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만화가 안 나온다.
어제도 안 나왔고 그제도 그끄제도 안 나왔다.
흑백텔레비전 속에선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나온다.
'에잉 이거 때문에 만화도 안 하잖아'
투덜대는 나를 아버지가 엄하게 다그치신다.
'이건 꼭 해야 하는 거야'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TV로 눈을 돌리시는 아버지
난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으로 그 재미없는걸 시청하게 되었다.
재미없다.
너무 재미없다.
저게 뭔데 하루 종일 나오는 걸까?
잠이 온다.
......
'잘한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TV 속의 한 남자가 나이 많은 아저씨에게 마구 소리치고 있다.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TV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남자가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마치 만화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날 이후 매일 저녁 아버지 옆에 앉아서 그 남자가 나오길 기다렸다.
집에 있는 태극기는 아래쪽에 낙서가 되어 있는데 '극단적으로 어린 나'의 작품이라고 한다.
'무럭무럭 자란 나'는 낙서가 되어 있는 태극기를 내 방 벽면 한곳에 걸어두었다.
그 어느 장식물보다 멋지다며 좋아했다.
'무럭무럭 자란 나'를 동네 사람들은 애국자라고 불렀다.
어느덧 '무럭무럭 자란 나'는 '적절히 성장한' 내가 되었다.
국사 시간에 한국 근 현대사를 배운 모양이다.
정치판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 보다.
대한민국을 더 알게 되었나 보다.
'적절히 성장한 나'의 방에서 두 번 다시 태극기를 볼 수 없었다.
투표권이 생겼다.
좋았어 이제 대한민국은 내 한 표로 정크벅크
...
젠장 이거 하나마나다.
찍어줘봐야 아무도 당선이 안 된다.
나는 진정한 마이너스의 손
드디어 우승... 아니 당선시켰다. 믿기지 않는다.
내 저주가 깨진 게 믿기지 않는 게 아니다.
어릴 적에 TV에서 본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단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여기가 대한민국이 맞는 건가?
우와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앙
아앙
앙?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이게 다 임요환 때문이다.
이게 다 송병구 때문이다.
뭐 상관없다.
그 사람은 나에겐 여전히 정의로운 만화 속 주인공이다.
더 망가져도 더 초라해져도 지켜볼 자신이 있다.
오늘도 TV 앞에 앉아서 만화를 기다린다.
앉아서 기다리기 지루해 누웠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누웠다.
'쾅쾅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귀찮다. 애써 모른 척 외면한다.
'담배 있나?'
담뱃가게에 와서 담배 있느냐고 묻는 바보 같은 사람이다.
제길 지금 이 순간 나는 왜 담뱃가게 아들인 게냐
그나저나 슬슬 잠이 온다.
만화 봐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적절히 성장한 나'에게 돌아가 말해주고 싶다.
창피한 건 태극기가 아닌 '따뜻한 방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라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만화가 끝나버렸다.
만화가 끝나버렸다.
이제 다시는 방영되지 않을 나의 만화
지금 난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으로 TV 앞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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