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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4/05 17:09:52
Name 유가네
Subject [일반] 집단의 전통과 변화
 얼마 전에 제가 활동하는 동아리에서 신입생들과 함께 환영회 같은 자리에서 술을 정말 많이 마신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한 아이의 학부모님께서 이 일로 고소를 한다고 하시며 저희 단과대학 학장님께 이 일을 알렸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자 선배들이 불려가서 반성문과 함께 면담을 하였습니다. 동아리 분위기가 좀 뒤숭숭해진 그런 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아니 뭐 겨우 그런 일로 그렇게까지 하느냐. 우리도 다 한 일이고 한데 너무 심한 것 같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동아리 회장 형이 동아리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이 일을 말하며 앞으로 이런 일 절대 없을 것이라고, 미안하다고 말을 할 때는 울컥하는 그런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왜 우리 위에서도 다 해온 것인데 갑자기 우리한테 이러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시 제가 활동하는 동아리에 대해 말을 해보자면, 이 동아리는 좀 오래 된 동아리입니다. 공연동아리라서 공연을 하는 날에는 지금 일하시는 선배님들도 오시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이 많았고, 그 중에는 오래 전부터 행해지던 안 좋은 전통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과도한 위계질서나 합숙같은 일이 있을 때 서로 힘들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현재 동아리 활동을 하는 선배들은 싫어하면서도 하지 않으면 윗선배들이 뭐라 할까봐 하는 그런 느낌이 강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환영회도 그 중 하나로, 정말 동아리를 하면서도 별로 없는, 일부로라도 술을 많이 마시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좀 힘드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관습이 많았지만 선배들에 대한 눈치와 계속 해오던 것을 바꾸기에는 부담이 되어 계속 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전통을 싫어하는 선배들도 있었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은 이런 것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습니다. 공연 준비를 하며 연습 때마다 술을 마시던 것을 두 번에 한 번 정도로 줄인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참여한다는 틀 같은 것들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런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저 역시 이런 “전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저에게 이런 위계질서를 강요할 때는 정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소심한 사람이기에 그냥 하다 보니 지금은 별로 느낌도 들지 않지만 제가 집행부가 되면 많은 것들을 바꿔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동아리의 “전통”들이 부끄러운 것들이 많아 어디에 말할 수도 없는 그런 동아리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학장님께 혼나는 그런 큰 일이 있고 나자 처음에는 누군지는 몰라도 신고를 한 사람에게 원망도 들고 화도 났지만, 조금 뒤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일을 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정말 용감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과 상관 없이 총대를 메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못하기에 무언가가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집행부가 되어 이런 일들을 추진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린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도 어영부영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일이 한번 있다면 여태까지의 전통에 대해 문제를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도 이런 것들을 바꾸자고 설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변화에 대한 당위성 역시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소에 제가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이러한 전통들이 변화하기를 정말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제가 처음 저 얘기를 듣고 화도 났다는 것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놀랍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생각을 하며 어떤 집단이 변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꼈습니다.

 집단의 전통과 소속감은 집단을 유지하는 데에는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그 집단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주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여 사라지게 될 뿐입니다. 물론 전통이 없는 집단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전통을 유지하며 적절히 시대의 변화에 맞게 변화해 나가는 것이 집단이 생존해가는 방식일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저희 동아리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그 중 하나가 필참으로 새벽까지 진행되는 공연 뒷풀이의 참여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변화가 앞으로도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고, 얼마 전 PGR에 있던 일을 보며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평소에 글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던 사람이지만 PGR을 사랑하기에 시험이 끝난 주말이 가기 전 제 첫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부족한 글솜씨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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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
15/04/05 18:00
수정 아이콘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 익숙해진다는게 참 무서운거 같습니다. 분명 처음에는 누구나 저런 강제적인 음주가무 문화에 거부감을 가졌을텐데, 그 집단에 속해서 지내오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거기에 새로운 구성원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분노하고, 개념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유가네님께서 그 새로 왔다는 신입생분을 잘 챙겨주셨으면 하네요. 알게 모르게 왕따를 당할지도 모르고, 그렇게까진 아니더라도 분명히 선배분들 중에 마뜩찮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거 같네요.
유가네
15/04/05 22:31
수정 아이콘
음 제가 얘기를 들었을 때는 누군지 다들 몰랐는데 그 이후로 안 것 같더군요... 저는 그 뒤에 더이상 얘기를 못 들어서 모르는데 다들 알음알음 아는 것 같고... 누군지 알면 밥이나 사주면서 힘내라고 해주고 싶습니다. 많이 이것저것 챙겨도 주고요.
15/04/05 18:00
수정 아이콘
전통과 악, 폐습은 구별되어야 하죠. 저는 한국에서 대학생이 삶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대학생들 스스로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위계질서를 만든다거나 술을 강권한다거나 하여
스스로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를 왜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 내 집단에서는 모든 참여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어렵지만요.
기아트윈스
15/04/05 19:12
수정 아이콘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나는 이미 고생했으니 이제 꿀 빨아야겠다 류의 설명이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은 통찰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제 생각은, 한 집단의 아이덴터티를 유지시켜주는 데 가장 유효하고 손쉬운 수단이 경험의 재생산이기 때문에 그렇다...입니다.

