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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6/15 10:18:01
Name Outlawz
Subject [일반] 조일전쟁에 관하여 몇가지 생각
1. 임진왜란 이란 표현은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있는 일본비하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1592년 시작된 전쟁은
해적 혹은 일본 지방정부의 군벌세력의 난동이 아닌, 일본 중앙정부와 조선 중앙정부의 전쟁이므로 조일전쟁이란 표현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이란 표현이 굳어져 저 역시 임진왜란이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승리한 이 전쟁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구들이 일으킨 난을 평정 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일으킨 전쟁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맞이한 러시아 군 처럼 격파하고 최종목표를 달성했으니깐요.
이 전쟁에서 '왜구' 를 '일본' 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을 격상시키는 의미가 되겠지요.


2. 조일전쟁 때 조선 수군의 활동영역에 대해 지도를 한번이라도 펼쳐 보신 분들은, 아마 이러한 의문을 가지셨을 겁니다.
부산에 본영을 두는 수군이 경상 좌수사, 거제에 본영을 두는 수군이 경상 우수사지요. 그렇습니다. 좌우가 바뀌었지요?
이것은 현재 경상남/북도 로 쓰이는 지명과 달리, 경상좌/우도 등으로 쓰이는 당시 구분에 따르면 하삼도(경상,전라,충청)
에서 공통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을 알고 나면 의외로 간단한게, 지도를 펼쳐놓고 우리가 내려다 보는 경상도의 동쪽은 부산,울산 등지입니다. 진주, 사천
등은 서쪽편에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임금이 살고있는 서울에 앉아서, 경상도를 내려다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왕이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부산이 서쪽이고, 진주가 동쪽이지요. 그래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도에 바짝 붙어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이순신의 좌측에서 출발, 항해를 계속하여 우군과 합류했던 것이지요.


3. 순변사 이일이 대구근방에서 제승방략에 따라 모집한 병사들을 경북 상주에서 훈련시키다 일본군 소수부대 기습에
완전히 와해되어 패전했습니다. 그간 왜구들이 자주 침범했던 해안가도 아니고, 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을만 한 지역의
출신병이 아닌 병사들이라, 상당히 오합지졸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중앙군에서 내려보낸 최초의 장군인 이일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짐에 따라, 왜군은 손쉽게 부산부터 상주에 이르는, 서울의 최단거리 루트를 확보하게 됩니다.

선조는 니탕캐의 난을 제압한, 용맹한 장군으로 이름난 부마장군 신립을 순변도사로 임명해 자신의 칼까지 내어주며 힘을
실어 줍니다. 하삼도의 군사를 모아 모아 대군을 만든다던 야심찬 계획은 간데없고, 충주성에 도착할 무렵 그가 가진 총
병력은 3000~8000명 사이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르는 최단거리 루트중 이미 경상도가 일본군에 확보
된 이상, 충청도민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허나, 중앙에서 임금이 보낸 조선 최고의 용장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충청도는
피난을 멈추고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군 최고의 에이스 신립의 등장은, 충청도 지역의 피해를 증가
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종사 김여물이 신립을 향하여 조령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진언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이일이
훈련중에 일본군의 기습 한방에 전병력이 일제히 패주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마치자, 신립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험준한 조령에서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이 오합지졸들이 울창한 숲을 방패삼아 모두 도망칠 것이다.' 신립의 생각은
이러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6세기 동양의 장군들이 대개 그러할진대, 신립 역시 요샛말로 말하면 포스 넘치는 장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를 하자마자 거짓 보고라며 목을 치고, 조정에 적은 상주에 주둔중이라는 허위장계까지 띄웁니다. 신립으로서는
이 명색만 정예병인 오합지졸들이 도망갈까 끝까지 기세를 잃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일도 마찬가지인데, 이일 역시
일본군이 접근중이라는 상주 백성의 보고를 받은 후 목을 쳐버립니다. (물론 이일이 경계병조차 세우지 않고 훈련을 하다 기습을
맞았다는 것은 개전 전까지 그에게 지장이란 평가가 있던 것 자체를 의문시 하게 만드는 행동이었지요) 아마 엄재경이 이 시대에
앵커를 하고 있었다면 신립은 죽으면 죽었지, 기세에서 밀릴려고 하는 장군은 아니거든요! 라고 멘트했을지도 모릅니다.

기병의 수는 정확히 나타나진 않았지만, 신립이 김여물에게 말했던 바로는 기병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나, 전투 당일 충주는 비가 내렸고, 기병을 운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지요.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은 기병의
축차 투입을 결정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이 소수의 병력의 전력을 줄이기 위해서나 쓸만한 축차 투입을 결정한건 의문입니다.
다만, 일본군 선봉대와 조우한 신립은 세번 축차 투입을 하였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앞선 두번의 축차 투입에선
적의 진격을 저지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신립이 기마전의 명수인것은 어느정도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아무튼 마침내 군세가 다하고 패전이 확실해지자, 신립은 그 와중에도 조정에 패전 장계를 띄우고 옥쇄할 뜻을 표합니다.
종사 김여물만은 살리려고 하였으나, 김여물 마저 옥쇄할 뜻을 나타내어, 두 장수는 일본군 수십명을 베고 탄금대에 몸을
던져 순국합니다. 이때 신립이 싸우다 너무 더워 (혹은 칼이 달궈져) 물에 연거푸 들어갔다 나와 싸웠다는 등, 같이 참전한
조카가 도망치려 하자 멱살을 끌어잡고 같이 물에 몸을 던졌다는 등 많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어쨌든 신립이 시간을 벌고 적의 진을 빼놓는 전술을 펼쳤다면, 충청도민들은 훨씬 빨리 피난을 떠났을 것이고, 뒤이어
임진강, 대동강 방어선을 펼칠 준비 시간을 더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요격 부대장으로서 임금의 대검도 받아찬
마당에, 일본군을 일거에 격파하겠다는 뜻을 가진것으로 보입니다. 순변사 이일이 패주하여 신립에게 일본군의 군세를
설명하였기 때문에, 신립 역시 여진족을 때려잡는 방식으로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 인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끝끝내 야전을 고집하고 기마전술로 맞선 것은, 그가 자신의 생사를 놓고 결전을 펼쳐야 하는
마당에 자신이 가장 익숙하고 자신있는 전술을 꺼내든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스타크래프트 사이트 이니, 스타크래프트로 표현한다면, 임요환 선수에게 결승전에서 0:2로 밀리고 있는 홍진호 선수가,
3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투햇 히드라 러커 카드를 꺼내든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흔히들 말하는, '남자라면' 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 신립장군에게 패전의 멍에가 씌워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감정적으로 신립의 편에 서게 만드는 하는 이유이구요.

패전 후 옥쇄하는 장수들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어느정도 올라갑니다. 신립 이하 출정군 모든 장수들이 전사하였으며,
살아 돌아온 장정은 서넛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순변사 이일이 다시 한번 도망쳐 이후 임진강, 대동강 방어선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작고 큰 전과를 올린 사실을 보았을 때는, 신립 역시 훗날을 기약하여 후퇴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부마장군의 위세를 떨치는 자존심 강한 한 장군으로서는 선택못할 치욕스러운 행동이었겠지만요.
아무튼, 8000명으로 추산한다면 당시 조선이 단기간 내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병력의 1/10을 한 전투에서 모조리 손실했다는
것인데, 이 전투에서의 패전이 일본군이 한강 방어선 까지 별다른 저항없이 진격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게
남겨야 겠지요.

신립장군에 대한 평가는,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맏기겠습니다.


4. 일본군이 한성으로 쾌속진격을 하며 조정이 두려움에 벌벌떨며 평양으로, 의주로, '고려천자' 명 신종 만력제에게 입관을
요청하다 거절당하고 마침내 분조 하게 될 때까지, 늘어진 보급선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며 일본군의 기를 야금야금 빼놓은 것은
의병입니다. 의병은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일본군이 한성으로 진격 할 당시 호남에서 4만명이나 달하는 근왕군이 올라와
일본군과 전투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게, 불과 천여명의 일본군에게 기습을 맞고 일거에 와해
되어 후퇴하고 말았지요. 물론 이때 보존한 병력이 이치전투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주요 보급로인 경상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의 뒤통수를 따갑게 만들었고,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을 방어하고
곡창지대를 지켜낸 병력도 다수가 관군이 아닌,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무능한 관군들이 전부 도망치는 와중에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표상해 주는 의병들이 이 전쟁을 주도한 것일까요?

