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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03 19:12:25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제자로서의 도리를 지킨다는 것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종사한 것도 어느새 2년차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아왔지만.
이름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나는 분들이 있는 반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분명 이론적으로는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 기억이 더욱 희미해 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지금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인것 같습니다.
나의 암흑기(?)를 참아주고 지켜봐주신 선생님이라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저는 공부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숙제는 당연히 하지 않았고, 시험은 대충대충 봤습니다.
숙제를 심할정도로 하지 않아서 교무실에도 여러번 방문했습니다.

물론 "정의의 철퇴를 맞아라!" 하면서 성적이 수직하락 했다면 학교측도 별말 없었겠지만,
초등학교는 역시 열심히 공부하는것 보다는 시험감각이 더 중요한 시기인지라, 성적은 그럭저럭 상위권이였습니다.
고로 부모님은 성적표 만으로는 세부적인 사정을 당연 모르셨고 (성적은 나름 좋았으니),
선생님도 최대한 부모님까지 가지 않고 학생 선에서 매듭을 짓기 원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기억에 생생한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어느 평화로운 날, 교내방송이 들려옵니다: "OOO 학생은 당장 교장실로 찾아오세요."
어라? 교내방송에서 내 이름이 들립니다.
심지어 교무실도 아니고 교장실이랍니다. 교무실은 익숙한데, 교장실은 좀...
그렇게 저는 영문도 모른채 교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교장실에는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숙제를 2달동안 밀리고 하지 않는 학생은 드물어서, 교장님과 함께 의논할 필요가 있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순간 상황 파악이 됩니다. 아 또 같은 이야기구나...

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의외였습니다:
"보아하니 과학과 수학 숙제는 제대로 내고 있는것 같은데... 다른 과목에 흥미가 떨어진게 아니니?"

순간 뜨끔했습니다. 뭔가 속마음이 들킨듯한 느낌.
뭔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다음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교장님과 합의를 해서 제안을 하나 하기로 했는데, 한번 너의 생각을 말해줘 보겠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까지 내지 않은 모든 숙제를 모두 낸 걸로 처리 해줄수 있단다.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단다."
(...?)
"앞으로 모든 숙제를 과학과 수학숙제처럼 해올수 있겠니?"
"과학선생님에게 들은 너의 모습은 아주 적극적이라던데. 너라면 다른 과목도 쉽게 해낼수 있다고 생각해."

순간 고민되었습니다. 2달간 쌓인 숙제를 다 하기는 정말 미친짓이라고 부담을 느끼고 어느새 숙제를 그만뒀다는 것,
과학과 수학만을 좋아했다는 나의 마음을 파악했다는 것,
이 두가지를 파악한 선생님의 고심을 느끼고서 나는 그 제안을 차마 거절할수 없었습니다.

그 제안을 받아드린 뒤 난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게으른 성격을 고쳤고 (물론 지금도 게으른건 있지만...),
숙제도 곧잘 내는 나름 (..)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습니다.
성적도 더욱 성장해서, 그 후 더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쳤고, 취업도 무난히 성공하는 첫 퍼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이 이야기를 알게된 부모님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러 학교에 선물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거절하시는 담임선생님.

학생을 보는 눈이 달라질까 두려워 선물은 일체 사절하신답니다.
그리고 나서 제 부모님에게 전해준 한마디를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학생이나 학부모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스승이 되고 싶은게 아닙니다."
"다만 학생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서, 나중에 만나면 학생들이 아는척 해주고 인사한번씩 받으면 그게 교사의 기쁨이죠."



이 이야기는, 정년퇴직 나이를 넘긴, 교장님의 선생님이기도 하셨던, 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퇴직하려고 하셨지만, 교장님이 꼭 남아달라고 부탁해서, 2년을 더 남게 되시고,
그래서 교사인생의 마지막 해를 보내던 중, 저같은 이상한 학생을 만나 고생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 선생님께, 취업 후 꼭 한번은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곧 있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꼭 선생님을 초대하자고도 했는데,
어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기쁨이 된다는, 제자의 아는척은 더이상 해드릴수 없지만,
최소한 기억속에서 오래오래 간직하렵니다.
그게 제자로서 해드릴 최소한의 도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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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핑크초롱
14/12/03 19:27
수정 아이콘
좋은 스승님이시고, 그런 스승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좋은 제자시네요.
스타슈터
14/12/03 22:2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흐흐...
그분 기억속에도 제가 좋은 제자였으면 좋겠네요.
14/12/03 19:30
수정 아이콘
좋은 선생님들의 말씀은 다 똑같네요
아이들에게 보답을 바라고 한 게 아니다.
다만 그애들이 나이먹고 찾아와서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다는 감사인사가 교사로서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도 큰 힘이 되고 보람이 된다고...
선생님께 안부 인사 드려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스타슈터
14/12/03 22:27
수정 아이콘
그렇죠?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말씀 드려야지 드려야지 하다가 잊어버리고 저처럼 타이밍을 놓치고 ㅠㅠ
그게 할수 없는 지금은 그저 오래동안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야겠어요...
레지엔
14/12/03 21:18
수정 아이콘
에... 한국 얘기죠?;;; 뭔가 이런 얘기들을 외국 번역서에서 본 거 같은데... 부럽네요.
스타슈터
14/12/03 22:23
수정 아이콘
아쉽게도 한국이 아닙니다... ^^;
외국 생활도 17년차가 되어가네요.
ThreeAndOut
14/12/04 05:39
수정 아이콘
저도 첨에 혹시 외국? 했는데, 역시나 네요. 교장선생님이 학생의 숙제까지 챙긴다는데서 눈치를 까기 시작. 근데 외국에서도 초등 동창회같은거 하긴 하나보네요.
스타슈터
14/12/04 11:26
수정 아이콘
외국이긴 외국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국 유럽 이런 선진국가는 아니구요..크크
동창회는 하긴 하는데 다들 여러 나라로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라 한번 주최하기도 힘든것 같아요 ㅠㅠ
명절때 다들 귀향하는 타이밍 맞춰서 한번 만나려고 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장례식에서 만날 사람도 여럿 있겠네요...
아수라발발타
14/12/03 21:25
수정 아이콘
히야..... 가르치던 학생이 커서 "선생님의 영향으로 인생이 나아졌습니다 "이러면 정말 뿌듯할것 같습니다
스타슈터
14/12/03 22:31
수정 아이콘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한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말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직업이 교사인것 같아요. 좋은 의미의 나비효과의 출발점이 될수도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수도 있으니...
Lightkwang
14/12/03 22:42
수정 아이콘
와 정말 멋진 선생님이시네요.
저의 초딩시절을 되돌아보면 저렇게 아이를 설득하고 선택하게 해주는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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