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 부르기도 어색한 사람과 연이 닿아 늦은 밤 닭발에 소주를 한 잔 했다. 보름밤이라 시장통엔 빛이 어수선한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 면도 있고, 용기가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했다. “시 쓰신다면서요?”
남몰래 찾아본 글은 좋았다. 세상천지 요동치던 그 나이와 달리 이제는 우리 나이만큼 잔정이 많아 모서리가 닳았는데, 또 모질지는 못해서 행여 못된 사람이 밟으면 연노랑 잎사귀가 상할까 걱정스러운 말들이었다. 나는 그이의 인생을 잘 알지 못하지만 뭐 어때, 온전히 제 마음 만으로 책 한 권을 채우는 것은 녹록치 않다. 너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글로만 밥 벌어먹고 살기엔 힘들어 보였지만 뭐 어때, 너 나이에 그거 모르겠어.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다들 그랬듯이 나도 문학소녀였던 시절이 있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세 시 골목길 달빛이 부끄러웠다. 오랜만에 수첩에 글줄 하나 썼다. 물론 술 깨고 읽어보지는 않았다.
해질녘 거리를 걷는 게 무서웠던 때가 있었다. 어리든 젊든 늙든 말랐든 건장하든 간에 그냥 시야 안의 모든 남자가 무서웠다. 마주 걸어오다 지나치겠다 싶을 즈음 주먹 쥐고 침 꼴깍 삼키고 달릴 준비를 했다. 항상 운동화를 신었다. 오 분 거리 슈퍼 우유 사러 가는 길이 항상 그랬다.
불과 일 년 전의 일이다. 완벽하게 예전과 같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괜찮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인생에 그런 일 겪을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한다. 세상의 수많은 사건 사고는 신문 구석의 검고 흰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몫이다. 내 시야 밖의 삶들 어딘가에 그것들이 있다. 남자일수도, 여자일수도, 운이 나빴을 수도, 운이 좋았을 수도, 생명의 탄생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순간의 압도적인 공포를 기억하지만 동시에 그 밤 나를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깨달음과 그 경험을 얻었음에 감사한다.
사람들은 실체가 없는 공간에 분노를 쏟아내는 데 익숙해졌다. 교과서에서 많이 본 단어들이다. 사회, 성장, 실업, 원인, 논증, 파편, 고립, 개인, 이성, 타자, 관계, 소통, 정체, 토론 뭐 그런 류의 회색 단어들이 상황과 논리를 명료하게 만든다, 적어도 그러는 것 같다. 그런데 애당초 왜 인간은 그런 단어들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몇 천 년 동안 학자들은 낱말들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다듬으며 인간의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희망을 찾고 싶었을까, 절망을 증명하고 싶었을까.
이 시대는 분노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을 소리높이고 있어서 가끔은 기뻐해야할지 절망해야할지 분노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 옳은 말도 그른 말도 아니다. 특히 인터넷은 더 그렇다. 이 대나무 숲은 평등해서 오는 사람이 부처님이든 연쇄살인마든 문을 열어준다. 내년 목표가 꽃을 키우겠다거나 남의 빌딩에 비행기를 갖다 박겠다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바다에서는 다가오는 해류를 탈 때 조심해야 한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상을 하듯 자신을 지켜봐야 한다. 옳은 방향으로 가는 물결 같아 보여도 끝은 고여 썩어 들어가는 죽은 바다에 이르러 천년을 맴돌 수도 있다.
최근에 안데르센의 동화 <어머니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앓다 죽은 아이를 사신으로부터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는 삼단 같은 머리칼을 하얗게 세고, 가시나무를 끌어안고, 진주 같은 눈알을 뽑아 주어가며 얼음의 밤을 건넌다. 모든 것을 버리고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사신은 아이의 미래를 두 가지 보여준다. 그녀의 아이는 티 없이 행복한 삶을 살거나,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 둘 중 어느 삶을 살게 될지는 그 또한 모른다. 그러자 어머니는 신에게 아이를 내가 아닌 그대 곁에 머물게 하시고 그저 당신 뜻대로 하소서, 기도한다.
나는 이 결말에 수긍하지 않는다.
어디에나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있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다. 죄 없이 밉기만 한 얼굴도 있다. 누구 깜냥인지 몰라도 세상사는 게 쉽지 만은 않다. 저 빌어 처먹을 달은 몇 만 년째 우리 이 짓거리를 봐왔겠거니 생각하면 아주 그냥 머릿속이 깜깜해서 핑 돌아버린다. 왜 사냐고 답도 없는 세상에 왜 던져놨냐고 누군지도 모를 멱살을 골백번도 잡았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시를 쓰는 그를 보며 내가 변해버렸음에 안타까워했지만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내가 잃어버린 시를 누군가 기억하고 삶에 간직하고 있어줘서 기쁘다. 잊고만 있었던 내 낡은 곰인형을 네가 품에 끌어안고 있다. 나는 또 안다. 밥벌이에 지쳐 당신이 시를 잃더라도 또 다른 어린 내가, 또 다른 어린 당신이 나타나 시를 써 줄 것을 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당신이 부끄러워하며 수첩에 달빛을 받아 쓰겠지. 그 이가 십년 이십년이 지나 곰인형을 잃었을 때 쯤엔 또 누군가 그 몫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열여덟 살의 나를 또 다른 열여덟 살의 소녀가 찾아준다. 그 미래의 소녀가 결코 알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면면히 이어져 왔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저 눈 잃은 어머니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는 제법 잘 달리게 되었고 여전히 운동화를 신지만, 그래도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가끔 밤길이 무섭지만, 괜찮다. 일찍 들어가라고 등 떠미는 손 우락부락한 손길들이 진심인 것을 알고, 힐끔 뒤돌아보면 애써 나를 추월해가는 골목길의 인상 험악한 총각들도 이제는 제법 귀엽다. 괜찮다. 괜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내 배 아파 낳을 아이가 다치고 넘어져도 누군가 일으켜 세워줄 것임을 알기에 괜찮다. 그 애도 분명 삶에 감사할 테다. 학자들이 시인들이 종국에 가닿고 싶었던 것도 '살아도 된다는 믿음' 같은 것이었으리라.
일상을 공전하는 많은 이들이 단지 성별이나 어떤 차이를 이유로 서로를 혐오하지 않음을 잘 안다. 때로 날것의, 정제되지 않은 말과 마음들이 부딪쳐 상처를 주고 주먹을 휘둘러 피 흘리겠지만, 결국 우리 한 데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깨달을 테니 괜찮다. 수많은 세대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증오만 키워나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매일매일 새로운 아이가 글을 쓰기 시작하듯 잊히지 않고 흐르고 있다. 우리들은 그 많은 분노와 절망을 넘어 사랑을 할 것이고, 아이들을 낳을 것이고, 다시 아이들이 사랑할 것임을 안다. 그 속에 작은 시어들이 하나 둘씩 달처럼 빛나겠지. 세상이 힘들어 가끔 까먹을 뿐 결코 영영 잊혀질 순 없다.
그러니 저 눈 먼 어머니의 아이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서로에 대한 날 선 경계가 아니라 (어느 프랑스 할아버지가 말했듯) 우리 발밑의 무관심과 체념에 대한 분노뿐인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일으킬 수 없게 떨어뜨려놓는, 시를 잡을 수 없게 찢어버리는 그에 대한 분노만 남겨두어야 한다.
달이 밝은 밤이다.
P.S. 월요일임에 분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