실제로 조일전쟁의 주요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군의 승리가 일본군의 승리에 비해 더 많습니다. 초창기 조선군의 승리가
수성전에 그 비율이 있었다면,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조선군이 공격측에서도 일본군에게 승리를 더 많이 가져갔습니다.
주요 전투는 105개로 나눠지는데, 이 중 조선군이 공격한것이 68회, 일본군이 공격한 것이 37회 입니다. 이 중 조선군이 65회의
전투를 승리로 가져갔으며 일본군은 40회의 승리를 가져갔는데, 승전 65회 전투의 38회는 조선 관군의 단독전입니다.
의병이 단독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0회 이므로, 이 전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관군입니다.
(양재숙/다시쓰는 임진대전쟁 2권 274p)
물론 이 때는 관군과 의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병 모집을 보고 관군을 따라가면 관군이 되는 것이요, 의병장을 따라가면
의병이 되는 것이며, 관군과 의병의 합동작전에서 의병장이 더 경험이 많거나 연령이 많으면 주장을 맡았다고 사료에 나와있는
것을 볼 때, 의병의 역할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개전 초기 일본군의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만든건
조선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공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무능한 정부/관군이 도망치는 새에 의병들이 일어나 의병들이 전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일본군을 격퇴한 것은
다소 과장된 전과이며, 개전 후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을 무렵부터 조선의 첨단 과학무기들이 속속들이 전장에서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식으로 무장된 일본군의 조총에 활이나 쏘다 패전했다는 등, 행주산성에서 무기가 없어 돌을 던져 싸웠다는
'이미지' 적인 조선의 상황이 저는 오히려 아쉽기만 합니다. 실제 일본군 병력의 다수는 조총병이 아니라 창병이며, 실제 전국시대
에도 창병들이 가장 주요 병력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각개병사 화기에서도 크게 밀린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일본군의 조총 운용 능력은 조선군이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조선의 노병이 운용하는 대궁은 조총의 유효사거리보다
더 길며, 실제 전략 운용 면에서 활과 화살의 보급, 운용이 조총과 탄약의 보급, 운용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총이 갖는 파괴력과 신무기에 대한 공포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조선과 일본이 차이가 벌어진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5. 도움이 된 것이라곤 머리수 늘리는 정도지만 우방국(이라 쓰고 종주국 이라 읽어도 무방할)인 명나라 고려천자의 지원과,
국토 깊숙한 곳까지 후퇴하면서 민중의 유격전과 국가의 힘을 모아 침략군을 격퇴한 것은 서두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을
맞이한 러시아군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400여 년이 지난 지금, 조선 수군에 의해 완전히 격파된
일본 수군은 우리가 따라잡기 힘들정도로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부산에서부터 한양까지 걸어가는 속도와 비슷하게
쾌속진격을 했던 일본의 강한 육군은 (건너가기만 한다면) 비슷한 시간 내에 도쿄를 점령할 만한 한국 육군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이 유일한 한국과 일본의 전면전이었던 조일전쟁을 생각하며,
지금 이땅에서 한국말 쓰며 한국 국적가지고 살게 해주신 분들께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를 드려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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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마이켈
09/06/15 10:27
수정 아이콘
와~ 흥미로운 글이네요.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도 조금 다르구요.
pgr에 맞게 중간중간에 설명을 넣으신것도 재밌네요^^
음.. 신립장군은 그러면 김창희선수같이 지나친 기세론자인가요 하하;;
와이숑
09/06/15 10:30
수정 아이콘
감정적이라고 전제하셨지만 그래도 전쟁은 게임이 아니죠 ^^;;
09/06/15 10:37
수정 아이콘
앞선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것은, 신립이 그 답을 선택하는 가운데, 조령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 꼭 옳지만은 않다 라고
생각할 만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신립이 생각한 것 (탄금대에서 야전 선택) 을 인정하는 저의 이유이기도 하구요.
저도 조령에서 방어선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것이 더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란
결과도 있구요. (적어도 충주에서 일거에 최대 8천병력을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하지만 생사의 결단에서 자신의 장기를 내세운 점, 그리고 끝까지 사투를 벌이다 순국한 점에 있어서 만큼은 전 신립 장군을
높게 평가하는 바 입니다.^^

쑤마이켈님// 네, 저는 신립이 기세에 목숨을 거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happyend
09/06/15 10:50
수정 아이콘
글 잘 봤습니다.
제 생각만 짧게 말씀드리면(예전에 글을 쓴 적도 있어서....) 신립과 이일의 행동은 '개인적인 기세나 포스나 의욕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의 기질도 역사를 바꾸는 힘입니다만, 개인이 역사의 무게를 전부 지기엔 너무 나약하고 무거우니까요.
신립과 이일은 여진족과의 전투를 통해 성장해온 전략전술에서는 최고인 사람들입니다.조선왕조 건국후200년간은 여진족(야인)과의 싸움이 국운을 좌우했고, 모든 무관은 임관후 2년간 두만강유역에 의무근무하였습니다.
김종서는 여진족과의 싸움을 통해서 제승방략정책을 완성했고, 이일은 이 책의 해설서를 썼을 정도로 추종자입니다.따라서 이들에게 새로운 개념의 야전술의 수립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조선정벌루트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록길이 그것입니다.그리고 내전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야전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이일과 신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이들에게 맡긴 조정과 조선의 한계를 지적하는 편이 옳지 않나 싶습니다.
(지적했듯이, 일본식 야전술은 의병들의 전술에 취약했습니다.)
Benjamin Linus
09/06/15 10:56
수정 아이콘
일본이 질 수가 없는 전쟁인데
조선이 커맨드 들고 튄 바람에 일본이 공황상태에 빠졌죠.
일본에서 전쟁이란 수도가 정복되면 왕이 항복하고 끝나는 것인데
왕이 도망갈 줄도 몰랐고, 백성들이 심하게 저항할 줄도 몰랐죠.
더군다나 수도 점령하려고 최대한 빨리 진격했는데, 물자는 이순신에 막혀 빨리 올라오지 못하니 답답하고,
북쪽으로 끝까지 가자니 명나라에서 구원군이 오고..
그러나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버려서 이기기 어려워졌죠.
신립이 아무리 좋은 작전을 폈어도 결국 수에 밀려서 몰살당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을 듯 합니다.
수년간 단련된 일본의 정예병을 고작 몇 천의 군사로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시간을 끌 수 있었을 뿐.
이순신의 승리도 수에 영향을 덜 받는 해전이라 가능했던 것이구요.
전쟁 후기의 육지에서의 승전은 조선군에게도 경험이 생기고 대포류를 활용하기 시작해서였고
의병들이 게릴라전을 해준 덕분이죠.
초기에 서울에서 버텼으면 아마 지금 한반도와 한국 국민이 모두 일본에 속해 있을 겁니다.
09/06/15 11:06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전에 쓰신 글이 있다니, 제가 찾아보고 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있어서는 큰
흥미거리 이거든요. 단지 흥미만 있고, 지식이 쌓이지 않는게 안타깝습니다만...

한가지 의문은, 저 역시도 이일이 여진족과의 전투에 의해 지장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능통했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주에서 대구 예비군들 모아놓고 훈련을 하다 기습을 당한것은 전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도
의문으로 보고 있구요)
부대 주둔시 경계병을 세우는 것은 병법의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인데, 이일이 경계병 조차 제대로 세우지 않고, 일본군이 근접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백성을 참하고 훈련에 임하다 기습 한번에 전 병력이 패주를 맞은 상황은, 이일이 과연 자신의 구식전술의 한계에
의해 패주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물론, 이일과 신립이 일본군에 맞는 전술을 세우지 못하고 여진족 때려잡던 방식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생각해 왔구요.)

