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주의자”라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이 어떤 이슈를 대하는 태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답답함은 단순히 서로 다른 '가치관'을 좁힐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들”이며, 나오코의 남자친구를 죽인 것도 바로 그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원칙주의자, 혹은 법․질서 만능주의자들은 참으로 단순한 사고의 알고리즘을 가졌습니다.
다양한 조건과 상황을 놓고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받아들이고 평가하는 것이 버거운 모양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법이나 질서와 같은 유형화된 기준 또는 경제․부와 같은 가시적 성과를 잣대로 놓고 그 왼쪽은 적, 그 오른쪽은 내 편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의 프레임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 첨단에 서 있는 유명인사로는 멀리 미국의 비읍시옷 전 대통령, 가까이에는 이모 엠비씨가 있겠네요.
고려해야 할 사정이 많아지면 이를 극도로 축약해서 이분법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제가 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하나의 이슈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황들을 입체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촛불집회에서 어느 참여자가 검찰에서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참여자는 법을 좀 아는 사람이었던지라 자신이 불법연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수사나 재판을 받을만한 범죄의 혐의가 없음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검사는 참여자의 협조가 없는 가운데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합니다.
피의자신문조서는 원래 피의자가 이를 확인한 후 서명 날인하도록 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참여자가 확인한 결과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자신이 진술한 것과 다른 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더랍니다. 그래서 서명날인을 거부하고, 피의자신문조서를 수정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검사는 이를 거절하면서 맘에 안들면 서명날인하지 말랍니다.
물론 피의자의 서명날인이 없으면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는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검사가 증거로 제출할 수는 있으나, 피의자가 서명날인이 없음을 주장하면(‘형식적 진정성립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증거로 채택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죄취지 진술이 명확히 기재된 피의자신문조서가 증거로 채택되는 것보다 피의자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계속 수정작성해 줄 것을 요구하던 시위 참여자는 감정이 격앙된 나머지 사실과 다르게 기재된 피의자신문조서를 찢어버립니다.
결국 그 시위 참여자는 피의자신문조서를 찢은 행위로 “공용서류 무효죄”로 기소됩니다.
이 경우, 피의자신문조서를 찢은 행위가 달리 정당방위나 정당행위 등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되지 않는 이상 재판부로서는 유죄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명백히 “공무소에서 사용하는 서류를 손괴”한 공용서류무효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니까요.
이 사안에서 첫 번째 문제는 이와 같은 ‘공용서류무효죄’가 검찰 수사시에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감정을 잘 이기지 못하는 아주머니들, 할아버지들 수사과정에서 피의자신문조서 잘 찢으십니다. 그 경우에 모두 공용서류무효죄를 적용하냐구요? 100이면 99는 안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시위 참여자에게 다른 범죄사실은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집시법 위반, 공무집행방해..이런 거 말이죠. 원래의 수사목적은 그거였을텐데 말입니다.
두 번째 문제점과 관련해서는 다른 예도 있습니다.
검찰에게 밉보인 어느 사업가(혹은 공무원, 연예인 등등)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 검찰에서 수사받으면서 가혹수사를 이유로 검찰항고를 계속하고 언론플레이를 했다던가, 혹은 검찰의 이익과 대립되는 어떤 정책을 최일선에서 주장했다던가.. 뭐 다양할 겁니다.
뇌물, 배임수재.. 뭐 이런 걸로 일단 혐의를 포착하고 수사를 개시합니다. 털어도 털어도 안나옵니다. 검사 1명 더 붙입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털어도 안나오자 결국 세금을 물고 늘어집니다. 대한민국에서 사업하는 사람들 중에서 세금문제로 털면 안 나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결국 사업가(공무원, 연예인 등등)는 조세포탈로 기소됩니다.
아주 전형적이고 단순한, 그리고 너무나도 많이 행해지는 예는 이렇습니다.
뭔가 봐줘야겠다는 사람, 혹은 무서워하는 사람의 범죄혐의가 포착됩니다. 사안이 너무너무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담당검사는 1명, 수사관은 2명, 수사경찰도 약간만 붙입니다. 밤을 새면서 열심히 수사하지만 역부족입니다. CCTV일일이 카피하려면 CD300장 분량이거든요. 그나마 있는 수사력도 고소인 또는 고발인에 대한 추궁에 집중됩니다. 가끔은요, 아예 피의자는 소환도 안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반면 뭔가 제대로 걸렸다 싶은 사람의 범죄혐의가 포착됩니다. 특별수사팀 꾸리고 수사팀으로 한 30명 몰아줍니다. 국가관 확실하고 수사능력 검증된 검사와 수사관들로만 엄선할 겁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텁니다. 수사는 물론 구속수사가 원칙입니다. 법대로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강력한 수사를 펼칩니다. 국민의 알 권리도 철저히 존중합니다. 흘리고, 흘리고.. 심지어 브리핑도 합니다.
모든 것이 법대로입니다. 교묘하게도 법과 원칙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른바 원칙주의자들은 그것만 봅니다. 법대로 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법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느냐..
첫 번째 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서명 날인 안하면 되지 않느냐” 혹은 “어쨌건 죄가 되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두 번째 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쨌든 세금 포탈한 건 잘못 아니냐”
세 번째 예에서는 양자의 수사절차가 어떻게 달랐는지조차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죄가 없으니까 못밝혀내는거 아니냐”
후자의 경우에는 “일단 돈 받은 거 자체는 잘못 아니냐, 공과 과는 제대로 가려야 하지 않느냐” 혹은“너무 미화와 찬양일색으로 가는 거 아니냐...”
물론 상식을 넘어서는 분야에 대해서까지 어느 것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같고, 어느 것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다른지 가려내서 적절한 잣대로 평가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다르다’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정도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정말 무서운 것은 같고 다른 것을 알려줘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본의 전공투 당시 나오코의 남자친구를 죽였던 ‘상상력이 결여된 자’들은, 2009년 우리의 전대통령을 죽였습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죽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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