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체중 감량기 이전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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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게.
군악대의 연주 속에서 나는 무너졌다. 나는 동생을 꼭 안고 놓아주지 못했다.
내 눈물로 동생 어깨가 젖자 곧 내 어깨도 젖기 시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통곡을 했다.
싫다. 가지 마라. 이딴 데 뭐하러 가냐. 젠장. 빌어 처먹을. 내가 너한테 왜 그랬을까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내 등을, 어깨를, 팔꿈치를 지나 손목을 잡은 동생의 손이 나를 그치게 했다.
남자돼서
올게라는 뒷 말은 목이 메어 하지 못한 동생은 상그지처럼 찡그려 웃으며 멀어져 갔다.
조금씩 멀어지다 안개 같은 인파 속으로 뿌연 내 시야 속에서 점점 작아져 갔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연대장이 개소리를 지껄였고 개 같은 국민의례, 개 같은 군악대의 소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목구멍이 뒤집힐 정도로 울었지만 꿈이 아니었다. 음악이 바뀌었고
장병들이 오합지졸로 줄을 맞춰 가족을 떠나는 행진을 시작하자 그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가족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들었다.
저기 보인다.
나를 봤다.
나는 눈물을 닦고 똑바로 섰다. 단전에 힘을 모으고 입을 크게 벌렸다.
시끄러운 군악 소리를 넘어서 나는 할 말이 있다.
동생이 가까이 지나갈 때 나는 벼락처럼 소리쳤다.
개 같이 구는 놈 있으면 말해. 죽여버릴 테니까.
동생이 엄지를 들었다. 나도 들었다. 나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제발 건강해라 라는 말을 반복했다.
동생이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다른 가족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삼거리 쪽으로 이동했지만 나는 그 반대편인 논밭 쪽으로 걸었다.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내 잘못으로 잃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 같은 놈은 뒤져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굴다리를 지나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를 곳에 도달해서야 나는 멈춰 서서
엄마에게 전화해 잘 들여보냈다고 알렸다. 전화를 끊고 담배를 물었다.
나는 동생에게 잘 해줄 수 있었다. 시간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리 하지 않았다.
입대 날짜도 분명 들었으면서 정신 못차리고 그게 오늘인지도 몰랐다. 마지막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형이 어디 있을까.
그제서야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잘 해주지 않았다.
아빠를 도와줄 수 있었다. 매일 정오에 출근하실 때 아빠를 태우러 온 봉고차 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었다.
아니 그 전에 퇴근 하고 돌아오시면 인사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안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안 했다.
아빠가 예전에 아끼던 수석이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 엄마는.. 그리고 엄마는.. 나는 또 앞이 뿌옇게 변해서 고개를 숙였다.
밤늦게 들어오셨다.
가끔 엄마의 딱딱한 어깨를 주무를 때면 늘 눈물이 올라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젠 다 컸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꼭 눈물이 나왔다.
말없는 엄마의 등과 딱딱한 어깨.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렇게 틱틱대며 방으로 굴러들어가 담배를 꼬나물 때가 아니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나도 힘들어. 라고 말해버렸다.
고민있는 척, 생각있는 척, 나름대로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척
담배를 물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가 아니었다.
보이스챗에 큰 소리로 떠들었다. 길드원들과 레이드를 하고 전장을 뛰었다.
게임이 중요했고 그들이 중요했다. 엄마의 등은 말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사랑한다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렇게 말해봤자 고개를 슬쩍 뒤로 흘긴 채 말없이 웃기만 했을 테지만 그래도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나는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그대로 떨어뜨려 버렸다.
다리를 굽혀 쪼그려 앉아 담배를 주으려는데 온몸의 살이 여기저기 접히고 무거워서 쉽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새 담배를 꺼내려다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담배 한 개피에 시선이 멈췄다.
문득 나는 이 현실도 다시 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같은 놈도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동네로 돌아왔을 땐 이미 시간이 늦어 마을버스가 끊긴 뒤였다.
마을버스 15분 거리를 걸었다. 숨이 차고 한여름인 것처럼 등에서 땀이 쏟아졌다.
집 앞의 오르막 길에서 나는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폐도 무릎도 발목도 허리도 도무지 버텨줄 것 같지가 않았다.
모든 걸 되돌리고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되돌리고 싶다. 제대했던 날로 돌아간다면 아니 하물며 1년만 시계를 되돌려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무릎을 짚고 오르막을 오르면서
어린이집과 동네 놀이터를 지나면서 재활용 버리는 전봇대와 의류수거함을 지나면서 불 꺼진 정육점과 빵집을 지나면서
되돌리고 싶다는 도돌이표가 계속됐다.
동생을 이렇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이런 아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형편없는 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복학해서 친구들과 어울렸을 수도 있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졸업을 했을 수도 있다.
그 치열하고 지옥 같은 취업전쟁에 참전했을 수도 있다. 아주 운이 좋다면 어쩌면
지금쯤 직장에 다니며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태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조금 더 편한 일을 할 수도 있었다. 아빠는 협회에 나가 내 자랑을 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하지 않았다. 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
현관 손잡이가 미지근해지고 내 땀에 젖을 때까지도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이제 도돌이표는 늦었을까 하는 말을 반복시켰다.