저는 그것이 신립, 이일이 기세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바꿔 말하면 오합지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병력이 지레 겁먹고 와해될까봐)
이러한 일들을 행했을 거라 생각하는 이유거든요. 또한 이일과 신립은 조정에서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일 같은 경우엔 두번이나
도망쳤으나 일본군 수급 하나 베어서 도성에 들어갔을 때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요?) 특히 신립은 부마장군으로서 임금의 검까지
하사받으며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라 말 그대로 자기 맘대로 전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유성룡도 이를 걱정한
바로 알고 있구요. 아마 신립으로서는 개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체적인 적군의 흐름과 전쟁 전개 양상을 예측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로서는, 기타 작전을 이끌어 내 전황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일거에 박살이라는 답안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적재 적소의 인재를 발탁하여 쓰는것이 자기 머리에 지식이 많은 것 보다 더 중요한 지도자의 능력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전 선조가
당시 상황에서 대안 없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신립이 출정한 것은, 본문에 표현한대로 조선군의 에이스 였기
때문에 내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간 계속 노략질을 자행했던 왜구에 대비하여 주둔한 경험이 많은 장수가 있었다면,
그 장수를 내보내는 것도 좋았을 건데, 그러한 장수가 있는지는 제 지식이 짧은터라 잘 모르겠습니다.
내일은
09/06/15 11:11
수정 아이콘
조령 방어선의 포기와 탄큼대에서의 회전이라는 신립의 작전은 인간적인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인간은 보통 기존의 성공사례를 반복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서점에 무수히 깔린 성공처세술 책이 다 그렇죠) 이미 함경도에서 휘하의 기마 부대로 큰 공을 세운 신립이 기존 사례를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한 선택이었습니다. 또 배수진이 보여주듯이 전열을 유지하기 어려운 오합지졸을 가지고 병사들의 높은 사기와 투지가 기본으로 필요한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은 숙련된 장수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의 사정상 조령에 방어선을 펴기 위한 최소한의 군수물자나 전략물자가 비치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신립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인 기마부대의 돌격력을 극대화하고 훈련도 안 되있고 사기가 낮은 보병의 전열을 강제로도 유지하기 위해 탄금대에 진을 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천지인의 열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만, 이해할만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조령 방어선의 포기 만큼이나 역시 당연히 선택지에게 제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격전이라고 봅니다. 물론 자국 내에서 싸운다는 이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유격전이지만, 동시에 일반 백성에게 가장 큰 피해가 가는 것이 지루한 유격전입니다. 조선 국가가 붕괴된 상태도 아니지만 전근대 국가가 대개 그렇듯이 백성들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의 피해가 가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충성심이 필요한 유격전도 (함경도에서는 왕자들이 잡혀 일본군에게 넘어간 사례를 볼 때) 신립이 생각한 선택지에는 없었을 겁니다.

신립은 이러한 제반 사정 때문에 회전에서 적의 주력을 괴멸시켜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을 답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점박이멍멍이
09/06/15 11:24
수정 아이콘
신립장군의 전투이후에 오합지졸(조상님들 죄송합니다만, 정황상 그러하오니...)이 모였던 용인전투도 자세한 설명해주실 분 없으신지요...
용인전투에도 꽤 많은 조선군 병력이 모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군 기마병 돌파에 그대로 진이 무너지면서 끝난 전투로 알고 있거든요...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 나온정도의 내용이네요...)

그리고, 이순신의 해군이 신립이나 이일처럼 초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 까요? 이순신 장군은 결국 수로를 통한 보급싸움이라고
미리부터 판단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또한, 명랑해전은 정유재란의 승패를 갈라놓은 전투라 평가될만 전투가 맞겠지요?
더불어 명랑해전에 관한 논란도 꽤 재미있던데요...
戰國時代
09/06/15 11:43
수정 아이콘
신립의 용맹함이나 자질을 떠나서 조선군의 핵심전력을 허망하게 날려버린 책임은 벗을 수가 없습니다.
어이없는 패전 후에도 끝없이 미화되고 공신칭호까지 받는 것도 보면 <신분과 권력의 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구요.
신립의 용맹이 칭찬받을 일이라면 원균도 결코 욕먹을 장수는 아닙니다.
명장 이순신도 두려워 지구전을 계획했던 강력한 적에게 목숨을 걸고 돌격해 조선수군을 다 날려 먹었으니 말이죠.

무릇 큰 장수는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정도의 전력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그런면에서 볼때, 신립은 역시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장수였습니다.

이순신이 괜히 명장인 게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신중했고 싸울때와 피할때를 가릴 줄 아는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09/06/15 12:00
수정 아이콘
점박이멍멍이님//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적어봅니다.
개전 후 연락망은 그대로 살아있었기 때문에, 호남의 병사들을 호남사령관 으로 보면 될것 같은 순찰사 이광이 도내 병력 8,000명을 모아
근왕을 위해 출발했는데 한성이 함락됬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무지하게 욕을 먹기 시작하자 호남의 병력이란 병력은
싸그리 긁어 모아 자그만치 4만대군을 만듭니다. 여기에 충청도 지역의 병사 8000명이 보태지고, 경상도 지역의 극히 적은 병력이 합세하여
5만에 가까운 대군이 모아집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 조일전쟁에서 이렇게 많은 병력이 편성된것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자도 어느정도 풍족한 편이었는데, 호남의 병력이란 병력은 싸그리 긁어 모은 덕에 병사의 질은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고, 지휘관들이
장수들이 아닌 문관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성을 수복하고 왕을 모신다고 근왕의 뜻을 나타내며 기세좋게 북상했지요.
북상 중에 일본군의 작은 초소 몇개를 함락시키면서 더욱 기세등등해집니다.

이때 용인에는 이순신 장군과 지겹도록 싸우는 와스자카 야스히루가 보급로 담당을 맡아 주둔하고 있었는데 병력은 고작 1600명 이었습니다. 그것도 분산배치하고 주력은 서울쪽에 배치해서 용인에는 병력이 수백명에 불과했지요. 근왕군(이라 표현하겠습니다)은 기세좋게
용인의 분산배치되어있는 소규모 진지들을 공략합니다. 그런데, 보고를 받은 와스자카 야스히루가 서울에 있는 병력까지 긁어모아
일거에 근왕군을 선제공격, 급습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근왕군의 5만 병력이 일제히 주둔한 것은 아니고 선봉대가 일본군과 조우했는데,
항상 소규모 진지만 공격하다 일본군이 선제 공격을 감행하니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그대로 패주, 지휘관들이 대부분 전사해 버리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에 겁먹은 이광이 후퇴해서 산에 진지를 치고, 나눠서 진격하던 병력도 한데 모아버립니다.

그런 후 아침에 근왕군이 밥을 짓고 있는데 야스히루가 정예 기병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합니다. 어제 대패했기 때문에서 인지 근왕군은
반격할 생각도 못해보고 일제히 군 장비를 내팽겨치고 도망갑니다. 말그대로 맨발도주지요. 일본군 기록이라 일본측에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을 수 있겠지만, '도망치는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 군수 물자 대다수가 포획되어 일본군이 불태워버렸으며, 병사 대부분도 각지로 흩어져 패잔병 수습도 제대로 안된채로 그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당초 진격할 때, 일본군에게 한판 제대로 당해서 일거에 무너질까 걱정하여 병력을 세세한 단위로 나눠놓자고
진언했으나, 이광이 세가 약하면 아무것도 안된다고 선봉, 본대, 후군 이렇게만 나눠서 편성했습니다. 아마 당초 진언한대로 병력을
10개 부대로 나뉘어서 운용했다면, 야스히루에게 기습을 맞고 1개 부대가 전멸했을 지라도, 나머지 부대들이 주요 산에서 진을 치고
충분히 일본군의 시선을 근왕군에게 돌릴 수 있게 만들만한 규모(5만명) 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근왕군의 질적인 면을 본다면
실제로 한성 수복이나 근왕까지는 불가능 했겠지만, 일본군으로서는 조선 병력 5만명이 수도권 남부에 주둔하고 있다면
꽤나 부담스러운 상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지휘관의 병력 운용능력의 부족(대부분이 문관출신), 병력 구성의 한계(당시 자그만치 5만명을 끌어모은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병력 구성은 안봐도 뻔한 일이었지요), 그리고 향토예비군이 원정길을 떠나면서 사실상 지형에 대한 능숙도 마저
먼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떨어졌다는 점을 패전의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네요.

