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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20 00:10:43
Name 바위처럼
Subject [일반] 이별 이야기



이별이야기


원래부터 90년대 발라드를 즐겨듣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문세 씨를 알게 된 건 붉은 노을을 부르는 노래 못하는 한물 간 가수라는 이미지에서 이후 히든싱어나 불후의 명곡 등을 통해 생각이 송두리 째 뒤집힌 경우기도 하다. 90년대 당시의 나는 H.O.T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라고 믿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오늘은 이문세 씨의 이별이야기라는 노래를 듣다 떠오른 것들을 적어볼까 하여 키보드 앞에 앉는다.


이별이야기는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이별하는 내용을 가사로 다룬 노래다. 하지만 요즘 이 노래를 듣다보면 연인간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솔직히, 서로 좋은데 어쩔 수 없는 이별 같은 이야기는 요즘 세대에게 잘 와 닿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그만큼 많이 자유로워지고 개방적이 된 것은 좋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감성도 있었다고 한다. 혹은, 내가 근 몇 년간 로맨스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아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후회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대 모습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해.
그대 내게 말로는 못하고..
탁자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 서러워 이렇게 눈물만.. 그대여 이젠 안녕.


이 가사는 이문세 씨와 또 다른 여성분이(어떤 가수신지 잘 모르겠다. 이소라씨는 아닌 것 같은데..) 듀엣을 부르는 대목이다. 난 이 노래에서 이 부분이 가장 좋고, 가장 울렁인다. 사실 찻집에서의 이별이야기지만, 나는 들을때마다 '물로 쓰신' 이 부분이 '눌러 쓰신'으로 들린다. 그리고 그 눌러쓴다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마치 사별을 앞둔 노부부 중 의식을 잃고 누워계신 한 분이 병상에서 간호하다 잠든 늙은 반려자를 꿈에서 보고는 잘 쥐어지지도 않는 손으로 있는 힘껏 꾹꾹 눌러 쓴 쪽지에 마지막 이별의 글귀를 남기는 듯한 장면이 떠오른다. 유서라고 보기에는 조악한, 그러나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하고 싶은 마지막 그 한마디. 일평생을 사랑해 줘서 고맙소, 나는 먼저 떠나오. 서러워 눈물 흘리지 마오. 이렇게 이야기 하는 대신에, 그저 담담히 당신과 이별함이 슬프다고 적는 그 한 줄이 도리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내게 이 노래는 젊은 남녀의 이별보다, 평생을 함께한 이들의 마지막 이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그 영원한 ‘이별’을 떠오르게 한다. 원작자의 의도와는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 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이정도로 끝이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의 가족사를 덧붙여보고 싶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연세가 상당히 많으시다. 아버지는 이미 어느 회사에서도 정년을 넘긴 나이가 되셨고, 어머니께서도 벌써 50보다 60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셨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린 세대라고도 하고, IMF에 잔뜩 길거리로 나와야 했던 세대시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IMF, 실직, 사기, 주식과 부동산의 실패, 빚더미, 재취직.. 부모님의 중년 이후 삶은 아마 두 분이 젊으셨을 적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으리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래서 어머니와 자식 둘에게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을 갖고 사신다. 물론 주식이나 부동산의 실패, 사기 같은 부분들을 남 탓만 하기 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내가 부모라면 아마 나도 그렇게 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들은 아직도 한참인데, 주변 친구들은 벌써 은퇴에 돈벌이도 힘들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우리집은 그래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간신히 중산층에 가까이 들 만한 소득수준 이었으니, 아버지께서는 아마 마음이 급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나이는 더 이상 하루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할 만큼 남은 시간을 빼앗아갔고,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노후를 위해, 자식들을 위해, 아내를 위해. 쭉쭉 치솟는 코스피 수치를 보며 마음은 더 조급해졌고, 재개발 되는 지역의 건물을 보면서 희망을 찾았다.


