법부와 농상공부 대신을 겸임했음
- 1904년 러일전쟁시 육군부장으로 위문사가 되어 전장을 순방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음
- 1905년 농공상부 대신의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을사오적 중 일 인이 됨
- 1907년 박제가와 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관직에서 물러남
- 시종일관 일본과 가까이 지낸 덕에 오랫동안 아주 순탄한 고위관직을 두루 섭렵하고 물러나게 되었음
- 그 후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을 부여받고 또 다시 친일활동을 이어감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남은 인생을 아주 순탄히 지내다가 1934년 사망함
- 한 때는 국가개혁을 위한 개화파, 한 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종의 황제등극을 추종, 그리고 을사조약 찬성등
   전형적인 대세 영합론자의 삶을 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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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나라 친일파의 선두주자격인 을사오적의 요약을 마칩니다.
제가 여기 적은 내용들은 정말 글로써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축소해서 적은 것일겁니다.

이들이 당시부터 나라의 5대 역적이라 불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당시 이들의 역적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우리의 수많은 독립투사분들이 당했던 그 고통스런 나날들이
이 글속에는 아마 새발의 피로도 묘사되지 않았으리라,
또한 그 어떤이가 글을 쓴다해도 새발의 피 이상으로는 쓰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겪어보지 못하고서는 그 시대가 주는 암흑속의 고통을 짐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암흑스런 시대에 희망의 불씨마저 빼앗아가는 동족의 잔인하고 악랄한 친일활동.


그 때 그 사람(같지도 않은 사람)들을 우리 후손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되며,
언젠간 진정 제대로된 정권이 더시 들어선다면 국운을 걸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친일파의 잔재들을
하나하나, 티끌하나 없이 청소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독도는 물론 간도협약까지 파기해 나가야 합니다.
이미 시효가 지나 파기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정권에서 다시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진정한 부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편향된 민족주의도 아니요, 왜곡된 국수주의도 아닌,
진정한 주권회복과 진정으로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후손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재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 위원회는
한시적인 대통령 직속기구로써 빠르면 내년에 시한이 만료됩니다.

이번 정권에서 다시금 그 시한을 연장하는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구요.
참여정부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직속기관으로 아주 많은 일을 해 온 기구들이 존폐의 위기에 설 그 때,
과연 국민들의 반응은 어떨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쓰다보니, 4시간째.
늦은 밤이군요.

갑자기 열받아 쓴 글인데, 저도 모르게 4시간이 금방가네요.





자료 찾아가며 정독해가며 옮겨적는데, 어찌나 헛웃음이 나오던지요.
이런 느낌이 드는 글은 생전 처음 써보는 것 같습니다.

이상,

아라타였습니다.




대부분의 내용과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였고, 부분적으로 네이버, 야후 블로그 검색으로 발췌하였습니다.

참고로, 사실이 아닌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은 답글로 진실을 가르쳐주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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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써빙맨
09/09/30 05:00
수정 아이콘
퇴근하고 집에와서 습관적으로 Pgr을 들어왔는데 늦은 시간 너무나 좋은 글을 읽습니다....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 위원회가 과연 내년에도 존속이 될련지...
한숨부터 나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09/09/30 05:02
수정 아이콘
사실 190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친일을 한 것은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철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나라가 망했으니까요. 하지만 저 을사오적만큼은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죠. 저는 종교가 없지만, 저사람들만큼은 정말로 영원히 지옥불에서 고통받았으면 합니다.
서재영
09/09/30 07:18
수정 아이콘
을사오적은 까야 제맛. 저기 뭐 생선 바쳐서 잘된 X도 있네요.크크
길버그
09/09/30 08:12
수정 아이콘
제 이름이 김윤식인데... 에휴

친일파ㅜ_ㅜ 돌맞아 죽었다라고 나와있더라구요
빵리발갰뜨
09/09/30 08:19
수정 아이콘
이완용의 경우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역적이나 조선왕조에는 충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더라는...
이완용은 무조건 합방이 아닌 이상 왕조가 존속되기 힘들다고 보았다죠.
실제로 고종 암살의 배후나 칼을 들고 고종을 협박했다;(마치 삼국지의 화흠 같군요. 당대의 문장가의 말로;)
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이완용은 고종 승하 이전까지 늘 서간을 주고 받았고 종종 내왕했다죠.
이완용을 보면 평소엔 가후를 생각했었는데... 정리해주신 걸 보니 정말 처세의 달인이네요. 친미, 친러, 친일파로 변신;;

