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 공포영화가 그렇게까지 무섭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시절에 후배랑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TV, 인터넷, 잡지 등등의 각종매체에 익숙해져있던 난, 공포영화를 이성과 보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고 헤헤거리며 '장화홍련'을 보러 가자고 했었다.
"그 영화 무섭다고 하던데요?"
라는 그 아이의 말에
"응. 그게 내 계획이야"
라고 말하진 못하고
"조용한 가족, 반칙왕 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겸비한 새로운 감독님의 신작이 나왔으니 이 영화가 무섭다 한들 그 무서움의 크기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진 못할 것이다"
대충 이런 뉘앙스로 '공포영화를 보면 이성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라는 논리급의 궤변을 늘어 놓았다.
여차저차 어찌저찌 되어서 그 아이와 영화를 보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난 영화 시작 30분만에 무서운 장면에서 눈을 감은걸 들키고 말았다.
그 이후 쪽팔려서 두 눈 부릅뜨고 보려고 했으나 씽크대 밑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 보는 씬에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속삭였다.
"영화 끝나면 여기서 뭐 나왔는지 얘기 좀 해줘"
이 일이 있고 나서 그 후배는 종종 날 놀려 먹었다.
"오빤 아마 그 씽크대 밑에 뭐가 있었는지 모를거야."
"야. 말 좀 해줘. 뭐가 있었는데?"
"아마 오빤 평생 모를거야"
이때의 기억이 강렬했던지 그 이후에 공포 영화를 보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방 안에 누워서 멍~~ 때리고 있는데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아. 씽크대 아래에서는 도대체 뭐가 나왔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날의 트라우마를 이겨 내려면 공포영화를 공포영화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침 공포영화가 하나 개봉한 시기였다. 시간표를 보니 상영시간이(23시 30분) 얼마 남지 않아 부리나케 옷을 챙겨입고 뛰쳐 나갔다.
상영관 안으로 입장하는데 객석이 휑~ 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라고 혼자 중얼 거리며 앞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영사기가 돌아가더니 빰빠라라라빰 하는 영화사 로고가 뜬다.
헐. 뭐지?
하고 당황하고 있는데 출입문이 닫힌다. 설마 나 혼자 보는건가? 하는데 광고도 없이 바로 영화가 시작된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빨간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아져있다.
'아. X나 무서운데'
라고 자그마하게 말했다.
이때 갑자기 퍼뜩 든 생각이 있었는데 사람이 목소리가 작아지면 자신감도 떨어지는 것처럼
지금처럼 X나 무섭다는 나약한 생각을 하면 공포영화 트라우마를 못 이겨낼것만 같았다. 어차피 극장안에 아무도 없고 해서 큰소리 한번 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일어날것 같진 않았다. 자심감 회복 및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아. X바. 영화 X나 재밌겠다."
라고 소리쳤다. 라고 하지만 역시나 소심하게 조그마하게 말했다.
이랬더니 뒤에서 '큭큭'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밤중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을때, 왠지 눈을 뜨고 싶지 않을때가 있다.
눈을 뜨면 괜히 못볼걸 볼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 그대로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곤 한다.
그때의 기분처럼, 지금 뒤를 돌아보기 싫다. 뒤에 아무도 없는거 확인했는데...내가 잘못들었겠지. 그래. 예민해져서 그래. 아무것도 아냐......근데...... 무섭다.
밖으로 나갈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한번 움츠러든 몸은 내 마음대로 펴지질 않았고 나의 쓸데없는 상상력은 공포심으로 치환되어 압박했다. 내가 뛰어나가서 저 문을 밀어도 열리지 않을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나에게 누군가 다가올것만 같았다. 왜 공포영화에서도 혼자 살겠다고 뛰쳐나가는 놈이 먼저 죽지 않나.
그렇게 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극장에 혼자 앉아 공포영화를 보았다.
눈도 안 깜빡였다. 왠지 길게 깜빡이고 나면 내 눈앞에 뭔가가 다가와 있을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무서울거 같아 바닥을 보고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왜 누가 고개 숙이고 있으면 니킥 보고 싶지 않나.
그냥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했다. 귀신이 나와도 분장 잘했네 라며 자위하며......
어찌저찌 여차저차 영화가 끝이났다. 고작 2시간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던것 뿐이지만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온몸이 뻐근했다. 수명이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아마 저승가면 염라대왕 명부에 '바보같이 밤 12시에 혼자 영화보러 와서 심장이 쪼그라 들어 명이 10년 짧아진 녀석' 이라고 적혀 있을것 같았다.
근데......어째 출입문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때는 엔딩크레딧 올라가기 무섭게 문 열어주던데......한참을 출입문 쪽을 응시하고 있는데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열려라 참깨를 속으로 20번 정도 외치고 나서야 문이 서서히 열린다. 바깥 불빛이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이제 살았다 싶어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가려는데 뭔가 이상하다. 맞다. 극장 스텝이 안보인다. 보통 문 옆에 서서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라고 해주는데...그 스텝이 안보인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움직이는데 영화 엔딩곡이 보통 스산한게 아니다. 척 들어도 귀신 나오게 생긴 노래다. 이놈의 영화 끝까지 날 괴롭힌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냅다 뛰었다. 문을 지나치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온다.
"아. x바 깜짝이야"
극장 직원이 보통은 열린 문쪽에 서서 인사하는데 오늘은 문을 열어놓고 닫힌 문쪽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내 다소 과격했던 리액션을 사과하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고 둘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올리는데 서로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하. 이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멋쩍게 웃는 두 사람.
그리고 늘상 그랬던 것처럼 그 두사람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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