첨언 하자면, 개전 첫해인 1592년에 조선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상당수 전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할 따름입니다.
이적집단초전
09/06/1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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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간부들이야 숫자가 좀 부족한 감은 있지만 다들 여진과 왜구들로 단련된 베테랑들이었지요. 실재로 권율같은 문사도 전투에서 계속 이겼던것은 황진이나 조경같은 우수한 부관들의 역할이 큽니다. 전략 디테일은 이런 참모들이 마련했고 권율은 개인적인 카리스마로 부대를 지휘한게 주효했지요. 대개 박살이 나는 경우는 이러한 뛰어난 중간 간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문관 지휘관들이 멋대로 운용하다가 졌지요. 대표적인 예가 임진란 초기의 임진강방어전이었습니다.
wish burn
09/06/1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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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봤습니다
이적집단초전
09/06/1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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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 초반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상부의 지시가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라좌수영 24척의 전선으로 단독작전을 벌이기에는 전력이 모자란다고 판단했었구요. 실재로 초반 출격들은 대부분 적의 후방을 기습하는 형태였습니다. 제대로 된 회전을 벌이게 된게 바로 3도 수군을 모두 모은 한산대첩이구요. 사실 어느 지휘관이든 그렇듯 충무공 역시 강한 아군으로 약한 적군을 공격하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명량해전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지요.

정유재란때 직산전투가 끝났을때만 해도 조정은 난리가 났습니다. 명군의 기병조차 발렸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후 명량해전의 패배가 전해지자 임진년의 지긋지긋한 보급차단을 겪었던 일본군은 다시 물러납니다.사실 그때는 히데요시도 오락가락하고 대다수는 전쟁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 일본에게 승기가 적던 상황이었지만 명량해전으로 일본군의 재침을 막은것은 분명하지요.
제리와 톰
09/06/1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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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병사들은 하나 둘씩 전쟁의 프로가 되어 가게 됩니다.
싸움터에서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 점이 정예병과 오합지졸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조선의 병사들은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지요.
있다고 해도 대부분 함경도나 평안도의 국경 지역의 병사들 뿐, 삼남의 백성들은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와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임진왜란의 기간 동안에는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가 됩니다. 참으로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이지요.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고 결말이 났는 가는 이미 모두들 주지하는 바이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개전 초기의 조선 장수들의 대처가 당시 상황에 맞게 적절했는가에 대한 부분은 의문 부호가 항상 남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의문이 왜 신립은 조령 방어를 통해서 후방 지역에서 병력 집중할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는가.
조령 방어가 어렵다면 유격전 개념으로 라도 일본 선봉군의 시간을 지체시킬 수는 없었는가.
혹시 기마 전술의 전술가이기는 하지만 전체판을 보고 아군과 적군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는 군략가의 자질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닌가.
그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력을 쏟아 부어 패배하게 되었을 시, 그 뒤에 나타날 후폭풍에 대한 생각은 과연 해 보았는가.
혹시, 자신의 존재와 조선의 존망을 동일하게 착각하였던 것은 아닌 가라는 의문이지요.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도 가능해 집니다.
만약에 신립이 시간을 끌어서 후방에 대단위의 병력을 집중하여 일본과 대규모 병력 간의 집단전을 한다고 해서 과연 승리할 수는 있었을까. 라는 점이지요.
오히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규전을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기고 지고 간에 승패는 쉽게 결정이 났을테니까요. 병력이 집중된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 경험없는 조선군이 이기는 것은 무리로 보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빠른 병력 집중을 통해 전력을 모은 후, 차례로 상경해 오는 일본군의 각개 격파인데 과연 그 정도의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있었는가 하는 부분은 역시 의문으로 남습니다.

어찌 보면 신립의 패배로 인해 결전을 피한 조선은 전력을 의병이라는 이름의 유격군 형태로 남겨 둠으로써 침입자가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게릴라전으로 빠져 들게 만들어 결국은 장기전에서의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합니다.
점박이멍멍이
09/06/1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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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awz님// 이적집단초전박살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戰國時代
09/06/1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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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와 톰님// 삼국지 관도대전의 예에서도 볼수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선입니다.
제 아무리 용맹무쌍한 병사라도 굶고서야 싸움을 못하죠.
신립이 조령을 중심으로 지구전으로 버텨줬다면, 그 동안 이순신이 수군으로 보급선을 차단하여 승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랬다면, 임진왜란은 불과 몇달만에 끝났을 지도 모르죠.
라이시륜
09/06/1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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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전쟁 초기에 참전하지 않은 까닭은 호남평야의 수호에도 그 뜻이 일정부분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호남평야는 한반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였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곡창지대가 있었으나, 호남의 평야가 그 질과 너비에서 최고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보급이 결정한다고 생각했을 때, 조선의 가장 크고 비옥한 곡창지대를 뺏긴다는 것은 그 의미가 승패를 결정지을만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까닭에 전쟁 초기에 자리를 지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육로에 의한 호남평야 공략이 본격화 된 이후 그러한 방어선을 유지하는데에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께서 조금 더 활동적으로 군을 운용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리와 톰
09/06/15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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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님//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국시대님 말씀처럼 조선 지휘부가 개전 초기 부터 육군과 수군의 전략을 통합하여 육군의 축차방어와 수군의 보급 차단 작전을 용이하게 하였다면 임진왜란은 최소 3개월, 길어도 1년 안에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국시대님도 잘 아시다시피 당시 지휘부가 그랬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전 초기에 정확한 적의 규모도 모르고 허둥대던 사람들이니까요.

저 역시 안타까운 점이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가정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최선의 결과가 도출된 예를 한 번 정도는 보고 싶습니다.
율리우스 카이
09/06/1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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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님// 님 시각이 상당히 근거가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그래도 신립이랑 원균이랑 비교는 전 조금 거부감이..........
09/06/1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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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님// 원균이 칠천량으로 돌격한 것은 도원수 권율의 명에 의거한 것이지, 자신의 의지로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균은
육상부대가 적을 공격해 해안가로 밀어주면 해안에서 싸워주겠다며 수륙양진책을 계속 주장玖?전선에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고, 부산으로 진격하다 패주, 칠천량에서 수군 전멸의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원균이 비난 받는 부분은 병력
운용에 관한 면이지 부산 해안가로 무작정 나가다 전멸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는 육상과 해안 수송이었는데, 육상 보급로가 계속 의병에게 공격을 받자 해안 보급로의 비중을 올린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전과 역시 전쟁 초기 의병혹은 지역 관군의 계속된 보급로 공격이 없었다면 그 전과가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신립이 조령에서 방어전을 펼쳤다면 탄금대에서 8천병력(4천이라는 설도 있습니다)이 전멸한 것 보다는 더 좋은 상황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신립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본다면, 야전에서 적을 요격하는 것 만큼이나 조령에서 방어선을
펼치는 것도 충분한 리스크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적었지만 조령에서 방어전을 펼치게 된다면, 병사들이 탈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마자 탈주병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신립은 보고한 척후장 김효원과 안민을 허위보고로 몰아 참하면서 까지 탈주를 막기 위해 애씁니다. 이 8천 병력을 조선의 정예병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상 당시 조선에 정예병이 있는지 조차 의문이며, 신립이 여진족 1만대군을
기병 500기로 격파할 때 참전했던 병력 500기가 출전병력에 포함되어 있는 지도 의문입니다. 신립이 전장터로 나아가며 고을마다 모아놓은 병사들을 데리고 가며 한숨을 쉬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이들은 오합지졸이며 탈주 역시 초기 조선군의 모양 그대로이지요.

