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인기있는 전쟁사에 속합니다.
아주 뭉뚱그려서, 제2차 세계대전을 전선별로 쪼개보자면
나치 독일과 소련이 대립한 (가장 규모가 컸고 인명 피해도 컸던) 동부전선.
나치 독일과 서구 연합군이 대립한 서부 전선.
미국과 일본이 대립한 태평양 전선.
중국과 일본이 대립한 (그러나 모두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중일전쟁 전선.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은 이탈리아가 1940년 10월 경에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을 축출하고 북아프리카 지배권을 가져오려는 야욕으로
이탈리아가 영국을 공격하며 만들어진 전선으로, 사실 전선의 중요도로 따지자면 2선급 전선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규모도 그렇구요.
그러나 사막밖에 없는 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시대는 두 명의 인기 장군을 배출합니다.
에르빈 롬멜과 몽고메리.
특히나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으로 강한 전력의 영국군을 수차례 물리친 롬멜은 오랫동안 천재적인 전술가로 이름높았고
(지금은 대체로 거품 내지는 전술가로는 천재적이나 전략가로는 한계가 있는 정도로 평가되지만)
롬멜에게 박살나며 서구 전쟁사가들은 롬멜을 띄워주면서, 동시에 그런 롬멜을 격파한 몽고메리를 찬양했습니다.
이 장군들의 활약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전선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짐에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요.
수박 겉햝기로나마, 북아프리카 전선을 짚어보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두체 무솔리니의 우울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국지사였고 나라를 위한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절, 그는 중립을 지키고 있는 조국을 질타하며 전쟁 참가를 외쳤습니다.
세계가 결딴날 모냥으로 싸우는 지금, 참가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에게 밉보인다는 이유였지요.
그 사나이의 주장대로 조국은 연합군 편에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결과는 묻지 맙시다)
그러나 승리를 가져왔음에도 조국은 빈약한 보상을 받아왔습니다. 전장에서 수십만의 젊은이들을 묻은 것 치고는 매우 빈약한.
이 사나이, 무솔리니는 분노했습니다.
수많은 인명을 던져가며 연합군에 참가했음에도 극히 일부(티롤 등)의 영토만을 던져준 연합군과
그런 연합군에게 항의다운 항의도 못하고 눌려버린 나약한 조국에게 말이죠.
그리고 그는 검은 셔츠를 입은 검은셔츠단이라는 조직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군하여, 친위 쿠데타를 이끌어 냅니다.
그가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였습니다.
검은셔츠단의 로마 진군은 멋지게 성공을 거두었고, 한때 히틀러조차 무솔리니를 보고 본받고자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최고 지도자 자리에 앉자마자 에티오피아 침략 전쟁 등 제국주의적 모습을 보여 수많은 적들을 만들게 됩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동지들인 연합군을 버리고,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함께 추축국을 이룬 이탈리아는 더욱 막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할 때 쯤, 결국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열리고 맙니다.
처음에야 무솔리니의 열화 카피버젼 쯤으로 여겨졌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하며 무솔리니의 위상을 넘어버렸으며, 소련과 함께 빠르게 폴란드를 제압하며 매우 잘 나가게 됩니다.
반대로 무솔리니는 뭘 해도 별로 안 되던 상황이었습니다. 비교적 약체국인 에티오피아 침략조차 매우 고전했으니까요.
자존심을 구길데로 구긴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는 신중하게 대세를 관망했으나
곧 나치 독일이 놀랍게도 프랑스를 단 4주만에 완전히 망가뜨려버리자 신중론을 발로 뻥 차버리고 나치 독일에게 꼽사리 낍니다.
독일-프랑스 전선에서 프랑스가 완전히 발리자 이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를 공격합니다(1940년 6월 10일)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프랑스 국경 수비대에게 패퇴하며 그야말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죠.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같은 국가 대 국가의 총력전에 대비해서,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충동적으로 프랑스를 공격하며 세계대전에 참가하자마자, 전 세계에 흩어져있던 이탈리아 상선들은 즉시 연합군에게 나포되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무솔리니는 뭔가 깊은 고찰을 하고 전쟁을 참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시기 무솔리니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열등감이었죠.
