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4/01/13 14:06:16
Name 김제피
Subject [일반] [미니픽션]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
14살 때 처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이른 편. 학교 뒷골목이나 동네 구석 놀이터에서 쪼그려 앉아서 피웠던 담배 맛이 기억난다. 하루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오던 형과 마주쳤다. 귀에서 '웨엥-'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뺨을 맞았다. 형은 어린 나이에 모서리를 배회하며 사는 사람들은 일찍 철이 들거나 범죄에 빠진다고 충고했다. 뿌연 연기처럼 마음이 떠다니던 시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먹고 놀기만 해도 충분했던 집은 IMF와 함께 부지런히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께서는 개미떼에게 뜯어먹히듯, 야금야금 건강이 나빠지시다 어마어마한 병원비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뒤에는 절망적으로 열심히 살아야 했다. 일하고 자고. 일하고 자고. 정확히는 일을 끝내고 바로 자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운 시기였다.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옮기다 말고 문득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게 철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때로는 자취방에서 어울리지 않게 끅끅 울었고 들릴듯 말듯 한 목소리로 허공에 넋두리를 해댔다.

그러면, 조금.

괜찮아졌다.

출근길 지하철은 그야말로 장엄했다. 너무나도 바쁜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겁이 나다가도 어느 순간 묘한 동질감에 휩싸여 있었다. 춮근길의 그들처럼, 나도 눈에 힘을 주고 허리를 세웠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는 아침의 패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녹초가 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술을 마시지 않거나 비몽사몽이 아니면 온전히 마주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만 외톨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세상이 형편없이 망가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우울함'이란 기막히도록 기묘한 감정이라 손에 박힌 가시처럼 밤낮 없이 신경을 긁었다. 무엇이라도 하고 있을 때는 꾹 참을 수 있었지만 어떤 약속도 없이 집에 혼자 있게 되는 날이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을 내리쳤다.

가끔은 나란 인간이 어딘가 단단히 비틀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난 아무렇지 않은데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히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됐다는 게 명확했다. 인류를 위해서도 그 편이 문제가 없다. 내가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면 많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데 그게 늘 어려웠다.

생활하는 것조차도 버거운데 인간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 이 와중에도 '사랑'을 한다. 세상에나. 눈부시게 아름답고 상냥한 여자였다. 그 아이를 보면 힘이 저절로 났다. 그렇게 하고도 몸과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플 때면 정신없이 따귀를 맞던 때로 돌아가 보곤 한다. 형은 일찍 사춘기를 겪던 내게 범죄자가 될지, 철이 들지 선택하라고 했다. 아쉽게도 형은 철이 든 이후의 삶이 어떤지를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걸 알려주면 자칫 내가 비겁한 선택을 하리라 우려한 모양일까. 단지 현실을 버티지 못하는 자들은 범죄자가 된다고 으름장만 놓았으니 말이다. 겁도 없이 비행을 저지르던 중학생 소년에게도 범죄자라는 단어의 무게감에 공기가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걸 생각하면 어지간히도 순진했다. 그때의 따귀 덕분인지 쉽지 않은 생활이지만 비교적 잘 살고 있다.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화도 보고 외식도 한다. 친구들과 때때로 술도 마시고 한바탕 욕지거리도 서슴치 않는다. 가끔은 침대에 누워 소설과 수필도 읽는다.

그리고 꿈도 꾼다.