참정대신 한규설은 개인사로 따지면 탐관오리에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저 장면 하나로 만고의 충신으로 남았죠; 하긴 전봉준이 꼽은 대표적 탐관오리였지만 자결 하나로 위인전으로 남은 민영환도 있으니...(제 개인적으론 한국 군대 총대장이었던 민영환은 자결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그랬던 것처럼 봉기를 했어야한다고 봅니다. 인생의 마무리까지 엉망으로 했을 뿐, 결코 존경할 위인이 아님)
본문에도 있지만 법무대신 이하영은 나중엔 을사오적보다 더 난리를 치는데 그냥 묻히고(박제순은 총칼을 들이대자 바로 태도가 변했고 이하영은 끌려간 후에 생각이 변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것도 참 역사의 아이러니. 이지용이 왕족이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할아버지 보기 부끄럽지 않더냐(...)
어쨌거나 을사오적은 만고의 역적으로 남아야죠. 멀쩡(하지는 않았지만)한 나라를 통째로 넘긴 이름들이니까요. 아마 최소한 50년은 역적의 대명사로 남을 것 같습니다.
엷은바람
09/09/30 08:21
수정 아이콘
절대 친일을 두둔하는건 아닙니다만.. 전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단지 '권력' 욕심이 아니라 '신변의 위협' 때문이라면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예전 독립 투사님들은 정말 대단하신거지요
제가 볼 때 지금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생명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라면 거의 전부 친일(or친미)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왜일까요..
릴리러쉬
09/09/30 08:24
수정 아이콘
이근택 출생년도가 1965라고 잘못 되있는거 같아요.
09/09/30 08:43
수정 아이콘
엷은바람님//
< 단지 '권력' 욕심이 아니라 '신변의 위협' 때문이라면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뭐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당장 일가족의 생명이 위험하다면 꼭 국가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 그렇기에 저는 고관대작을 줘도 안합니다. 불타는 건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소방수를 할 수 없듯이, 국가를 위해 산화할 수 없다면 저 자리에 올라가서는 안되는 것이겠죠.
술로예찬
09/09/30 08:50
수정 아이콘
한일강제병합 100주년 이라고 이름 붙이는 미친 것들이 생각나서 아침부터 열받네요
09/09/30 09:22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벌쳐의 제왕
09/09/30 09:42
수정 아이콘
질겅~ 질겅~ 질겅~
같이 씹었습니다.
나라 팔아먹은 댓가로 아직까지 배에 기름칠하고 있는것들을 생각하면
쉽게 분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09/09/30 10:04
수정 아이콘
저 역시 신번에 위협이 있는데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5명은 국가를 팔아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한 인물이기에
그 논리로는 용납이 안 되겠죠.

여하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azellnu
09/09/30 10:06
수정 아이콘
친일에 기대어 쌓아올린것으로 아직까지 호위호식하며 그것으로 사회전반에 권력을 잡고있는게 현재우리나라입니다.
에이구 생각만해도 짜증이.
세우실
09/09/30 10:35
수정 아이콘
을사오적은 까야 제맛이라는 말이 가슴속 깊이 들어오네요.
설탕가루인형
09/09/30 10:38
수정 아이콘
삼국지나 신장의야망같은 게임을 좋아하는데, 항복권고를 할때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병력도 형편없고, 인물도 없고, 금과 병량도 없으면서 왜 항복을 안할까...더구나 만약 그런 국가의 국민이라면, 오히려 큰 나라 안에서 사는게 편안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삼국지나 신장의 야망의 시대적 배경에서는 한일합방과 같은 외세의 침략이 아닌 내란이기 때문에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저 또한 실제로 을사오적과 같은 입장에 서있었다면 어떻게 판단하고 생각했을지 확신하지 못하기도 하구요..
또한 아무리 글이나 말로 의협심 강하게 떠든다고 해도, 막상 집에 칼든 강도가 들어왔다고 하면 가족과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협상'을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게 규모가 커져 국가라고 한다면...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얼마든지 헐뜯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로써는 자신과 가족, 국가를 지키기 위한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고 자국민을 핍박하고, 호위호식을 하며 벌은 재산이라면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친일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재산을 환원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노력했던 분들에게 보상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던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큭큭나당
09/09/30 10:48
수정 아이콘
시대상황상 친일이 개인적으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수도 있다는 점에는 약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조국을 팔아먹고, 그 조국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힌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죠.
대부분 악질 친일파들이 그점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구요.
09/09/30 10:59
수정 아이콘
설탕가루인형형님// 원래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가 갈라진 거라면야 말씀하신 부분이 타당합니다만 아예 다른 국가였다면 그렇지도 않죠. 당장의 영위보다는 그 이상의 무형의 가치가 있는 문화라는 것도 있고 역사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만약 그런 게 없다면 아마 전세계는 미국으로 통합되지 않았을까요? ^^;

