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어느날
금요일을 제외하고 수요일 밤은 대학로에 사람이 가장 많은 밤입니다. 덥수룩한 수염과 긴 머리, 그러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위 '예술하는 사람'으로 나올법한, 키가 훤칠한 남학생 한 명이, 그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학로 한 복판 CGV앞에 서 있었습니다. 가슴팍엔 '한예종 사태의 진실'이라고 씌여진, 허름한 박스조각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에게 연신 유인물을 나누어 줍니다. 리어카를 밀고 오던 분식집 아주머니가 학생에게 비키라고 소리를 칩니다. 짜증이 날 만도 한데 그 학생은 웃으면서 비켜줍니다.
한예종사태에 대해서 사실 저는 별로 알고 싶은 게 없기에, 아니 사실은 이미 그 본질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기에 그걸 받아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여자친구가 도착했고, 자꾸만 뒤를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극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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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어느날.
"왜 다니던 좋은 대학 놔두고 한예종에 오려고 해요?"
눈 앞이 하얘졌습니다. 전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학과장이었습니다. 다니던 학교를 버리고 시험을 치른 다른 학교의 입학시험장에서, 면접관과 학생으로서 이전 학교의 학과장과 조우. 제가 너무 순진했지요. 원래 대학시험 면접관들은 다른 학교에서 나온다는 걸 스무살의 저는 몰랐던 겁니다. 그렇게 한예종과 저의 인연은 멀어졌습니다. 학교 다닐 때 몇 번, 한예종의 정식 4년제 대학 학위수여를 반대하는 집회를 우리 학교 주도로 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비겁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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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일본대학에서 연구교수로 2년간 재직하시던 선생님께서 마침내 돌아오셨습니다. 그동안 학과의 연기 커리큘럼은 질적인 면에서 바닥에 떨어졌고, 학생들은 연기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나가야 하는 참담한 현실이었죠. 모두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때였습니다. 두 시간은 족히 걸렸던, 길었지만 뜨거웠던 회의에서, 저와 교수님들은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커다란 변화가 한 번에 일어날 수는 없었지만, 이런 논의가 현실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학과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물론 제 일은 몇 배로 늘어났지만요. 그렇게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몇몇 제도의 개선과, 앞으로 우릴 더 힘들게 할 산더미같은 일들을 남겨둔 채, 선생님께서는 '공무원'이 되셨습니다.
저에게 선생님은, 감히 이런 말씀을 제가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참으로 함께하고픈 배우이셨습니다. 무대에만 서면 다른 연기자들을 투명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그 에너지는, 스무살이 갓 넘었을 때 본 선생님의 작품, 선생님의 연기를 지금 보았다면, 지금 저는 옆의 친구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보이며 이렇게 말하겠지요.
"와, 연기 진짜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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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알지 못하게 우리 주변은 많이 변해갔습니다. 가끔씩 TV나 인터넷을 통해 만나는 선생님의 모습은, 당신이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이 맞는지 의심이 들게 했습니다. 혹자는 '완장차더니 기고만장해졌다' 라고 하고, 누군가는 '공산주의 시대에나 있을법한 독재 앞잡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건, 뭔지 아세요? 더 이상 제가 선생님을 변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선생님이 계신 곳과 제가 있는 곳은 이제 너무나 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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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시죠?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아 예, 고맙습니다. 이거 한 장 받으세요"
"아뇨 괜찮아요. 벌써 다 알고 있어요."
"아 네..."
"저... ○○대 ○○과 ○○기 졸업생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웃기지만, 참... 죄송합니다..."
"아뇨... 뭐 저희 잘못인가요? 그냥 뭐 이렇게 된 거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힘내세요. 다음에 또 뵈요!"
"네, 고맙습니다"
극장앞에 서 있던 학생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밀면서 이런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나와보니 그 학생은 다른 곳에 가 버렸는지, 아니면 바람이 유난히 불었던 추운 날씨에 집에 들어갔는지 보이질 않더군요.
많이 부끄러워졌습니다. 30년 동안 얼굴한번 마주쳐 본 일이 없을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게 말입니다. 연기를 할 때나 저희를 가르치실 때나 참 자신감 넘치는 선생님이셨는데, 못난 제자는 참 여기저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다음번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 제가 당신을 '선생님'이 아니라 '교수님'으로 부르게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왜 저를 부끄럽게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