인간에게는 각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로고스가 있다. 나를 지탱하는 로고스는 누구나 다 '인간적인 삶' 그 이상을 살지 못한다는 안도감이자 동질성이다. 다 같이 늙어 죽는다는 뜻이다. 남녀노소, 빈부를 막론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진리. 따라서 산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주어진 현실에 맞선다는 것은. 도망가지 않고 열심히 산다는 것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일종의 예의가 아닐까. 자기 삶만큼은 책임을 져야지. 형이 말한 철이 든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SuiteMan
14/01/13 14:22
수정 아이콘
저도 최근에 아주 인상깊은 구절을 들었습니다. 김용건 아저씨가 고두심 아줌마하고 김혜자 1인 연극에 놀러갔다가..김혜자 선생님의 극중 대사에 너무 감동받았다고 했었는데.. 그 대사가 "인생은 잠시 빌려 쓰는거니, 아주 잘 쓰고 도로 갖다 줘야한다는.." 그런 뜻이 었던 걸로 기억되네요..제피님 논지와 비슷하지요? 흐흐
다다다닥
14/01/13 16:28
수정 아이콘
짧지만 자기 색깔이 들어간 이런 글 정말 좋아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4/01/13 23:32
수정 아이콘
간만에 괜찮은 글 읽어서 좋네요. 자주 써주셔요.
Black_smokE
14/01/14 21:08
수정 아이콘
김제피님, 혹시 개인 공간에 퍼가도 될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BERSERK_KHAN
14/01/14 22:3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2)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9272 [일반] [축구] FIFA Ballon d'Or 2013 가 오늘밤 1:30분에 발표됩니다. [23] 최종병기캐리어3653 14/01/14 3653 0
49271 [일반] [동물농장] 보고 펑펑 울었던 농수로에 갇힌 형제 개 사연.JPG [15] 김치찌개5776 14/01/13 5776 0
49270 [일반] 전 세계에서 특허 영향력이 가장 높은 자동차 기업 Top10 [2] 김치찌개3300 14/01/13 3300 0
49269 [일반] 세계 제조회사 매출 순위 TOP 25 [2] 김치찌개13128 14/01/13 13128 0
49268 [일반] MS vs PC방 [33] 요정 칼괴기6440 14/01/13 6440 0
49267 [일반] [해축] EPL 2014결과 예측 [44] Schol3763 14/01/13 3763 0
49266 [일반] 인생의 전환기를 계획중입니다 [18] 흰둥5885 14/01/13 5885 1
49265 [일반] 더원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 [46] 당근매니아186697 14/01/13 186697 3
49264 [일반] [MLB] A-로드의 약물에 대해 보쉬 원장의 인터뷰 [21] 최종병기캐리어4628 14/01/13 4628 0
49263 [일반] AMD의 Kaveri가 내일 출시되네요.. [21] Rein_114763 14/01/13 4763 0
49262 [일반] 투송플레이스/에이핑크/B1A4/에릭남&김보아의 MV와 레인보우블랙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5] 효연광팬세우실3384 14/01/13 3384 0
49261 [일반] 7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수상 결과 [22] 리안,5411 14/01/13 5411 0
49260 [일반] [미니픽션]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 [5] 김제피4211 14/01/13 4211 8
49259 [일반] 말이란 [8] 밀물썰물3106 14/01/13 3106 2
49258 [일반] 기대되는 '사극' 정도전 [77] 비연회상9073 14/01/13 9073 3
49257 [일반] 교학사 교과서 선정한 고등학교, 교재 선정과정 외압 드러나 [23] 바밥밥바6409 14/01/13 6409 8
49256 [일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보고 왔습니다.(스포) [2] 王天君4854 14/01/13 4854 3
49255 [일반]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한 기자. [43] No.428071 14/01/13 8071 1
49254 [일반] 증명 할 수 없지만 당신이 진짜라고 믿는 것 [30] 순욱6202 14/01/13 6202 3
49253 [일반] 난 더원이 좋다. [37] 영웅과몽상가6073 14/01/13 6073 0
49252 [일반] 초끈이론과 M-이론... [53] Neandertal8955 14/01/12 8955 1
49251 [일반] SF 초보에게 권하는 20권의 명작들 (1) [60] jerrys65138 14/01/12 65138 10
49250 [일반] 재미로 계산해본 2013년 소녀시대 수익 [20] 삭제됨6064 14/01/12 606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