결국 신립은 충주성으로부터 빠져나와 휘하 병력을 전부 탄금대에 몰아넣고 독전합니다. 이 경우 갖게 되는 이점은 조령 방어전의
단점인 탈주병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기병전술을 쓰기에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점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신립이 탄금대 배수진을
친 것은 당시 상황을 놓고 볼 때 전혀 어이없는 선택은 아니란 것입니다.

또한 조령 하나만 지키고 있으면 일본군이 서울로 향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가토 키요마사는 경상도 동쪽을 따라 진군중이었고,
기타 부대들도 일제히 각 루트를 향해 진군중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카를 막고 있는 것은 서울로 향하는 최단거리 부대를 붙잡고
있는 것 뿐이지요.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보급을 더디게 만들 순 있어도, 조령 방어전이 일본군의 보급을 해안으로 향하게 돌림->이순신
장군의 수군격파로 인한 일본군 보급 다수 봉쇄 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400년이 지난 지금 그 상황을 예상할 수는
있어도, 당시 불과 개전 보름밖에 안된 상황에서 그러한 전체적인 판을 내려다 보는 것은 제갈량이 와도 힘들 것입니다. 단지 국지전이
아닐테니깐요.

결정적으로, 신립 휘하의 8천 병력은 쉽게 잃어서는 안되는 병력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신립의 8천 병력이 일본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대치하며 지구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병력이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신립에게 일본군을 대항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지구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줘야 한다면, 병력을 적어도 용인전투에 투입된 4만명이상의 병력과 휘하에서 명을 받을어 지휘할 수 있는 장군들을
여럿 딸려 보냈어야 할 것입니다.

신립의 탄금대 방어전이 결과적으로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신립이 무지해서 조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할 순 없습니다. 어이없는 패배라기 보다는 분패가 맞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서현이와치토
09/06/1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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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이 훌륭한 장수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선군의 최정예 핵심전력을 뭣도 못해보고
날려버려 일본군의 북상을 수월하게 한점은
씻을수 없는 멍에죠.
탄금대 전투는 지휘관으로서 신립의 전술센스(?)가 부족했다고 밖에는 생각 할수 없습니다.
09/06/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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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와 톰님// 이것 역시 가정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3개월~1년 내에 우리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전쟁을 종료시킬 방안은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조일전쟁 개전 3개월 후 우리나라는 명 조승훈이 이끄는 요동병의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설 때 입니다. 이때 전황을 살펴보면 이제서야 의병들이 일어나서 이치 전투에서 호남진공을 막았을 때 입니다. 개전 전이 아닌 개전 초로 돌아가서 병력 통합을 한다 해도, 3개월 만에 승리 혹은 협상에 의한 퇴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1년으로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경상도 이외의 지역을 수복하는 기간만 해도 1년이 넘게 걸릴 듯 합니다. 개전 1년 후 우리는 서울에서 고니시 유키나카에게 안전퇴로를 보장해 주고 겨우 서울 수복에 성공할 때 입니다.

만약 소백산맥을 근거로 수비가 이뤄져 일본이 경상도를 장악한 상태로 더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더라도, 단기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적어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개전 초기 불리한 전황을 뒤엎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급로 차단이 쉽지 않을 테고, 경상도 전역에 14만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펼쳐야 합니다. 이후의 일본의 정책을 봐도 그렇듯이, 전황이 고착되면 일본군은 축성을 하고 눌러앉아 협상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가려 할 터이고, 조선이 온전하게 영토를 보전하면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길은 경상도지역의
일본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펼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아마 그 상태로 전선은 상당히 오랜 기간 고착되었을 것이며, 끝내는 우리가 일본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챙기긴 하겠지만 단기간 내 영토 수복, 전쟁 종료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2차 조일전쟁 때 아예 울산 등에 축성을 하고 눌러앉은 일본군을 상대로 우리는 전투지역을 국소화 시킨 채 국지전에 돌입했지만
전쟁을 상당히 오랜기간 끌었습니다. 개전 초기에 비해서 훨씬 아군이 좋은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울산성에서 2차례 공격이 패퇴하고
오히려 남원과 전주성을 공략당해 잃는 등 쉽지많은 않았던 공성전이었습니다.

지금 처럼 대량살상무기나 효과적으로 적 근거지를 폭격할 수단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7년간이나 시간이 걸린 것은 분명히
오래 걸린 것으로 생각되나 (심유경의 엉터리 외교에 의해서 많은 시간이 잡아먹혔지요) 양국 국력의 상당수를 투입한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은 꽤 장기전으로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09/06/15 14:16
수정 아이콘
戰國時代님// 추가하자면 신립은 종전 후 선무공신에 뽑히지 않았습니다. 영의정으로 추증된것도 원래 관직이 부마장군에 지금으로 치면
쓰리스타급의 장성이었으니 영의정이 된 것이지, 사료를 보면 신립에 대한 기록은 오로지 비난 일색입니다.

신립이 추앙받게 된건 민간전설(우리나라 무속신앙에 신립장군을 모시기도 합니다)과 옥쇄했다는 장렬한 이유이기 때문이지, 당시 집권자들이 신립을 미화하거나, 공신칭호를 내린 사료는 제가 본 바로는 없습니다.
제리와 톰
09/06/1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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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awz님// 제가 말씀드린 3개월에서 1년이란 기간은 어디까지나 제가 말씀드린 대로 되었을 경우에 대한 가정입니다.
사실 지금 드리고 있는 모든 것이 역사의 가정일 수 밖에 없겠지요.

예를 들어 개전 초기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 중에서 최고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조령에서 충주 까지의 축차 방어를 통해 적의 진공을 늦추고 후방에서 타 지역에서 모병된 병력을 계속해서 증가시킴으로써 우회하는 일본의 또 다른 조공인 가토의 병력을 각개 격파하며 동시에 경상과 전라의 수군을 통해 적의 추가 상륙을 막는다면 개전 초기에 조선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의 규모가 3만에서 5만 정도였을 테니 자신들이 준비한 식량의 바닥남과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육군의 상륙은 막고 해상전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뜻입니다.
그리된다면 이라는 가정을 붙인 것이지 실제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요.
사실 정유재란 당시의 울산 전투에서 일본 동군은 보급이 떨어져서 흙탕물과 진흙을 먹으면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의 힘은 강해서 조선과 명군의 연합세력으로도 일본 육군을 막는데는 고생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어디까지나 역사의 가정을 논하는데 너무 옳고 그름을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토론 자체가 즐거우니까요.
SaintTail
09/06/15 14:48
수정 아이콘
신립이 조령을 포기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단 제승방략에 따른 문제점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신립이 갔을때 모은 병력들은 평소 자신이 거느리던 함경도 군인이 아닌, 충청도 지역의 장정이나 포졸들이였기
때문에 손발이 제대로 맞을리 만무했고, 그리고 험준한곳은 탈영병이 나오기 쉽기때문에 탈영병을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해 어쩔수 없이 평지로 군대를 물리고 결전을 선택한거로 봅니다

이때 신립은 자신이 여진족을 섬멸했던 기병의 공격을 택하게 되는데 일본은 이미 전국시대때 다케다 신겐의
기마대를 조총병과 장창병 조합으로 제압했던, 기마전술의 돌격에는 이미 대응책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또한 기병대는 돌격하면서 활을 쏘고 하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지만, 신립이 거느린 부대는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병사였고, 고작해야 돌격하여 단병기를 휘두르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전멸했죠 -_-

만일 제승방략 전략이 아닌 신립이 자신의 휘하의 부대를 참전시켜 전투에 임했다면 처음부터 조령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탄금대에서 결전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거라는게 제 생각힙니다
테페리안
09/06/15 14:49
수정 아이콘
야화나 사료나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개인적으로 이런 얘기들을 무척 좋아하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참 읽다가 보니 울산성 정도만 아는 부분이네요. 역사스페셜에서 해줬던게 기억나네요. 그 때 울산성에서 쫄쫄 굶은 장수 중에 하나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축성을 할 때 다다미를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생각나네요.
09/06/15 14:55
수정 아이콘
제리와 톰님// 저도 가정하는 것 좋아합니다. 역사에 가정이 의미 없다지만, 그러면 역사란 것은 너무 딱딱한 것이 되버리지 않나요?

