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유니콘스 12년사, 삼성라이온즈의 역사, LG트윈스의 역사, 한화이글스의 역사, 두산베어즈의 역사에 이은 6번째 시리즈인 롯데자이언츠의 역사입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롯데자이언츠.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정적인 응원문화를 지닌 팬, 그리고 가장 많은 팬들을 지닌 구단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팀입니다. 그리고 이 팀에서 배출한 선수, 특히 에이스들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정말로 국가대표급이라고밖에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동원 - 윤학길 - 박동희 - 염종석 - 주형광 - 문동환 - 손민한 - 송승준.
그렇다고 해서 투수들만 강한팀도 아니었습니다. "용용포"의 김용희, 김용철, 1984년 한국시리즈 "공포의 1할타자" 유두열, 한영준, "호랑나비" 김응국, "자갈치" 김민호, "탱크", "악바리" 박정태, "쳤다하면 3루타" 이종운, "마포" 마해영, 임수혁, "검은갈매기" 호세,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
하지만, 한때의 침체기로 인해 몇몇 악플러들이 꼴X, 봄X, 꼴X건, 비밀번호 8888577등으로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롯데는 그런 조롱만으로 결코 나타낼 수 있는팀이 아닙니다.
1984년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투혼, "염라대왕" 염종석과 "슈퍼베이비" 박동희, "남두오성" 전준호,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등이 합작해서 만든 1992년의 혈투, 전무후무한 팀도루 220개를 앞세운 "롯데 기동대"의 1995년, 그리고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아군이건 적군이건 가리지않고 그라운드를 불태워버리는 마력을 지닌 롯데자이언츠.
비록 미숙하나마 롯데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절취선----------------------------------------------------------------------------------------------------------------------
1982년, 부산을 연고지로 롯데자이언츠가 창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해에는 아시다시피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실업팀의 슈퍼스타들이 국가대표로 빠져야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롯데는 국내 최고의 선발투수 최동원, 야수로는 유두열, 심재원이 빠지며 가장 많은 선수 - 3명 - 들을 국가대표에 차출합니다.
그 대신, 국가대표 3루수이자 중심타선의 핵인 김용희를 중심으로 김용철, 권두조, 김정수등이 야수진을 이루었으며 마운드에서는 최동원이 빠져나간 공백이 컸지만 노상수와 천창호를 중심으로 마운드를 구성했습니다.
개막전상대인 해태타이거즈를 14 : 2로 대파하며 롯데는 개막전에서 특급투수 이선희가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으며 주춤한 삼성라이온즈등을 대신하며 리그 상위권으로 치고올라갑니다.
하지만, 중심타자 김용희가 허리디스크로 인해 장기레이스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고 - 하루 폭발하면 며칠 잦아들다가 한경기 결장 - 김용희가 빠지면 김용철등이 힘겹게 타선을 이끌어 갔으며 노상수와 천창호도 많은 이닝을 소화해내면서 결국 롯데는 상위권에서 중위권으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즌 중반부에서 삼미슈퍼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혀버리며 롯데는 하위권으로 쳐져버립니다.
전기리그 40경기에서 13승을 거두며 꼴찌 삼미슈퍼스타즈와는 3경기차이로 5위, 후기리그 40경기에서는 18승 22패로 해태타이거즈와 동률을 이루었으나 결국 종합성적은 31승 49패로 5위에 머무릅니다.
중심타자 김용희는 63경기에 출장하며 타율 0.284, 홈런 11개, 38타점을 기록했으며 김용철은 71경기 출장, 타율 0.300, 홈런 10개, 39타점, 김정수는 79경기 출장, 타율 0.274, 홈런 11개, 4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마운드에서는 노상수가 원년의 투수들중 가장 많은 이닝인 232.1이닝을 소화하며 ERA : 2.94, 14승 19패를 기록했습니다. 천창호는 173.2이닝, ERA : 3.83, 7승 13패를 기록합니다.
1983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멤버 최동원, 유두열, 심재원이 들어오며 전력이 보강된 롯데. 하지만 최동원은 고교야구, 실업야구를 거치며 무리한 연투와 혹사를 당하며 팔꿈치와 어깨가 많이 망가져 예전만큼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최동원은 208.2이닝을 던지며 ERA : 2.89를 기록했으나 9승 16패로 예상과는 저조한 성적을 올렸으며 실업야구의 라이벌들인 임호균과 김시진보다 저조한 데뷔를 보여주었습니다.
1983 최동원 : 38등판, 21선발, 208.2이닝, ERA : 2.89, 9승(8선발승, 1구원승) 16패 4세이브, 148K
1983 임호균 : 35등판, 29선발, 234.2이닝, ERA : 3.03, 12승(11선발승, 1구원승) 15패 2세이브, 86K
1983 김시진 : 37등판, 25선발, 229.1이닝, ERA : 2.55, 17승(14선발승, 3구원승) 12패 1세이브, 154K
최동원을 제외한 마운드를 살펴보자면 원년 에이스 노상수가 169.2이닝을 던지며 이닝의 상당부분을 소화했으며 8승으로 최동원에 이어 김문희와 함께 팀내 다승 2위에 올랐습니다.
원년에는 노상수, 천창호에 이어 팀내 3인자였던 김문희가 155.1이닝을 던지면서 역시 8승을 올렸습니다. 반면에 천창호는 선발투수가 아닌 구원투수로 보직을 변경하며 7구원승을 올립니다.
타선에서는 중심타자 김용희가 18홈런을 때려내며 작년의 부진했던 모습을 씻어냈으며 작년에 김용희, 김정수와 더불어 11개의 홈런을 때려냈던 박용성도 1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타선의 중량감을 더해줍니다. 김용철은 3할을 치지는 못했지만 역시 14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김용희와 함께 "용용포"로서의 활약을 과시합니다.
유두열은 3할을 치면서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작년의 중심타자 김정수가 부진했으며 유격수 권두조는 0.168이라는 저타율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1986년 청보에서는 0.162라는 타율을 기록하며 KBO 최저타율 기록을 세웁니다. - 원래는 1997년의 박진만이 세운 0.185였으나 1986년 권두조가 세운 0.162로 기록이 변경되었습니다. -
게다가,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와 프랜차이즈 스타 임호균, 김진우를 앞세운 삼미슈퍼스타즈, 강속구 투수 이상윤, '좌효조 우종모'라는 말을 만든 김종모,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과 재일교포출신 잠수함 투수 주동식등을 앞세운 해태타이거즈등에게 밀리며 전기리그 50경기에서는 22승 27패 1무로 4위, 후기리그 50경기에서는 21승 29패로 꼴찌를 기록했으며 종합순위에서는 43승 56패 1무로 꼴찌를 기록합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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