곧 프랑스는 항복하게 됩니다만, 프랑스에게 패퇴함으로서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져버린 무솔리니는 더더욱 명성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나자, 곧 나치 독일과 대영제국은, 훗날 BOB(배틀 오브 브리튼)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항공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BOB의 초반에는 독일이 거침없는 기세로 대영제국을 몰아붙여, 대영제국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편, 라이벌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승승장구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던 무솔리니는
물끄러미 유럽의 지도를 보다가 유레카를 외칩니다.
"지금 영국은 본토방어전에 정신없을테니, 이 틈을 노려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을 몰아내자!"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뭐, 나름 합리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에 따라 1940년 6월 11일부터 계속되던 몰타섬 공격에 박차를 가하며,
동시에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그리치아니 원수 등 30만이 넘는 대규모 원정군을 보냅니다.
이 때 대항하는 영국군은 고작해야 3만명. 숫적으로만 따져도 10배가 넘는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같이 보내진 리비아 총독 이탈로 발보와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그리치아니 원수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주 : 이탈로 발보는 유럽에서 미국까지의 대륙 횡단 비행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파일럿이었으며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친구이자 제2인자 였으나 무솔리니의 시기로 리비아 총독으로 좌천온 상태)
먼저, 이 시기의 이탈리아의 상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의 다음가는 국력이자 유럽의 강국정도는 되는게 이탈리아의 외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엉망진창이었는데, 먼저 이탈리아군은 구식 무기와 전쟁 교리로 가득찬, 2류급 군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치룬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며 많은 청년들을 잃었으며
억지로 통일한 이탈리아의 북부와 남부의 대립은 심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독일과 같은 과학, 기술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탈리아는 프랑스 침공에 삼류 전투기를 파견했다가 독일의 비웃음만 삽니다)
결정적으로 군대의 사기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도무지 싸울 의욕이 안 났던 것이었지요.
사실 이탈리아 군인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은게...
이게 조국이 침략당하는 류의 전쟁이면 모를까, 오히려 조국이 타국을 침략하는 명분없는 전쟁일 뿐더러 (애국심 부재)
원래 이탈리아인은 다양한 인종, 다양한 지방색, 다양한 의견으로 분열이 심했고
결정적으로 "도대체 우리는 왜 저 먼 사막나라에 끌려가서 죽어야 하는가?" 는 질문에 답변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무솔리니의 북아프리카 침공은 그 개인의 야욕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는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러니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당연히 사령관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격렬하게 무솔리니에게 반대하던 발보는, 비행기를 타고 공중정찰을 나갔다가 아군 순양함의 오인 대공사격에 격추당해 전사합니다.
이제 남은 반대자가 된 그리치아니 원수는 무솔리니의 명령을 씹으면서 리비아에서 꾹 눌러앉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후 그리치아니는 '나는 파시즘에 반대하여 일부러 그런 것이다' 라고 주장했으나 이 사람 골수 수구주의자라서... 그냥 겁먹고 쫄았다는 평이 많습니다.)
아무리 출격을 명령해도 거듭 자신을 무시하며 밍기적거리던 그리치아니를 보고 무솔리니는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낍니다.
"너, 짤릴래, 나갈래?"
그리치아니는 수구주의자인 동시에, 보신주의자였기에, 자신의 소중한 군 경력을 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의 몇 개월을 밍기적거렸던 그리치아니는 마침내 1940년 9월 13일, 앉은 자리를 박차고 영국군에게 전진합니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전역이 시작되었습니다.
ps. 9월에 북아프리카 전선을 침공함과 동시에 무솔리니는 그리스 침공(1940년 10월 28일)을 감행하며 히틀러가 뒷목을 잡게 만듭니다.
ps2. 무솔리니가 프랑스를 침공한 건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가 발리고 난 뒤 12일 후인 6월 22일에 프랑스는 독일에게 항복을 하는데, 무솔리니는 땡깡을 부려 프랑스가 이탈리아에게도 다시 항복하도록 항복 조인식을 2번 열게 만듭니다. 이 시기 무솔리니에게는 히틀러에 대한 열등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던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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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침공이 없었다면 유고사태도 없었을테고 그럼 독소전은 2~3개월 일찍 봄에 개전했을테고 모스크바는 물론 독일군이 더 깊숙히 밀고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으니 이후 독소전 전개가 달라졌을 수도 있죠.
아시아 독립에 공을 세운 무다구리 렌야 장군이 있다면 유럽 해방에는 무솔리니 두체가 있다고 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