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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3 23:52
경제사적으로 보면 대략 18세기 즈음이 조선 후기 경제의 융성기(좀더 크게 보면 동아시아 경제의 융성기였고)에 해당하는 점이
'태평성대'란 평을 받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4/07/03 23:56
을병대기근 시기가 끼긴 하는데 그거야 딱히 방법이 없는거니까.... 오히려 을병대기근이 대동법 전국확대의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한 거 같고요.
14/07/04 08:44
이성계나 정종이나 둘 다 전쟁터에서 닳고 닳은 사람들이라 보자마자 '야 이 미친놈, 어떻게 해서든 목숨만은 살려줄테니까 빨리 항복해'모드로...
개인적으로 '내가 하려는 거 반대하는 놈은 이거 보고 다시한번 생각해라'는 시범케이스 하나 잡은 거 같습니다.
14/07/04 10:31
1차 왕자의 난때 방원이 내건 기치는 '삼봉 정도전을 몰아내자'가 아니고..'적장자 놔두고 서자가 왠말이냐' 였습니다. 하여 왕자의 난 직후 세자는 난의 명분으로 인하여 이성계의 2남인 방과가 됩니다.(이 때 장남은 사망하고 없었죠). 방원이 '적장자 놔두고 서자가 왠말이냐'라는 기치는 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성계의 두번째 아내였던(첫번째 아내는 사망했기에 당당히 국모의 위치였지만) 신덕왕후를 첩으로 하는 것이었고, 또 그 배경에는 방과가 아들을 두고 있었지만 혼인한지 20년이 넘은 정실 처로부터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즉, 아들은 있지만 방과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게 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하여 정종의 후사는 그의 아들이 될 수 없기때문에 순서로써는 이성계의 그 다음 아들인 방간이 세자(혹은 세제)로 책봉되어 왕이 되어야 하는데..조정의 분위기는 '개국 및 왕권 확립에 공이 큰 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분위기로 가게 됩니다..여기에 1차 왕자의 난때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던 박포가 충동질하게 되죠. 이게 또 웃긴게 용의 눈물에서는 2차 왕자의 난 당시 박포가 직접 군사를 이끈 것으로 나옵니다만..실록에서는 박포는 막상 당일에 행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나?) 2차 왕자의 난은 방원의 세력이 크기도 했지만 명분도 약하긴 했어요. 방원이가 세자나 세제로 책봉된 다음 일으켰다면 모를까..또 기습을 했어야 했는데 거사일이 누설되어 방원이 준비가 되어 있었죠..(방원이 기습을 당해 타고 있던 말이 방원의 집으로 혼자 돌아가 부인이 진 줄 알고 자결하려 했다는 건 실록엔 없고 야사에 있죠) 2차 왕자의 난은 단순히 '니가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하는 마음과 권력욕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봅니다..
14/07/04 12:05
타고난 정통성만 따지면 숙종을 넘어서는 최고의 정통성 갑으로 임금에 오른 분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왕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장자 본인이 태어날때 아버지가 세자, 즉 본인이 원손(왕의 장손) 그리고 아버지도 큰 문제 없이 왕에 올라서 세자로 책봉됨 형제도 없음(!!!) 그리고 본인도 큰 문제 없이(??) 왕에 오름 마지막으로 퇴위 후 상왕까지 지낸인물(...) 정통성 甲of甲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세종의 원손으로 태어난 단종이죠. 숙종과 다른점은 왕실에 힘을 싣어줘야할 대비, 대왕대비의 부제, 문종은 즉위 후 세종의 3년상을 치른 후 바로 뒤이어 붕어하였기 때문에.. 단종에게는 새어머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실권을 가지고 있던 숙부들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수양대군이요.. (그리고 왕실의 큰 어르신 대우를 받고 있던 양녕대군이...) 숙종은 숙부도 없습니다.(2대독자, 즉 아버지도 고명아들, 본인도 고명아들) 가장 가까운 왕족이 당숙(5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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