제가 생각하는 바는, 조령에서 적을 막고 일본군의 침공 범위를 경상도에 국한시켜도 1년 내에 종전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성하는 입장에서 막으면 가능하겠지만, 조선군이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파하여 후퇴시키려면 야전+공성전을 치뤄야 합니다. 근데 이게 힘든것이, 조선 초기 승리의 대다수는 농성+유격전이었지 야전에서 적을 격파한 사례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쟁 초기 가장 값어치 있는 육상전 승리인 이치전투에서도 우리가 좁은 협곡을 끼고 방어전을 펼쳐서 승리한 것이지, 반대로 일본군이
협곡을 끼고 싸우거나, 평야지역에서 일본군 상대로 전면전을 펼쳐 승리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최고 레벨의
야전 경험을 갖고 있는 이일과 신립이 패배한 것을 봐도 알 ?있지요.
더군다나, 해상에서 일본군의 병력/물자 보급을 끊는 것도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둔 승리는 대부분이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유인하고, 각개격파 한 것이지 대규모 전면전은 많지 않습니다. 드넓은 대한해협에서 일본 보급로를 잡고 일본 수군과 한판 벌였을 때 승산이 없느냐, 하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선군의 피해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가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일본군의 약점을 적절히 노려 적중시켰다는게 크게 일조를 하고 있지요.

방어군의 이점은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유리해 지는 것이지 초창기에 일본군을 격퇴하여 열도로 후퇴시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각개병사의 전투력도 전쟁을 거듭하기 전까진 오합지졸이었구요. 편향된 단편적 예이지만 관군+의용군으로 이뤄진 5만 대군이
용인에서 1600명의 기습을 받고 패퇴한 일도 있었지요. 개전 초에 일본군을 경상도에 묶어 놓는다 한들 쉽지많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왜성으로 향하는 주요 거점을 조명연합군이 장악하고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에도 일본군은 남원, 진주성을 점거하고 '코베기'
사건을 자행할 정도였으니깐요. 당시 양군의 육군 전력을 비교해 보면, 일본군이 방어하는 입장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깨트리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에요.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고려천자가 선조의 입관을 받아들이고 분조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면, 왕권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공신들이 득세하게 됬을 테고 어쩌면 조선의 군사력이 전쟁 이후 증가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봐요.
조일 전쟁 불과 40년 후에, 형제의 나라를 도와주겠다던 누르하치가 세운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를 해야 했으니깐요.
그 때 청 태종이 인조에게 내린 국서를 보면 가관이지요. 무엇이 가관이냐 하면, 타국의 황제가 우리나라 임금을 꾸짖는 글인데,
구구절절 옳지 않은 구석이 없으니깐요. 조선은 건국 초 200년과, 호란 후 200년 동안은 외적으로는 편안했는데, 16세기 후반~17세기 후반에는 정말 많은 곤욕을 치루었군요.
09/06/15 14:57
수정 아이콘
음...개인적으로는 신립이 조령에 진을 치지 않은 것은 휘하의 주력인 기병전력을 믿은 것,
그리고 일본군의 화력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기병전력을 운용하기 쉬운 평지에 진을 친게 아닐까 해요

그리고 원균이 권율 도원수의 지시로 칠천량에 나가게 된 것은, 원균이 신중론을 펼치는 이순신에 반대해 전면 공격을 주장하다
이순신을 몰아내고 통제사가 된 후에 되려 출격을 주저했기 때문에 권 도원수가 노해서...라고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걸까요.
09/06/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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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ren님// 맞습니다. 권율이 노한 것은, 원균이 출정하지 않은 것이지요. 저는 원균을 비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원균이 무모하게 출격하여 조선 수군을 망친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계속 해서 육군이 밀어주면 나가서 쓸어버리겠다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투를 회피하지요. 권율로서도, 해안가의 산을 육군이 공격해도 배를타고 도망갔다가 물러가면 다시 나오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제리와 톰
09/06/15 15:24
수정 아이콘
Outlawz님//
아닌게 아니라 Outlawz님 말씀처럼 사실 병력을 집중한 상태의 정규전 성격의 전투에서 조선군 단독 작전 뿐만 아니라 조명 연합군 또한 승리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육군의 대첩인 행주 대첩이나 진주성 대첩은 모두 농성전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이 바로 개전 초기 신립의 작전이 무모해 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적의 강약을 알아 보지도 않고 자신만의 주장을 관철시켜 전멸해 버린 경우처럼 보여요.
Outlawz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군의 단독 작전으로 대규모 정규전을 치룬 예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도 개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너무 빨리 소모해 버린 관계로 너무 빨리 유격전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명군의 개입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과의 대규모 단독 작전이 사실 상 불가능해지게 된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이겠지요.
모든 조선군의 공세는 명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나마 방어 작전에서만 예외였을테니까요.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해 보면(조선의 입장에서) 신립이 지속적인 유격전으로 적의 침공을 늦추는 동안 후방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킨 후, 용인의 용인성이나 성남의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편 후, 적을 붙잡아 두고 기동 우회를 통해 일본 서군을 궤멸시킨다면 자연스레 일본 동군의 각개 격파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는 탁상공론인데요, 사실 지금과 같이 각 군의 연락망이 발달된 경우에도 성공시키기 어려운 방법을 500년 전의 상황에서 과연 성공시킬 수가 있었겠는가 라는 의문은 남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 육군 개개의 수준으로 보아도 상당히 어려웠겠지만 개개 병사의 개인 전술을 능가할 수 있는 전략가가 조선 지휘부의 상층부에 존재했다면...이라는 가정 또한 존재할 수도 있겠지요.

