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우는 역시 이거지! 하고 트레이드 마크가 따라붙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의 배역, 연기 스타일, 배우의 이미지,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고 상징으로 남게 되는 것이죠. 찰리 채플린, 제임스 딘 같은 배우들은 이름만 들어도 그 배우의 연기와 이미지가 딱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룡 또한 이 리스트에 끼워놓기에 충분한 배우입니다. 그의 전매특허 아크로바틱 무술 연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이렇게 한 분야의 거장이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과 특기를 가지고 역사를 일구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된 이미지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배우에게 강력한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시대는 변하고 배우 자신도 나이를 먹으면서 육체와 정신이 변합니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은 추억팔이로 전락할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전 안주보다는 변화를 선택하는 배우가 옳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폴리스스토리 2014로 돌아온 성룡의 변신이 반가웠죠. (사실 그는 이런 변화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 시도가 늘 취권으로 쌓아올린 아성을 무너뜨릴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이죠.)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종’ 반장은 밖에서는 성실한 경찰관이지만 좋은 아버지로 대접받지는 못합니다. 늘상 딸과 부딪히기 일쑤인 그는 이번에도 딸이 불량한 모습으로 다짜고짜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가 볼 때 딸이 고른 ‘우’ 라는 남자는 어딘가 뒤가 구린 구석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딸과 티격태격하던 중 갑자기 자살테러범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하고 이를 저지하려던 종은 갑자기 습격을 받고 기절합니다. 그리고 딸과의 재회의 장소였던 클럽(?)은 순식간에 인질극의 무대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익숙했던 성룡의 이미지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가 연기한 ‘종’이라는 캐릭터에서 넉살이나 개구진 모습은 전혀 찾을 수가 없죠.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또한 비장미가 가득합니다. 성룡의 액션 연기 또한 웃음기를 싹 빼고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릴려고 노력한 것이 보이구요. 합과 합을 주고받거나, 주변의 소도구를 이용해 재치를 뽐내는 이전의 액션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소품과도 같았던 그의 액션이 이번 작품에서는 하나의 살상도구처럼 다루어집니다. (물론, 중국 액션의 전통적인 템포는 여전해서 헐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늘 웃음을 위해 몸을 던지던 노장의 변신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이 영화는 두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스릴러의 긴장감, 깔끔한 액션, 무거운 고뇌가 모두 들어간 폴 그린그래스의 본 시리즈 같은 작품은 결코 쉽게 나오는 법이 아니죠. 시나리오부터 연출까지 모든 것이 엉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갑자기,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에게 미안해지려고 하는군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있어 첫번째 걸림돌이 나옵니다. 바로 넘쳐나는 신파에요. 인물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평이한 대화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는 손발을 자극합니다. 철없는 딸, 이를 못마땅해하는 아버지 사이의 대화는 이것이 오역된 자막이 아닌가 할 정도로 구닥다리에 작위적입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영화는 구슬픈 곡조의 음악을 깔아놓고 관객들에게 슬픔을 채근합니다. 도입부부터 이렇다면, 감정이 더 과해질 수 밖에 없는 중후반이야 안봐도 뻔한 노릇이죠. 오죽하면 전 종의 딸이 우는 장면을 보고 혹시 클레멘타인의 판권을 성룡이 사들인 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색한 대사에 뻔한 연출까지. 오랜만에 보는 왕가위 스타일의 편집에서 전 향수마저 느꼈습니다. 아, 신파가 종 부녀의 것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의 사연은 정말 너무 슬퍼서 눈물샘이 해일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1970년대에 보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요.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이 것도 모자랐는지, 이 영화는 20세기 말에 유행했던 홍콩 영화의 후까시를 섞어 멋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 식의 멋을 추구하는 것은 감독의 자유입니다만, 영화의 장르가 다찌마와 리처럼 노골적인 패러디가 아니고서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어요. 이를테면, 정확하진 않지만, “사나이로군” 하고 남자다움에 탄복한 대사가, 정말 진지하게 나옵니다. 테러범과 경찰이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도 호기를 부리는 누군가와 그의 용기를 높이 사는 이의 인정이라니! 아, 다행이 성룡의 입에서 나온 대사는 아닙니다. 뭐 누구의 입을 빌었든, 마초다움을 저렇게 뽐내는 게 진짜 멋지다고 생각한 건지 여전히 궁금하긴 하지만요.
물론 액션 영화이니 치고 박는게 화끈하기만 하다면야, 참아줄 사람들도 있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도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증명해냅니다. 먼저, 액션시퀀스를 아무런 개연성 없이 쑤셔넣은 게 티가 나요. 아무리 액션씬의 그림이 멋지더라도, 그 장면이 삽입되기 위해서는 앞뒤로 논리적인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것이 정말 귀찮았나 봅니다. 그 예를 들어볼까요? 고층 빌딩 위 좁은 난간에서 종 반장이 흉기를 든 괴한을 제압하고 에어 매트 위로 함께 떨어지는 씬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씬을 구현하기 위해서 플래쉬백을 이용합니다. 아빠 얼굴의 그 상처는 뭐야? 오늘 내가 옥상에서 누구랑 몸싸움을 벌이다가…. 하고 과거를 굳이 회상하면서 이 장면을 보여주는 거죠. 이것은 어떤 복선도 아니고 전체 줄거리와 연결되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냥 어제 저녁으로 컵라면 먹었어 식의 자잘한 에피소드에요. 그런데 이런 식의 연출은 꽤나 자주 사용됩니다. 종 반장의 과거 회상 속에서, 상상 속에서 계속 해서 액션이 무의미하게 나오는 거죠. 게다가, 성룡의 격투 씬이 부족했는지 영화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직접 대결 구도를 만드는 지경까지 갑니다. “너가 내 부하랑 싸워서 이기면 어쩌구 저쩌구~”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캐릭터의 성격과도, 전체 줄거리와도 아무 연관이 없는 액션입니다. 마치 드래곤볼 아류작의 무술 토너먼트를 보는 기분마저 들죠. 이런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옹박이 다크나이트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제가 지적질을 멈출 수 없는 부분이 또 있죠. 이 영화는 중반까지(관대하게 보면 후반까지) 스릴러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정작 스릴러로서 너무나 허술합니다. 종 반장이 탈출할 때는 아예 이걸 협조 수준으로 방치하고 있고, 정작 자신의 범행이 어떻게 되가는지 범인이 너무나도 무신경합니다. 어쩔 때는 아예 안 될 줄 알고 혼자 꼬장을 부리는 느낌이 들어요. 중간 중간 협상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는 생각이 없거나, 의지가 없거나, 아니면 둘 다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선택을 억지로 하고 있죠. 사실 그가 펼치는 인질극이란 애초부터 말이 아예 안되는 것이긴 했습니다. 저 인원과 장비를 가지고 대체 뭘 어떻게 하겠어요. 사실 그 인질극의 동기부터가 애당초 이해가 안가긴 하지만요(이건 스포라서 말을 못합니다. 가장 어이 없는 부분이에요)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한숨이 나오긴 처음입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갔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인 영화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제가 지금 더욱 화가 나는 건 성룡의 연기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만 만나면, 우리는 노익장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전 이게 그저 시행착오의 한 단계임을 빌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다는 기대보다는 아예 망각하는 게 속 편하긴 할 것 같지만요.
@ 생각해보면 저 정도의 몸놀림을 구사할 수 있는 해당 연령대의 남자 배우는 거의 없지 않나요? 은퇴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이 영화의 원제는 Police Story 2013입니다. 2014년에 개봉하는 작품을 2013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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