더구나 설령 큰 나라에 흡수된다고 쳐도 국가라는 조직이 흡수되는 것과는 별개로 개개인들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를 동등한 일본 국민으로 대하지는 않았잖아요. 말 그대로 식민지일 뿐이지 온전히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게 아니죠. 그러면서 갈등도 많이 생기구요.

솔직히 저도 막상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강하게 반발하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점은 회의적이긴 합니다만... 기본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죠. 더구나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와 국민들은 수탈당하기만 했죠. 그렇다 보니 매국 행위에는 도저히 역지사지를 적용하기가 힘드네요.
09/09/30 11:11
수정 아이콘
1900년 초에 현재 장관급 이상인 저 정도의 대신자리에 오를 정도의 인물이었으면,
당시 일본이 가진 침략마인드나 당시 우리나라를 두고 벌어지는 갖가지 일본 행위에 대해
그야말로 시대적 배경이나 급변하는 상황을 꿰뚫고 있다고 보는게 맞죠.

저 때 왜 이토가 일본군으로 겹겹이 회의장을 둘러쌓고 협박으로 서명에 찬성을 강요하는지 그 전부터 이 조약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몇몇 대신들의 사주로 저 자리까지 만들어 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찬성을 한다면 정말 이 나라를 일본에 넘길 수 있으며 자기들은 순간 나라팔아먹은 놈이 되는 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찬성을 했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찬성을 해서는 안되는 상황이 됐어야 합니다.
더구나 일반 백성도 아닌 황제 바로 아래에서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말입니다.
일말의 여지없이 목숨을 내놓고 반대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찬성하기 전부터 이미 일제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고,
오히려 서명 후 역적죄에 대한 뼈를 삭히는 반성과 개과천선은 커녕 독립투사들을 핍박하고,
일본에 의한 공직과 귀족자리, 하사금까지 넙죽받는 것을 보면 평생 까여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일반 백성의 위치에서 진정 강한 반일항전을 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으나,
나라의 대신의 자리에서 목숨이 위태로워 친일을 했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은 죄를 추궁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거론되고 있는 일반적인 친일파 수는 3500명내외가 됩니다.
적어도 이 3500명 정도는 우리가 청산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09/09/30 11:13
수정 아이콘
전북 익산으로 수정부탁합니다~
09/09/30 11:13
수정 아이콘
릴리러쉬님// 오오, 수정했습니다....;;

오월님// 완산이 아니라 익산이란 얘기인가요. 완산이 현재의 익산인가요? 수정은 하겠습니다..
루크레티아
09/09/30 11:38
수정 아이콘
시대 상황상 친일을 공감하시는 분들이 꽤 많아서 놀랍군요.

