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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04 01:34:01
Name 바위처럼
Subject [일반] 감수성 터지는 밤



계기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행동은 언제나 인과적 요소가 있는 것 아니었나? 행동이 아니더라도, 감정의 움직임이나 심리의 변화는 무언가의 이유를 통해 발현되는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때때로 이런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외로움이 사무칠때가 있다. 어떠한 계기도, 이유도 없이 그저 문득, 아무렇지도 않았던 충실하고 평화로운 하루의 마지막이 거대한 외로움의 기습으로 마무리 되려 할 때가.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처럼 무례하게 내 머리에 틀어앉은 외로움은 끊임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게 한다. 애꿎은 카카오톡과 SNS를 계속 띄우고 닫는다. 이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미 너무 오래되어버린 지난 인연들에게 다음 날 쪽팔림에 죽어버리고 싶어질 짓을 하려다가도 막상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외로움과는 별개로, 그리움도 아련함도 아닌 하나의 단편으로 남겨져 있어서 외로움을 전하고 싶어지지가 않는다. SNS에 외롭다며 비명을 질러볼까 하다가도, 이내 쏠쏠히 먹은 나이에 쓴 웃음이 번진다. 한참 어린 후배들이 잔뜩 친구로 붙어있는 SNS는 내게 전혀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줄 때가 종종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이럴 때면 누구라도 좋으니 한 마디 말을 걸어달라고 칭얼대고 싶어진다. 순간 나약할대로 나약해진 스스로에게 묘한 혐오감과 흥미가 동시에 피어오른다. 아직도 이런 감수성이 남아있구나, 내가. 마음 한 구석에서 안도를 느낀다. 어쩌면 이렇게 뜬금없이 터지는 외로움, 고독, 감수성 같은 것들은 제발 연애좀 하라고, 혹은 연애가 아니어도 좋으니 인간적인 사랑을 하라고. 지금 이렇게 메마른 감정좀 적시고 살라고 내면 어딘가에서 외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연애세포가 간간히 생존신고를 하며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듯.



하지만 없다. 애인이 없는건 별 상관 없다. 사랑하는 이가 없다. 사랑하고픈 이도 없다. 외로움이 사무쳐도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충동, 사랑에 대한 충동은 점점 약해져 어느새 아주 미약한 숨결을 흩는다. 그래서 조금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생겨도,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겨도, 성냥개비에 붙은 불처럼 금새 사그라들어 재가 된다. 따듯해질 새도 없어 차갑기만 한 그런 재. 내게 뭔가 문제가 있는걸까 싶다가도, 아니. 뜨문뜨문 이성을 안고싶고, 자고싶고 하는 충동들은 여전하니까 괜찮다고 다독여본다. 아직 때 되면 제때제때 알아서 잘 일어나니까. 언제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없다. 언제부턴가 이런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다. 이마저도 이제 점점 희미해져서 언젠가는 이런 충동도 못 느끼는게 아닐지 하고 불안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써 본다. 나에게 반항하기 위해, 자꾸 되새기기 위해. 외로움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아무일도 없는 것들을, 아무일도 하지 않으려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고.



외로움은 어디에고 있다. 다만 여기 저기서 조금씩 사라져 가고, 이제는 점점 발견하는 빈도수도 드물다. 입었던 상처들은 흉터도 찾기 힘들만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그 아릿한 고통들이 오히려 그립다. 누군가를 절실히 원하는 것. 그 사람이 나와 조금이라도 벌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기분들. 아무리 맨 살로 가깝게 붙어있어도, 서로의 심장박동과 체온을 끊임없이 나누어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인것 마저 아쉬웠던 그런 감정들. 이성적일 수 없고, 한심할 만큼 침착할 수 없던 나날. 그럼에도 외로움은 어디에고 있었지만,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서로의 우산이 되어주던 시간들. 그 때의 당신들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그랬던 기분만이 흐릿하게 남겨져 있다. 기약 없는 다음을 위해. 기약이 없어서, 아직도 없다.



아침이 찾아오면 없어질 이 괴로움이, 잠들기를 방해하는 서글픔이. 몇 시간만 지나도 내가 미쳤다며 자책할 이런 쪽팔림이. 아직 있다는 것만 다행이라 여겨본다. 깊게 아래로 깔리는 한숨을 잠자리 삼아 밤을 청해본다. 손 닿는 거리에 따스함이라곤 쥘 수 없는 홀로 누운 다섯평 남짓의 작은 방 안에서,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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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04 01:39
수정 아이콘
그러나 때때로 이런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외로움이 사무칠때가 있다. 어떠한 계기도, 이유도 없이 그저 문득, 아무렇지도 않았던 충실하고 평화로운 하루의 마지막이 거대한 외로움의 기습으로 마무리 되려 할 때가. (2)

저도 외롭나 봅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王天君
14/12/04 03:53
수정 아이콘
이런 글을 이해하면 안되는데.
미니언
14/12/04 14:22
수정 아이콘
외로움에 압도되는 빈도가 잦을수록 점점 무덤덤해지는 것도 느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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