자수성가의 길은 구부러진 절벽의 외길을 간신히 걷는 것일까, 아버지께서는 안정적인 중산층이 되기 위한 모든 도전에서 쓴 맛을 보아야 했다. 내가 태어나고 1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수입으로 괜찮게 살던 집이, 이제는 어머니의 수입으로 완전히 넘어오기 시작했고 허공에 날린 돈과 남겨진 빚은 아버지께서 열심히 살아온, 땀 흘려 바친 시간 그 자체였다. 이전보다 수입은 적어지고 빚은 늘어나 부모님께서는 혹독한 고생을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직장에 나가셔서 하루 열 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을 견디신다.


한 때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힘들고 절망적으로 느껴져서, 어머니께서는 자주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일종의 부채감과 패배감의 그림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계셨다.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삶을 존경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이런 아버지는 되지 말라며 간혹 취기에 스스로의 삶을 보람 없다 말하셨다. 너희에게 무언가를 남겨주려고, 니 엄마 고생하는 것 좀 줄여보려고.. 하며 말끝을 흐릴 때마다 어쩐지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그럴 수도 있지. 그게 꼭 아버지 탓도 아닌데. 멋쩍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허공에 의미 없이 흩어지기만 했다.


그래도 시간은 시간이라고, 여전히 힘들지만 어느새 우리 부모님께서는 견디는 싸움에 적응해 가셨다. 조금씩 빚을 갚으면서 희망을 찾기 위해 분주하셨다. 여전히 고생스러운 일을 매일 하며 일주일에 하루 이틀도 제대로 못 쉬는 주도 있지만 일자리가 있는게 어디냐고 웃으신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 이제는 노동의 피로감을 해소하는 것조차 건강에 벅차시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시는 것 같다. 감기 한번을 안 걸리시던 분들이 이제는 작은 감기에도 누워 계신걸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전보다 더 살갑게 지내려 노력하시는 듯 하다. 서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반려자를 배려하며 짧은 저녁시간을 보내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실 이혼을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집안사정이 어려워졌었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왔지만 그래도 그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의 유대감 이라는 것은 엄청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화하는 시간도 더 길어지시고, 자주 웃으신다. 집안일을 나누고, 때때로 그 집안일의 결과물에 투덜대시면서도 어쩐지 지금이 한창 잘 벌던 그 때보다 가족이 가까워졌다는 느낌이다.


그런 부모님께서도 너무 삶이 힘든 나머지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신다. 이제 어디 아프면 그냥 가는 거지.. 뭘 검진을 받고 치료를 하려고 애쓰고 그러느니.. 일하는 것도 할 만큼 했다.. 니들도 다 컸는데.. 부쩍 남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나신 두 분을 보며, 씁쓸한 슬픔이 번진다. 어느새, 벌써. 그럴 연세가 되어가시는 것이다.


이문세의 이별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우리 부모님이 떠올랐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더 길었을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겨내고 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애틋하게 지내려 노력하신다. 그런 두 분도 언젠가는 이별을 하실 테다. 문득, 두 분의 모습이 이 노래에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두 분에게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믿고, 그러길 바란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먼 훗날에 이별의 날이 온다면 서로를 떠나야 하는 것에 아플 평생의 사랑을 하셨다는 일에, 그리고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랄 수 있었음에 많이 감사할 것 같았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이란 참으로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그 이상의 가치와 숭고함이 있음을 매일 깨닫게 해 주신다. 두 분이 더 이상 죄책감이나 부채감 같은 것 없이, 때때로 티격태격 하다가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애틋하게 오래, 오래 지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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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잡으
14/10/20 00:17
수정 아이콘
고은희씨였죠.
고은희, 이정란의 테잎을 늘어지도록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네오크로우
14/10/20 09:11
수정 아이콘
저도 '물로 쓰신'->'눌러 쓰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느 프로에서 노래부르실 때 자막에 가사 보고 화들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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