소위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것을 모두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분명 무리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국정을 움직이는 관리였다면, 이것을 시행할 경우에 나라가 뻔히 어떻게 되는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시대적 정상 참작의 여지고 나발이고 없는 짓입니다. 싸우고, 자결하고, 싸우는 이들을 지원하는 행위는 분명 노블리스 오블리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런것은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국가가 그런 지경까지 가게 만든 책임이 있다면 그냥 관직이고 뭐고 깨끗하게 버리고 나오는 행위 정도는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들을 막을 힘이 없어서 보고만 있어야 했던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 흐름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것과 그 흐름에 편승하여 영화를 누렸던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09/09/30 11:57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글 잘 봤습니다.
SCVgoodtogosir
09/09/30 12:14
수정 아이콘
Arata님// 아마 오월님께서 말씀하신건 Arata님께서 이완용이 묻혔다고 기재하신 '전남 익산' 을 말씀하시는거 같네요. '전북 익산'이 맞습니다.
그리고 완산은 그 옆의 전주 근처의 '완산'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완산은 현재의 익산은 아니고 전주시 완산구 일겁니다.
익산은 오래전에 '솜리'라는 지명이었고 일제시대때는 '이리'로 불렸습니다.

이완용은 전북 익산군 (현 익산시) 낭산면 내산동 - 내장부락에 묻힌 것이 맞고
이지용의 출생지는 전북 완산이 맞습니다.
09/09/30 12:18
수정 아이콘
루크레티아님// 저도 동감합니다
로랑보두앵
09/09/30 12:4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지개곰
09/09/30 13:05
수정 아이콘
시대적 상황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감수 하고 저런 일들을 했다면
스스로 역사의 비난을 감수해야 할 책임이 생기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09/09/30 13:10
수정 아이콘
SCVgoodtogosir님// 네,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하핫

수정완료.
담배피는씨
09/09/30 13:3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사실들 많이 알고 가요~
09/09/30 13:47
수정 아이콘
많이 이해해서 국사과목은 몰라도 최소한 근현대사 과목은 필수로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우신권
09/09/30 18:28
수정 아이콘
저들의 후손이 선대의 유산을 되돌려 받고자 하는것은 어찌 생각해야 합니까??선대의 잘못은 선대의 잘못이고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
재산을 내놓으라는 생각인것 같은데요...정말로 울분이 터집니다!!!
SCVgoodtogosir
09/09/30 18:31
수정 아이콘
신우신권님// 후손은 아무 잘못 없다 하더라도 그 전에 재산을 형성한 과정 자체가 명백한 불법이고 반민족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몰수해 마땅하죠. 그 재산을 만들기 위해 잘못한건 없지만 잘 한것도 없으니까요.
소금저글링
09/09/30 19:43
수정 아이콘
친일파 들 중에는 처음에는 계몽주의자 개화주의자 민족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중에 일본의 문물과 그 당시 미국이나 서방을 방문하고 그들의 제국주의 적인 면모를 보고

차라리 양놈보다는 같은 동양인이 낮지 않겠냐며

이상하게 친일의 길로 들어선 이들도 많습니다 -_-;;;

이거 얘기하다보면 끝이 없어지는거죠....
Rocky_maivia
09/09/30 22:51
수정 아이콘
내가 저 당시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멀면 벙커링
09/10/01 01:39
수정 아이콘
신우신권님// 명색이 자본주의 사회인데 지 할애비, 애비가 강도질 한 장물 그대로 갖겠다고 우기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죠. 자본주의 사화에서 살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그냥 맨몸으로 북한으로 꺼져줬으면 좋겠습니다.
09/10/01 18:25
수정 아이콘
OrBef2님//
동감하고 갑니다. 제가 여지껏 읽은 댓글중에 가장 인상적입니다.

SCVgoodtogosir님//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데요...-_-; 연좌죄를 인정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입니다.
재산지키는것도 쉬운건 아닌디.....
비형머스마현
09/10/03 11:13
수정 아이콘
예전에 이완용에 대한 역사 스페셜을 본 적이 있습니다. 친일파가 되려고 작정했다기 보다는 글쓴 분이 적었듯이, 권력의 그늘에서 좌천당한 나머지 재기의 수단으로 삼은 일본 세력에서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하게 되면서 친일파가 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점이 그 시대의 어느 유명한 사람이 이완용에 대해서 평가하길 "이완용이 재물욕을 버렸다면 그는 세상을 바꿀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정치수완은 대단했나 봅니다.

그리고 한번에 총을 3번이나 맞고도 살아남은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얘기하는게 있습니다. "악인은 오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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