공동체의 결속력의 대부분은 구성원들이 같은 경험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에서 하는 것에서 부터 옵니다. 훈련소 동기들간의 유대가 더 높거나 낮은 기수 사이에서의 유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지요.

하지만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오고 기존 구성원이 하나씩 떠남에 따라 이질적인 구성원들이 섞이게 되고, 이들을 기존 공동체에 정서적으로 강하게 편입시켜줄 계기가 요구됩니다.

이 때 등장하는 게 곧 기존 멤버들이 겪었던 경험과 최대한 유사한 것을 다시 재생산하는 겁니다. 후속 세대들이 비록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겪은 것이긴 해도 근본적으로 비슷한 류의 경험을 겪게 함으로써 기존 세대들과의 이질성을 최대한 줄이는 거지요.
유가네
15/04/05 22:53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자유롭게 많은 것을 해볼 수 있는 시기인데...위에 말한 것들은 제가 애정이 있는 동아리라 말은 못하였지만 악폐습이 맞긴 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많이 노력을 해야죠...
15/04/05 19:43
수정 아이콘
저도 공연동아리 들었었는데, 나이가 아닌 학번을 우선시하는 '전통'이 있다더군요. 보통 학번이라 피해보는건 없었지만 꼴같잖아서 일주일만에 때려친 기억이..
15/04/05 21:31
수정 아이콘
폐습을 전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유지시키는 것이겠죠.

그러한 폐습의 특징중에는 상급자의 위치가 될 수록 편해지는 구조로서 하위자를 착취하는 구조라는 겁니다. 폐습이 없어지려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가 깔려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강력한 외부충격이 아니면 깨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조직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필연적입니다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이 예전의 것에 익숙하거든요.

경험의 재생산은 대부분의 폐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있다면 폐습의 재생산입니다.
기아트윈스
15/04/06 05:17
수정 아이콘
혹시 제가 위에서 남긴 [경험의 재생산] 개념을 놓고 하신 말씀이라면 일단 오해를 풀기 위해 몇 가지 첨언하겠습니다.

1. 그 아무리 혐오스러운 관습, 폐습, 인습, 인간, 행위, 문화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잘잘못을 보편적 관점에서 논하고 파괴하는 것과 별개로 언제 어떻게 그것이 발생되었으며 어떤 메커니즘으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제시한 관점은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논문을 쓴다면 어떤 접근이 가능한지 두드려본 것에 불과하지 해당 폐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2. 예컨대 동서고금에 두루 나타났고 나타나왔고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나타날 무수한 성인식 계통의 의례들은 모두 이 경험의 재생산 개념이 적용 가능할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다양한 종류의 성인식 의례들이 폐습인지 관습인지 뭔지 가치판단을 적용하기 이전에 그 의례들이 본질적으로 발생하고 유지될 수 있게끔 해주는 데에는 어떤 분명한 메커니즘이 존재할 테고, 이 걸 가치중립적 관점에서 [경험의 재생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지요.

3. 이런 종류의 의례행위들을 경험의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다면 이제 무엇을 폐습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관례라고 부를지 (즉 어떤 가치판단을 적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할 단계입니다. 여기서 제가 새로 제시하고픈 가설은 [대개의 폐습은 본래 합리화가 가능한(rationalizable) 종류의 의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입니다.