또한 수군에 대한 부분을 적어 보면 개전 초기 일본의 보급선 또한 크기가 작은 편이어서 물결이 심한 대양을 건너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대한해협을 건너는 곳 중에서 몇 군데의 루틴은 조선이나 일본이나 모두 알고 있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러한 점은 마지막 전쟁인 노량 해전에서의 적의 퇴로에 대한 추격전에서 조선 수군이 적 퇴로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론이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09/06/1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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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와 톰님// 네 확실히 초기엔 조선군 야전 수행능력은 일본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 졌지요. 후반되어서는 조선군이 많은 승리를 거두긴
합니다. 전 신립의 탄금대 배수진이 더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 역시 조령에서 신립이 시간을 벌어줬다면, 좀 더 탄탄하게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을 수 있었겠지요. 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립에겐 탄금대 배수진을 선택할 이유도 있었다. 라는 것이며
그 점에 있어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걸 인지하신듯 합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의 역사는 상당히 불운하지요. 역성혁명이 아닌 외세의 침략에 무너진 국가이고, 기존의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 가운데
가장 중국에 종속적인 국가였으며, 청태종에겐 꾸지람 들으면서 항복하지요. 이러한 이유들이 일각으로는 님께서 말씀하신 뛰어난 전략
(굳이 군사전략이 아니라도)을 가진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7년간의 전쟁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게 두번에 걸친 호란에서 무기력하게 물러난 것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리와 톰
09/06/15 15:56
수정 아이콘
Outlawz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뜻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Outlawz님께서 언급하신 대로의 성향으로 보면 신립이라는 인물은 공세적 방어는 할 수 있었도 수세적 방어를 할 사람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한 성향이라면 당연히 탄금대의 배수진 역시도 하나의 선택 사항일 수도 있겠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토론을 할 수 있게끔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09/06/15 16:32
수정 아이콘
제리와 톰님// 감사는요, 제가 더 감사드려야지요.
나이트 후의 오프라, 졸려 누워 있었습니다. 역시 많은 분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은 재밌는 일이네요.
다음에도 많은 의견교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트해머
09/06/15 16:44
수정 아이콘
동원전력면에서 조선군의 초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병력은 용인전투에서 날라간 5만입니다.
원래 신립이 이 병력을 인수해 전투를 벌여야 했지만, 일본군의 속도가 상식밖의 고속이여서 타이밍을 못맞춘 격이죠.
탄금대 전투는 이러한 일본군의 고속 진격이 조선의 동원체제의 헛점을 찔렀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전투입니다. 보급도, 후방 안정도 신경쓰지 않고 그냥 무작정 비상식적으로 올라와 버리니 상식적으로 짜여진 동원체계 및 병력 인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이일 장군도 대구에서 경상도 일대의 병력들과 원래는 합류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일이 미처 대구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대구에 도착했고, 모여있었던 병력은 (4만여로 추정되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흩어져 버리죠.
그리고, 신립의 임무는 방어가 아닌 '공격' 입니다. 남부 3도의 모든 군권을 쥐어주고 막으라고 한 게 아니라 공격해 격퇴하라고 내려보낸 거죠. 그런데 예측밖의 속도로 미처 주전력과 합류하지 못했기에 일단 끌고 내려온 경군+충청도 병력으로 일본군 선봉을 격파 - 이후 병력을 계속 합류시키면서 나머지 일본군을 차레차레 맞상대하는 전략을 수립한 걸로 보입니다. 전투 경과를 보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고요. 실제로 제대로 차징을 하기 어려운 수준의 숙련도였던 신립군 기병을 상대로도 몇차례에 걸처 돌파당할 위기에 처했던 게 일본군입니다.
루크레티아
09/06/15 16:49
수정 아이콘
아무리 가능성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당시 그 떨어진 사기와 주전력이 아닌 병력을 가지고 정면 맞상대를 했다는 것은 너무 무모했죠.
신립의 실패는 역시 정보전의 중요성을 가장 잘 알려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이트해머
09/06/15 16:55
수정 아이콘
여기에, 조금 더 나아가서, 조령에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가능성마저 다분합니다. 즉, 조령을 막을 타이밍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초반에 선공을 가한 것도 일본군입니다. 탄금대에서 전투가 벌어진 건 의도한 게 아니라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제법 높습니다. 배수진이라고 하지만 완전한 배수진도 아니었고, 기병전을 위해서는 탄금대는 별로 좋은 지형도 아닙니다. 후방 뿐만 아니라 좌측에도 강이 있어 좌우익을 충분히 넓히기도 어려운 지형이니. 결국 제대로 좌우익을 펼치지 못하고 계획했던 포위를 위한 돌파에 실패하면서 군이 붕괴합니다.
조선군의 병력도, 일반적으로 충청도 병력 8000여 정도일 거라 예측되지만, 일본군 기록이나 고니시를 따라갔던 프로이스 신부의 기록같은 걸 보면 조선군 병력이 더 많았다는 기록도 많습니다. 이건 추정일 뿐이지만요.
Benjamin Linus
09/06/15 17:42
수정 아이콘
아무튼 결국 일본군을 격퇴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만,
이 전쟁으로 일본이 입은 타격은 미미한 반면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8만 서군10만을 동원할 정도였으니...)
조선의 타격은 어마어마했죠.
과연 일본군을 격퇴했다고 전쟁에 승리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네요.
중립지역에서 싸워서 이기거나 적지에서 이긴거면 확실한 승리겠지만
스타로 따져본다면 우리 본진 건물 70%깨지고 엘리되기 직전에 간신히 방어한 상태인데
적은 본진의 병력도 많지만 일단 병력을 뺀 상황이었을 뿐이죠.
율리우스 카이
09/06/15 17:58
수정 아이콘
신립장군이 탄금대 배수진을 하지 않고 조령에서의 유격전을 했으면 임진왜란(조일전쟁)이 조기진정 되었을 것이다...는 건 ..

글쎄요.. 이런식의 말이 많았지만 너무 책임을 신립장군에게 돌리는 게 아닐까.. 라고 전 생각합니다. 너무 가혹한 평가에요. 제 생각에는 신립장군이 전장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고 보지 않고... 대부분의 보병/기병은 오합지졸이고 정예는 소규모 기병뿐인 상황.. 조령에서 유격전을 했으면 좋았겠다 라는 건 그냥 우리가 스타 보면서 상대편이 이미 5드론 해서 기지에 저글링 뛰고 있는데 8서플 11배럭 한 테란한테 왜 벙커 안지어놨느냐 라고 얘기하는거랑 비슷한거라고 전 생각해요.

탄금대에서 배수진 안치고 병력 다 물리고 유격전으로 들어갔다면, 과연 신립장군이 장군자리나 유지하고 있을 수 있을른지 의문입니다.
Cedric Bixler-Zabala
09/06/15 18:07
수정 아이콘
Outlawz님// 원균은... 뭐 할말이 없죠.
권율이 곤장 때릴만도 했습니다.
아니 섬을 육군 단독으로 공격해 달라는 미친 헛소리를 해대니 -0-;;
09/06/15 18:47
수정 아이콘
'부산이 서쪽이고, 진주가 동쪽이지요.' ->'부산이 왼쪽이고, 진주가 오른쪽이지요' 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09/06/15 19:36
수정 아이콘
Benjamin Linus님// 조선이 승리한 전투지요. 일본군의 전략적 목표=조선 점령
반면 조선군의 전략적 목표는 방어이니까요.
전쟁에서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패배'입니다.
살짝 발을 뺀것으로 표현하셨는데 사실 일본의 피해도 결코 작은게 아니었습니다. 마을의 장정들이 남아나질 않은 상황이었죠.
나무란 나무는 모두 배만드는데 동원되어서 민둥산이 여럿있었죠.
더이상 원정전쟁을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야 내전이고 또한 국가간의 전쟁도 아니니 격이 다르죠.

ps.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의 전사자는 2000만에 달할 정도였는데 소련이 패배했다고 표현하진 않잖아요.
폭주유모차
09/06/15 20:29
수정 아이콘
조정에 윤두수 현장에 원균...... 답이 안나오죠 이 두인간들은....
09/06/15 21: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봤습니다.역사는 언제나봐도 재미있네요. 여담이지만 일본입장에서 본다면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흡수한(방심에의한 초살..ㅠ)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기위해서 타켓을 조선으로 삼았지만 역부족으로

실패하고, 아이가 울지 않으면 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라는 인물이 본을 통일하게 되죠..

천황은 명맥상만 존재하구요.

쇼군?(권력있는 승상정도-조조) 자리에 올라 18대인가?까지 상당히 오래 해먹습니다.. 머 읽은지 오래되서 가물가물 하지많요.

좀더 큰그림을 그리고 일본열도에 만족하지 못한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정말 대단한 히데요시 였지만.. 늙고 병으로 인해

급사,완벽히 통일되지 못한 일본열도..등 여튼 이에야스가 짱-_-;
창작과도전
09/06/15 22:55
수정 아이콘
조일전쟁인 조금 애매한게

조선과 일본이 전쟁 한두번 한게 아니거든요.

왜라는 말이 일본비하라고 해서 문제가 된다면

임진일난(?)이라고 고치는게 맞겠죠.

전쟁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명칭에 대한 논란은 학계에서도 많습니다. 근데 문제가 지적됨에도 쉽게 수정이 안되는 것은 기존의 명칭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 역시 만만찮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죠.

당장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가야는 뭐냐 사국시대로 하자. 그럼 동예, 옥저 뭐 이런 나라들은 뭐냐... 열국시대는 어떠냐... 이런식의 논란이 계속되니까 삼국시대로 계속 남아있는거죠.
09/06/16 00:49
수정 아이콘
창작과도전님// 단지 일본을 비하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라는 생각에서 조일전쟁이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간의 전쟁이 여러차례 있다고 하셨는데 1392년 이후 대소전투는 '왜구' 에 의한 것입니다. 일본의 지방군벌세력이나
해적들이 조선해안가를 유린한 것이지 일본의 중앙정부가 승인한 전투는 '임진왜란' 이 최초입니다.

