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토요일 약간 늦은 점심 시간의 약속. 역시나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다. 앉을 자리는 당연히 없고, 러시아워 지하철 마냥 이리저리 치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말의 지하철은 평일에 비해 조용하다.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눈은 스마트 폰을 쳐다보고 있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듣기 위해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아, 이런. 이어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오늘 지하철 여행은 지루할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앗. 자리가 났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자리에 앉았다. 성공. 이제 편안히 갈 수 있다. 평소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축복이 온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자리에 앉아서 잠깐 위를 쳐다보니 어떤 여자가 머뭇거리는 것을 봤다. 훗. 이 자리를 탐했던 것이었겠지. 미안하지만 이 자리는 나의 자리요. 게다가 난 아직 목적지까지 가려면 10여분이 넘게 남았다고. 당신은 다리 아프게 서가시오, 난 편하게 앉아가겠소. 별 것 아니지만 위너가 된 기분이다. 이런 소소한 승리감이 괜시리 오늘을 활기차게 만든다. 고속터미널을 지나니 자리가 많이 생겼다.
나와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뒤늦긴 했지만 그녀도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살짝 봤다. 아름답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20대 중반처럼 보이는 그녀. 긴 머리와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를 입은 그녀. 지하철에서 쉽게 보기 힘든 그런 외모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더니 귀에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그렇게 10여분을 넘게 갔을까. 환승할 곳에 도착해서 내릴 준비를 했다. 내 옆의 그녀도 같이 일어선다. 아마 그녀도 목적지가 나와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일어선 그 때였다.
부우우아아아우오이오아우우아아앍뽱뽕뽱빵.
지하철 안의 적막함을 깨는 그 소리. 아름답던 그녀에게서 나온 그 소리. 너무나도 경쾌한 그 소리. 여자친구가 이런 소리를 냈더라면 아마 엄치를 치켜들며 나도 모르게 따봉을 외쳤을 그 소리. 마치 내가 낸 소리 마냥 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그 소리. 그녀의 아름답던 외모만큼이나 경쾌한 소리였다. 그러나, 여기는 집이 아니었다. 지하철이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꼽고 있어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아니다. 분명히 진동으로 인해서 소리가 났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이 그녀의 외모를 한층 더 빛나게 만든다.
아.
아.
너무 구리다.
그녀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온 그 향기는 너무나도 구렸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주위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아..뭐야 이거..~!@#$" 조용히 들려오는 욕과 신음 소리.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자리를 옮겼다. 몇몇 사람들도 다른 문쪽으로 이동한다. 결국, 그녀는 혼자 남았다. 고개를 떨군다. 어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을테지.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그 수 초의 시간은 그녀에게는 수 년의 시간보다 더 길었으리라.
문이 열렸다. 그녀는 우사인 볼트마냥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한다. 하이힐인데. 상당히 높은 하이힐인데. 하지만 하이힐은 그녀에게 제약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런닝화를 신고 뛰는 것처럼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뛰어가는 그녀를 앞에 두고 난 환승 플랫폼을 지났다. 환승할 곳에 도착하니 아, 그녀가 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알아봤나보다. 갑자기 다른 쪽으로 간다. 창피했을테지. 그래, 이해한다.
그렇게 좋은 술 안주가 생겼다. 아름답던 그녀의 경쾌한 소리. 이건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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