늦었을까
늦었을까
현관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도 나는 신발장 옆에 우두커니 서서 자고 있는 엄마 아빠의 숨소리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허약한 숨소리. 구석에 있는 방에서 동생이 비틀비틀 나와 늦게 왔네 라고 말을 걸 것 같았다.
내 것까지 신발이 세 켤레 밖에 없었다. 내 찌그러진 농구화, 통굽 샌달, 빛 바래고 낡아빠진 효도 구두.
이불 밖으로 삐쳐 나오지 않으려 구부러진 엄마 아빠의 발치에서
나는 분명히 늦었음을 직감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극복하기 어려운 오늘이었다.
등을 돌려 내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잠결에 목 잠긴 쇳소리로 허공에다 간신히 말했다.
큰아들, 오늘 형 노릇 제대로 했네.
그 쇳소리에 스며 있는 뿌듯함이 너무 부끄러워 나는 입을 막고 방으로 들어와 한참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개 같은 인생을 수십 번 되돌려 본 후에야 나는 다음 생각을 했다.
늦었다. 분명 늦었다. 그러나 더 늦을 지도 모른다.
동생과 작별했다. 물론 얼마 안가 다시 만날 수 있다. 착하고 순해서 별 탈 없을 것이다. 면회도 자주 갈 수 있다. 문제는
언젠가 엄마 아빠와 작별할 날이 온다. 그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또 무력한 돼지처럼 쭈그려 울고 싶지 않다. 비참한 죄책감과 부끄러운 눈물 속에 작별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탈출하고 싶었던 건 이 지긋지긋한 집안이 아니라 나의 개 같은 현재 였다.
이 개 같은 현재와 작별해야 한다.
잘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하고 싶다.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싶다. 원래 내가 되었어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자랑거리가 되고 싶었다.
나는 5인분을 넘게 먹는다. 1인분이라도 하고 싶다.
되돌리기가 이미 늦었지만 더 늦을 수도 있기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변하기로.
살도 빼고 알바 일도 구하기로. 그리고 나중엔 복학도 하고 졸업해서 취업도 할 거다.
동생이 제대할 때 가볍고 튼튼해서 전국일주를 해도 끄떡없는 자전거를 사줄 거다.
아빠에게 멋진 새 맞춤양복을, 엄마는 더 편한 곳에서 일하도록 만들 거다. 그리고 동생 대학도 내가 보내줄 거다.
내가 할 수 있다. 늦었어도 할 수 있다면 그리 할 것이다.
잠시 후, 나는 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더럽고 역겨운 놈과 손을 잡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은 동생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그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모니터를 노려보며 한글자 한글자 씩 씹어먹으며 읽어 내려왔다.
살을 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모른다. 알 필요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게 어려운지 쉬운지는 관심 없다.
더 어려운 일이라도 지금 나는 할 수 밖에 없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집어 치울 거다. 반드시. 반드시 해낼 거다.
이런 놈이 해냈다면 나라고 못할 리가 없다.
근성? 중2병? 나는 씨익 웃었다.
진짜 근성과 진짜 중2병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
지금삭제를 입력하라는 경고 문구 앞에서도 나는 거침이 없었다.
나는 지금삭제를 11번 차례차례 입력하고 웹페이지로 가서 계정 자체를 지워버렸다.
미처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날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틀째 잠을 못자고 있지만 내 정신은 또렷했다.
옷장을 뒤져 입을 수 있는 옷 세 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싸서 이불장 구석에 처박았다.
이 세 벌을 제물로 삼아 매일같이 땀으로 적시며 나는 변할 거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몸에 맞는 옷들을 차례차례 꺼내 입을 거고, 가장 오래된 옷이 맞았을 때,
알바를 구할 거다. 그 때까지 난 살 빼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일체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더 있었다.
나는 벗어놓은 잠바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마침 두 개피가 남아 있었다.
하나를 꺼냈고 남은 하나는 부러뜨려 다시 갑에 넣어 휴지통에 버렸다.
나는 마지막 담배 한 개피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불 꺼진 화장실 거울 앞에서 티셔츠를 벗고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고 천천히 뱉었다. 담배 끝 빨간 불에 내 흉측한 상체가 거울 속에서 피어올랐다.
오늘이 이 몸으로 사는 마지막 날이다. 이 현실의 종점이다.
나는 한 모금씩 쓰고 떫게 담배 연기를 씹었다.
증오와 분노가 모아져 나를 움직이게 했다.
온갖 후회와 자괴감으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나는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했어야 하는 일들을 반드시 해낼 거다.
나, 큰아들이 모두를 구할 거다.
그리고 똑똑히 보아라.
특히 고작 75kg를 뺐다고 인터넷에 자랑질하는 허세덩어리는 두 번 봐라.
이 나님의
무려 80kg 감량기를.
꽁초를 변기에 거칠게 집어 던진 뒤 나는 오랫동안 구상해온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살이 접혀서 잘 되지 않았지만 낑낑 거리다 보니까 가까스로 취할 수 있었다.
나는 독기 품은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콱 물었다. 혀였다. 못난 얼굴로 파닥거리다 안정을 취한 뒤
나는 다시 포즈를 잡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두 눈 속 흑염룡이 당장이라도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변한다.
이른 새벽 저 멀리, 전쟁노래의 북소리가 울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