4. 이 가설은 사실 제가 만들어낸 건 아니고 역사철학자 아놀드 토인비에 빚진 겁니다. 토인비는 세계사의 흐름을 세계제국의 탄생-붕괴 사이클의 리드미컬한 반복을 뼈대 삼아 파악했습니다. 세계제국은 보통 [창조적 소수]가 각종 룰을 만들어내고 제국 운영의 원칙을 확립하는 동안 생생한 활기를 띄고 돌아가다가, 대개의 사가들이 전성기라고 부르는 시점 즈음에 이들이 [지배적 소수]로 화하면서 경직되고 고착화된다는 거지요.

이 관점을 스케일만 줄여서 각급 동아리의 전통과 연속에 빗대어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창립 멤버들과 초창기 리더들이 동아리 운영 원칙과 관례들을 정하고 굴릴 때에는 이 원칙과 관례들을 만들어내고 합의한 본인들이 현직에 있는 동안은 [언제든 수정 가능한] 유연한 형태를 띱니다. 또 애초에 합리화할 구석이 없었으면 초창기 멤버간의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초기의 환경에서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을 공산이 높지요.

그러다 이 창립자들이 퇴장하고 창건의 기억이 없는 이들이 권력을 이어받게 되면 원칙과 관례들은 이전보다 훨씬 강한 권위를 갖게 되고 유연성이 사라집니다. 관례들에는 이제 창립자의 권위가 서려있으므로 후계자들이 함부로 바꿀 수 없는 노릇일 뿐더러 후계자의 정통성은 창립정신의 계승과 수호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더욱 더 바꾸기 어렵습니다 . 만약 이 관례들을 합리적으로 보이게 해주는 초기의 [환경]이 계속 유지된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이 환경 자체의 변화로 인해 관례들이 환경과 모순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불합리하게 변할 때입니다. 불가피한 경직성 때문에 환경에 따라 변화하며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시키는데 실패한 관례는 이 시점에서 [폐습]이라고 불려 마땅한 종류로 타락하겠지요.

이 시점에서 토인비는 세계제국의 붕괴을 이런 종류의 타락이 임계점을 돌파하는 시점이라고 설명합니다. 임계점을 돌파하기 전에는 불합리한 폐습이 어떻게 꾸역꾸역 재생산되며 유지가 되고, 또 간간히 극적인 개혁을 통해 조금씩 변하다가 어느 순간 환경의 변화가 이런 온건한 개혁이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으로 날아가버리면 제국이 붕괴된다는 거지요.

아마 글쓴이의 동아리에서 일어난 행동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겁니다. 관습의 폐습화가 임계점에 도달해서 파열음을 낸 것으로요.
15/04/06 00:29
수정 아이콘
'전통'이라 부르기 민망한 짓을 재생산하는 사람들을 선배라고 부를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나이를 어디로 드셨는지 아직도 과거에 취해 사는 이들이고, 전혀 발전하지 못하는 부류인데 그에 맞게 대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대개 술문화 등 잘못된 관습을 싫어하지만, 선배들과 척지기는 싫어서 반복하고, 그러다보니 별로 나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게 아름다운 전통에 한 몫을 해가더군요.
15/04/06 03:07
수정 아이콘
20대때는 한창 혈기도 넘치고, 사회에 불만도 많고 해서, 굉장히 진보적인 스탠스를 가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 행동들을 보면 보수적인 경우가 많지요. 유가네님의 동아리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던 듯 합니다.

진보-보수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예전부터 당연스럽게 내려오던 일들을 어느 한 순간 바꾸는 '개혁'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실상, 우리가 그렇게 외치는 '진보', '개혁' 이라는 말들도, 자신이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거나,
또는... 진짜로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시점에서는 행동으로 옮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집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 상황에서만 자유롭게 개혁을 논하게 되지요.

이 글만 놓고 보면, 동아리 하나에 국한된 작은 에피소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것보다 더한 상황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좌절도 겪고, 그러면서 점점 보수화가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패션좌파, 입좌파'라고 조롱하게 되기도 하고요...
"말로만 하지 말고, 당신부터 바꿔보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이 글을 읽고나서 새삼 더 와닿네요.
유가네
15/04/06 05:16
수정 아이콘
저도 이런 것들을 보며 단순히 여기서만 일어나는 일같지는 않아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개혁은 좋아하지만 실제 행동은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싫어하는 점은 있어도 여태까지 좋아서 해온 이 동아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직은 단순하다고도 볼 수 있는 동아리이기 때문에 저도 더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후면 집행부가 되는데 사실 저 혼자만 하는게 아니니까 걱정도 많이 되는데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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