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어떤 남자애가 있었다, 라고 쓴다. 나는 이따금 그 남자애...라고 적는다. 의미 없는 낙서로 네가 한 남자애라는 지칭으로 그렇게 모래더미처럼 내 안을 가끔씩 쏴아 쏴아 쓸려 다닌다.
춤을 추던 남자애. 키가 컸던 손가락이 길던 살결이 무척 희던 조금은 말랐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던 웃는 모습이 참 예뻤던 남자애.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내게 성큼 다가왔던 그 애. 너무 일찍 졸업해 버린 대학생. 나는 너의 이름을 매번 너무도 늦게 기억해낸다.
나는 고름이 흐르는 몸으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나는 몸이 엉망이었다. 병원에서 면박을 듣고 피를 닦아내고 소독한 자리를 조심조심 옷으로 덮어둔 채 너를 만나러 걸어갔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는 꼭 마지막엔 고개를 숙이곤 울상을 지었지. 이 사람도 사내일까, 나는 매번 의문스러웠다. 너는 그냥 성별이 없는 사람이길 바랬다. 너와의 만남이 그저 피부만을 건드리는 그런 깊이일 거라고 그러나 만남의 끈이 그리 부실하지는 않을 거라고 질기고 질길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제어할 수 없는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었다. 하루하루 너무도 과열되어 있던 그 가을의 중반- 나는 고름이 흘러나오는 몸으로 너를 처음 만났다. 그 사실만 아니었어도 나는 재빠르고 과감했겠지. 그 애를 만난 그 짧은 몇 주간 열기를 식혔다. 나는 본의 아니게 조신한 여자애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떠오른 한 남자애. 너의 글을 읽는다. 글자 하나하나가 정교한 장신구 같다. 좋은 광택의 칠을 입힌 구슬 반지 한 알을 위해 세심한 집중의 손길이 곳곳마다 닿아있음을 본다. 네가 내게 한 말을 아직 기억하지. 모든 걸 다 쏟아버리는 사람이라 무서웠다고. 나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줄 모른다. 나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덩어리를 날 것 그대로 네 앞에 내놓았다. 네가 당황하길 바랐다. 너는 그냥 말없이 볼에 입을 맞췄다.
물고기 같던 남자애. 헤엄치는 기분이라고 말하던 그 애. 뱀 같던 남자애. 나를 칭칭 감고 싶다고 말하던 그 애. 그처럼 거침없던 애. 우리는 이제 서로가 필요하지 않지만 그 남자애가 일깨운 감각들이 아직도 수천의 물고기처럼 온 세포를 간질이며 몸 안을 비집고 헤엄쳐 다니는 것이었다.
지금도 춥다, 라고 말 건네면 어떤 얘기라도 다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마지막의 그 날처럼 기다란 손가락을 내 손등위에 포개어 둘 것만 같은 것이다. 우리는 습관처럼 춥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는 마음으로 좀슬은 기억들을 토해냈고 남자애가 미소 지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몇 다리까지 걸쳐봤어요? 서슴없이 물어보던 남자애. 나는 누군가의 세컨드였어요, 서슴없이 자신의 이야기로 응수하던 그 애. 다른 남자를 만나도 상관없다던 그 애. 춥다고 말하면 안아주겠다던 그 애. 그 남자애는 아주 볼 살이 통통하고 평범하게 생긴 어떤 여자애와 연애를 시작했고 그 후 어느 날 문득 내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도 추워요? 나는 아니요 따듯해요, 라고 조금은 거만한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던 것 같다. 간간히 읽게 되는 너의 글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가끔은 춥다고 네게 말해도 될까. 그저 기억에게 말 건네곤 한다. 아직도 가끔은 춥다... 그냥 모래알갱이처럼 서걱거리는 그 남자애, 란 단어에게. 길고 하얀 뱀 같던 어떤 남자애- 촉각으로 먼저 기억되고 마지막에 이름이 떠오르는 그 차가운 나라의 기억에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