즉, 제가 임진왜란 이란 표현보다 조일전쟁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 전쟁이 양국 정부가 개입된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절 여몽연합군이 열도 원정을 나서기는 했으나 몽고와 일본이 주도적인 전쟁 세력이었으므로 최초의 전쟁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조일전쟁이 아닌, 임진왜란으로 쓰일 수 있는 정당성을 든다면. 당시 조선 정부가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불렀던 것이죠.
'조일전쟁' 자체에 있어서 명칭의 합당성에 대한 문제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작과도전
09/06/16 03:07
수정 아이콘
Outlawz님// 당장 임진왜란 말고 정유재란도 있죠. 뭐 연결되는 전쟁이라고 볼 수 도 있겠습니다만

1392년이전까지 포함시키자면 이정도로 큰 전쟁은 아니지만 천황과 태자가 직접 참전한 백촌강전투와 같은 것들도 있고요.

또 한중일 거기다 북한까지 4곳에서 모두 임진왜란을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연도를 넣어서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명칭이 어떻게 되든 앞의 임진이나 정유는 남겨 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쨋든 이문제를 떠나서 전쟁명을 전쟁하는 국가명으로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베트남전, 한국전쟁 이런식의 표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 (전 베트남사는 잘 몰라서 무슨 전쟁이 있었는진 모릅니다만) 과연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그거말고 아무것도 없을까요?

한국전쟁은 외국에서 코리언워 라고 부르는 거 정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국내에서 까지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건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한국에서 전쟁난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정돈데...

뭐 6.25 와 같은 연도식 표기역시 6월 25일에 전쟁이 그거 하나 뿐 이겠느냐는 비판이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좀 낫죠.

그밖에 7년전쟁이니 하는 식의 연도별로 부르는 것도 7년짜리 전쟁이 찾아보면 더 있을것이고, 크림전쟁같이 지명을 쓴 전쟁역시 크림반도에 전쟁이 그거말고도 있을거니 문제가 있겠지만

나라이름 붙이는 것들보단 그나마 낫다고 생각합니다.

각설하고

사실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부르자는 (임진왜란을 1차 조일전쟁, 정유재란을 2차로 부르는 식의) 주장은 여러차레 있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많죠.

앞에 일본을 격하니 뭐니를 떠나서 전국토가 유린당했고 조선전후기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대전쟁인데 왜란으로 표기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왜구 몇명이 난동부린 정도를 훨씬 넘어서긴 했으니까요.

이런 전쟁일 삼포왜란정도와 같은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긴 있는 듯 합니다.
09/06/16 05:05
수정 아이콘
창작과도전님// 사실 님께서 댓글을 통해 예시를 주신 것이 정확히 어떤 주장의 밑바탕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이 삼포왜란 과 같은 급은 아니란걸 인지하시면서, 한편으로 '임진왜란' 이 왜 '조일전쟁' 보다 적합한 해석인지에 대해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니, 다소 헷갈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임진왜란이 조일전쟁보다 합당한 표현의 이유는, 역사에
전쟁의 이름은 당시 사가의 표현으로 내려 전해지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한 면은 저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유재란 자체가 이미 일본군이 경상도 남방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전이 이뤄진 상태로 일본군이 재차 대규모 병력을 조선에
보낸 것이므로 두 전쟁은 연결되는 전쟁으로 볼 수 있는게 아니라 연결되는 전쟁입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처럼 완전한 후퇴->재침 으로 이어지는 독립적인 전쟁이 아니란 점이지요.
또한 백촌강 전투 역시 마찬가지로 백제-왜 연합군이 이뤄진 것이지 한반도의 정통 정부와 교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백촌강 전투를 한반도와 열도의 전면전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백제는 왜의 영토와 정치력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으로 봐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바라고 전제하셨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으나, 역사는 사가의 기록대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정식명칭 앞에
연도나 특히 동양쪽에서 연호를 붙이는 것은 '난' 일 때나 붙이는 일입니다.
'난' 에는 평정만이 있을 뿐이고, '전쟁' 에는 승리가 존재하지요. 이러한 점도, 특히나 우리 측에서는 조일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근거가 됩니다.

각설하고 정리하자면, 창작과도전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선과 일본의 전면전이 있었다면 조일전쟁으로 불리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나, 조선과 일본의 전면전은 '임진왜란' 이 유일하기 때문에 조일전쟁이라 부를 수 있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창작과도전
09/06/18 15:35
수정 아이콘
Outlawz님// 간단하게 더 덧붙이자면, 앞으로 한일양국간에 전쟁이 또 일어나지 말란법(뭐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만) 도 없다는 겁니다. 그럼 그때가서 명칭을 또 바꾸거나, 아니면 대한민국과 조선은 다르니 놔두자. 이런 논쟁은 또 벌어질겁니다. 역사적 사건의 명칭은 그런 논란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연결되는 전쟁맞죠. 그러나 명칭은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이 동급이 아니란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더더욱 조일전쟁이라는 명칭에 반대합니다.

왜라는 표현으로 전쟁 상대국을 격하하고, 또 란이라는 표현으로 그 큰 전쟁을 격하한다면, "왜란"을 "전쟁"정도로 고치면 될 일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앞의 "임진"이나 "정유" 등의 시기를 나타내는 표현은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임진왜란을 이런거 다 무시하고 조일전쟁이라고 바꾼다면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문제점을 낳게 된다는 것이죠.

북한에서도 왜란이라는 표현은 고쳐쓰지만, 그렇다고 앞의 임진을 지워버리진 않습니다.

임진왜란이란 표현이 지적하신 바와 같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엔 사가가 임진왜란이라고 표기해놓았고 지금껏 그렇게 쓰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라는 표현을 조일전쟁으로 바꾸기 위해서라면 최소 임진왜란 이라는 표현법의 문제점과 조일전쟁이라는 표현을 써야하는 근거가 임진왜란이라는 표현법을 써야하는 근거와 조일전쟁이라는 표현법의 문제점보다는 커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임진왜란이라는 표현법을 고치면서 조일전쟁보다 더 좋은 표현법은 없느냐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근데 제가보기엔 조일전쟁이라는 표현법은 임진왜란이라는 표현법과 장단점을 따져도 비슷하고, 다른 좋은 표기법은 없냐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임진왜란이라는 표현법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다른표기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긍정하지만, 조일전쟁은 좀 아닌거 같다 이겁니다.
09/06/18 20:27
수정 아이콘
이 글을 보실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한일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일전쟁이라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근거의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조선은 이미 망했고, 역사가 모르는 조선과 일본의 전면전이 발견되지 않는 한 유일한 전쟁이란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이름 붙이지 말자, 라는 것은 역사로서는 넌센스 입니다. 청일전쟁 같은 경우에는 왜 그렇게 표기가
되었을까요. 앞으로 중국과 일본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는데 말이죠. 양 국의 전면전일 경우 양국의 국호명을 앞에 붙이는
것이 사가의 가장 기본적인 통칭입니다. 청일전쟁과, 1894 대왜조선응원출병전 이 둘중에 무엇이 더 옳은 표현 같으십니까?

러일전쟁 역시, 러시아와 일본이 다시 전쟁을 하지 말란 법이 없는데 왜 양국의 국호명을 끌어다 썼을까요? 1905 동북아함대전 같은
표현도 있을텐데요.

무엇보다도, 사가가 전쟁의 이름을 붙일 때 중요한 것은 당사자 측과 전투 지역의 지명입니다. 우리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연도+침략국 을 서술 해서 전쟁의 이름을 붙인건 우리가 왜란, 호란 식으로 속칭 '오랑캐' 등을 비하하는 습성(?) 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수, 당의 고구려 침입을 '한란' 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수,당의 침입을 가지고 그 앞에 당시 연호나 갑자의 연도를 붙이지도
않습니다. 님의 표현이 맞다면, 다른 많은 전쟁의 앞에 연도가 붙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님께서 주장하시는 논리가 적용된
유일한 예는 '오랑캐' 가 '난동' 을 부린 상황에서만 적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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